한국의 창종자들

증산의 종교는 그가 죽어서야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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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교 강증산④

교의 세운 사람은 둘째부인… 증산과 함께 신앙의 근본

강증산은 종교를 세우지 않았다. 촌마을에 방 하나를 얻어 약방을 열고 사람들과 만나 함께 꿈을 꿨을 뿐이다. 증산의 종교는 그가 죽어서야 시작됐다.

강증산의 유해가 있는 김제 금산면 오리알터의 영대.

강증산의 유해가 있는 김제 금산면 오리알터의 영대.

증산교의 교의를 세운 사람은 둘째부인인 고판례(高判禮, 1880~1935)다. 교단에 따라 태모(太母), 고수부(高首婦), 천후(天后), 고부인(高婦人), 사모(師母)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증산교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상제(上帝)로 칭하는 강증산과 함께 신앙의 근본이 되고 있다.

“고부인 통해 증산의 영이 강림”
강증산은 동곡약방을 중심으로 5년간 천지공사를 편 후 차경석을 만나 제자로 삼았다. 차경석은 미칠 것 같은 세상에서 동학을 거쳐 자신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둘은 첫눈에 의기투합했다. 강증산은 차경석의 정읍 집으로 잠시 거처를 옮겨 천지공사의 격식을 더한다.

차경석에게는 과부가 된 이종사촌이 있었는데 그가 고판례다. 강증산은 고판례를 둘째부인으로 삼아 수부공사(首婦公事)를 펴니 고부인에게 천하의 대권을 물려준 의식이라 보는 이도 있다.

고판례는 대단히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는 더할 바 없는 거침없는 언행을 남겼다. 그는 강증산 앞에서 당당히 자신을 첫째로 삼아줄 것을 요구했다. 흔쾌히 ‘일등수부(一等首婦)’로 정하리라는 강증산의 언약에도 다시금 그 다짐이 변함없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했다. 혼례를 마치며 강증산은 고부인에게 “이로부터 천지대업을 네게 맡기리라”고 명하니 주변에 자신과 고부인이 똑같음을 밝혔다. 후천개벽의 시대는 약한 자와 여성을 억압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여성이 세상을 주재할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영대안 강증산의 진영과 무덤.

영대안 강증산의 진영과 무덤.

‘선도신정경’에는 고부인이 무당임을 드러낸 구절이 나온다. 강증산은 어느 날 사람들에게 원을 풀어주는 뜻을 밝힌 후 고부인을 일러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천지 굿이니 나는 천하 일등재인이요. 너는 천하 일등무당이라.” 천지공사란 곧 천지 굿이며 대업을 맡긴 고부인은 천하의 큰 무당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모두의 원을 풀어주는 굿판과 다르지 않다는 선언이다. 그러니 당골이 되어 원을 풀라고 했다.

강증산의 사후 고부인은 증산이 자신의 몸에 강림하는 강력한 신비 체험을 하게 된다. 세간에서는 증산이 부활했다는 평이 자자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았다.

증산을 따르는 종교가 생겨난 배경에 대해 성균관대 임태홍 교수(동아시아학술센터)의 관점은 흥미롭다. “강증산은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러나 고부인은 증산의 종교를 실제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제자들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했습니다. 죽은 증산의 신이 자신의 몸을 통해 내려오는 강력한 종교 체험을 하였습니다. 직접 계시를 받아 갖가지 이적과 기행을 남겨 증산 사후 신앙의 중심이 됐습니다.”

교세 커지자 차경석과 다툼
강증산의 3년상을 치르고 고부인은 증산의 생일을 맞아 금산사 미륵전에서 탄신을 기념하는 치성을 드리다가 강력한 신비 현상을 경험했다. 하늘에서 저울과 갖가지 과일이 쏟아지는 환상을 보고 쓰러져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잃더니 깨어나 차경석에게 증산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는 이적을 보였다. 세상은 복잡한 가르침보다 단순한 기적에 더 귀를 기울인다. 증산의 영이 강림했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고부인은 “법은 증산께서 내렸지만, 일을 함은 내가 한다”고 말해 자신이 공사의 주체임을 거듭 밝혔다. 강증산의 유품인 약장과 물품을 모두 챙겨 자신의 거소로 옮기고 여러 차례 증산의 영을 몸으로 받아 신비한 일들을 보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부인 주변에는 새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선도교(仙道敎)라는 이름의 종교가 시작되었다. 교세가 커지자 차경석과 다툼을 벌이다 결국 일부 교인을 이끌고 나와 태을교(太乙敎)로 이름을 바꾼다.

증산 계열의 종교는 교당보다 사람 중심의 종교다. 교리보다 체험을 우선하는 종교다. 그 때문에 교단은 인물을 중심으로 계속 분열되어 퍼져나간다. 처음에는 고부인을 중심으로 비롯했지만 강증산 주변의 여러 인물을 축으로 갖가지 교파가 등장했다.

선도교, 태을도, 훔치교, 보천교, 미륵불교, 용화교, 증산대도교 등으로 시작된 증산 계열의 종교는 지금도 100여 개가 넘는 종단이 있으리라 추정된다. 그 이름도 다양해 일부만 살펴도 증산도, 증산교, 대순진리회, 증산법종교, 동도교 법종교회, 청도교, 순천교, 천인교, 임무교, 수산교, 금산교회, 삼덕교회, 증산대도교 등으로 다양하다. 그들은 전국 곳곳에 무리지어 신앙 활동을 했고 간도 땅까지 건너가 종교적 이상사회를 만들려고 애쓰며 강증산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부인 이래 가장 강력한 교세를 떨친 이는 차경석이다. 고부인의 인척으로 차천자(車天子)라는 별명을 가져 보천교(普天敎)를 세웠다. 승승장구하던 보천교는 후에 일제 탄압의 표적이 되어 소멸하고 만다.

김형렬은 강증산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다. 동학농민혁명에 종군하다 처음 강증산을 만났고 동곡약방을 연 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 죽을 때까지 수발하며 섬겼다. 그는 증산이 세상을 떠나자 증산의 영을 섬겨 포교를 시작했다. 특히 금산사 미륵불로 증산이 재림할 것을 굳게 믿어 미륵불교라는 이름을 내세워 종단을 열었다. 한때 금산사 승려와 결탁하여 절 안에 간판을 걸고 포교를 하였으나 미륵불을 두고 분란을 일으키자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금산사 어귀에서 후천세계의 선경이 시작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밖에도 강증산의 수제자였던 문공신은 증산교 문공신파를 세웠고, 이치복은 보화교를, 김광찬은 도리원파를 세웠다. 안내성은 증산대도회를 세워 증산의 환생을 기다렸으며 박공우는 태을교를 만들었다.

1949년 4월 8일 현재의 자리에 강증산의 유해를 다시 모신 장례식.

1949년 4월 8일 현재의 자리에 강증산의 유해를 다시 모신 장례식.

일제강점기에 증산 계열의 종교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총독부의 탄압뿐 아니라 내부적인 경쟁으로 소란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강증산의 유해를 둔 다툼은 법정분쟁까지 벌어졌다. 1929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유골반환 청구 소송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강증산의 본부인인 정씨부인이 관리하던 묘를 차경석이 파헤쳐 유골을 옮겼다는 것이다. 분쟁이 일어나 보천교를 반대하는 교단에서는 정씨부인을 내세워 유골반환 소송을 냈고 결국 차경석은 패소하고 만다.

고부인과 차경석 외에 다른 종단은 크게 포교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단순히 치성을 하며 증산의 재림을 조용히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이런 모습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최소 60여 개에서 많게는 100개가 넘는 종단이 있지만 한두 개 종단을 제외하고는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지냈다.

보천교가 사라진 후 증산 계열의 종교들은 큰 움직임 없이 산발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한반도의 운명이 급변하자 모악산 일대는 다시 증산 계열 종교의 성시를 이룬다.

증산법종교의 이상흥(70) 사무국장은 어릴 적 본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많은 종단이 있었습니다. 수천 명의 신도가 함께 살면서 수도하는 집단이 수십 개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대단해서 교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6·25 전후에 절정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이 일대는 오나가나 모두 증산교를 믿는 신도들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요즘엔 몇몇 종단만 남아 있고, 많아야 수십 명이 남아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교세가 미약해졌습니다. 시대에 맞는 교리와 신앙체계를 만들어내지 못하니 널리 포교가 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선도교·태을도 등 100여 개 종단
강순임은 강증산의 본부인인 정씨로부터 얻은 유일한 혈육이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고 세상의 고초를 다 겪다가 목숨을 끊으려 할 때 부친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이곳저곳을 떠돌며 강증산의 상을 모시고 치성을 드리다가 해방 후 오리알터에 자리를 잡고 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의 교단을 열었다. 강증산 부부의 묘인 영대를 중심으로 교세를 펼치다가 지금은 증산법종교로 이름을 바꾸어 이어지고 있다.

증산 계통의 종단 중 서백일의 용화교는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서백일은 금산사 미륵불로 다시 오리라는 강증산의 유언을 들어 미륵신앙을 표방해 신도를 모았다. 미륵이 이 땅에 와 만드는 세상을 용화세계라 하니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소원이 성취되는 지상천국이다. 용화종은 강증산의 가르침을 따라 그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종교를 표방했다. 6·25전쟁 와중에 금산사 일대와 전주에서 엄청난 교세를 떨쳤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의 종말론은 곳곳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서백일이 불미스럽게 죽은 후에 뿔뿔이 흩어진 신도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도를 닦고 있다. 조용히 그들만의 용화세계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윤이흠 명예교수는 종교의 지나친 신비화가 갖는 맹점을 지적했다. “증산 계열의 종교는 개인적인 신비 체험을 강조합니다. 증산의 제자들 역시 증산의 사상을 정확히 전달하기보다 자신이 본 것만 강조해서 전했습니다. 자기 체험을 중시해서 활동하다 보니까 종파가 많아졌습니다. 종교는 일정부분 신비의 영역을 갖습니다만, 너무 그쪽으로 치닫고 기복과 손잡으면 종교성이 흩어지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강증산의 가르침은 민족의 수난기에 나와 발전해갔다. 곧 망할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빛과 희망을 전하려 애썼다. 닥쳐올 불분명한 미래는 그야말로 두려움이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두려우니 절망한다. 증산은 늘 “마음을 놓으라”고 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파멸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라고 가르쳤다.

증산을 따른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이상사회를 꿈꿨다. 더러는 실패했을 수도 있다. 더러는 민중을 우롱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악몽 같은 상황 속에서 백일몽일지언정 꿈을 주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현실의 지옥에서 사람들을 구해낸 것이 강증산이 건네준 종교의 꿈이다.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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