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사람들

무형문화재 이정오 단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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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숨결 잇는 50년 장인정신

[대전 사람들]무형문화재 이정오 단청장

이순(耳順)을 넘겼다. 단청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었다. 조부가 세운 대구의 장안사, 그 절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단청이야 어린 눈에도 익숙하도록 보아온 터였지만, 진짜 제대로 단청을 올리는 장인(匠人)을 만난 것이다. 단청장 고(故) 김일섭 선생(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일 때문에 이 절에 들른 그와의 인연은 필생의 업으로 이어졌다. 고인은 단청 일을 하다 마당에서 유심히 자신의 붓질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그 소년의 눈매가 유달리 마음에 들었다.

“단청을 그려보고 싶니?”
그렇게 해서 어린 이정오(현 대전시 무형문화재 제11호 단청장 보유자·61)는 김일섭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시작은 고된 훈련의 연속이었다. 스승 곁에서 빨래도 하고 군불도 때고 잠자리도 봐드리면서 습작에 몰두했다. 처음 얼마간은 단청을 색칠하는 일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단청의 기초는 붓으로 그리는 습화에서 시작된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천 장의 습화를 반복해서 그렸다.

“모든 걸 스승님의 체취로 배웠습니다.”
5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일들은 평생 단청을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오롯이 내려앉았다. 그가 스물여섯의 나이로 최연소 지정문화재 수리기술자(단청기술자)가 되었던 것도, 숱한 문화재 보수작업에 참여하면서 문화재 수리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게 된 것도 모두 스승이 남기고 간 숨결과 다름없었다.

“단청은 내세 천상의 세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단청의 작은 문양 하나가 뭐 그리 대수롭겠냐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 작은 문양 속에 부처님의 큰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도 기술이지만, 붓을 잡는 마음이 항상 정갈하고 겸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재 보수 역시 외관을 지킨다는 차원보다 그 안에 깃든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처음 단청할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색상의 비례를 잘 맞춰 가칠을 하고 잘 마르면, 문양을 선택해 종이에 그린 다음 무늬에 따라 바늘로 가는 구멍을 뚫는데 이를 천초라 한다. 그것을 가칠 바탕에 대고 흰 호분(조개가루) 주머니를 두들겨 초안이 드러나게 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채색이 시작된다. 청·적·황·백·흑의 5색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색을 서로 배합하면 15~16가지의 색상이 나온다. 우선 첫 채색인 초채를 하고 흑선과 백선으로 문양의 경계를 나타낸다. 색상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5~6번은 해야 제 색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리는 일도 예사다.

“목조 건축물의 단청은 그 집의 격조를 높이기 위한 장엄의 수단인 동시에 썩기 쉬운 목재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건물의 각 구조가 착시로 인해 비틀리거나 처져 보이지 않게 하는 역할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정해진 격식과 질서에 따라 문양을 넣고 색을 입히는 것은 그 집에 정신을 불어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대전이 제2의 고향이다. 마흔 즈음에 절친한 친구가 대전 동춘당과 우암사적공원의 보수를 맡게 되자, 그를 돕기 위해 대전에 내려왔다 아예 정착했다. 대전에 대한 그의 애정은 유별나다. 이곳에서 무형문화재 지정도 받았고 개인 작업실도 열었다. 현재 그는 대전시 무형문화재연합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잘 아시다시피 대전은 그 역사가 깊지 않아 전통문화 또한 불모지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흩어져 있던 무형문화재를 소중하게 불러모아 연합회를 만들고, 무형문화재 축제도 열었습니다. 지난해 9월, 오랜 숙원 끝에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을 기공한 일은 두고두고 남을 뜻 깊은 일로 대전지방의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글·사진ㅣ유 성 문<편집위원>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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