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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간 화염’ 소방본부도 속수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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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순간서 완전 소실까지… 시민 가슴도 새까맣게 태웠다

불길에 휩싸인 숭례문. 소방방재본부는 고가사다리차 등을 동원하여 물을 뿌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숭례문. 소방방재본부는 고가사다리차 등을 동원하여 물을 뿌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타버린 것은 숭례문만이 아니다. ‘진압’에 실패한 소방공무원들의 자긍심도, 25년 문화재청 공무원의 자부심도, 그리고 ‘국보 1호’를 하룻밤 새 잃어버린 시민들의 가슴도 모두 새까맣게 숯덩이가 되어버렸다. 뉴스메이커는 현장 관계자 등을 취재하여 방화 순간부터 완전소실까지 5시간 동안 숭례문에서 벌어진 ‘사건과 현장’을 재구성했다. <편집자 주>

▶2월 10일 PM 8:45

채 10분이 안 걸린 ‘방화’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10일 저녁 숭례문. 상대적으로 긴 연휴 덕분인지, 아니면 영하 5.8℃를 기록한 날씨 탓인지 거리에는 인파가 많지 않았다. 한 노인이 배낭과 마대 자루를 들고 숭례문에 접근하고 있지만, 그의 행적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채종기(70)씨는 마대 자루에서 160㎝짜리 알루미늄 접이식 사다리를 꺼내들었다. 담장의 높이는 210㎝. 채씨는 가뿐히 담장을 넘어 숭례문 누각으로 올라갔다. 채씨가 선택한 장소는 서협문 쪽 비탈. 사전 답사를 하여 전체 6개 중 4개의 적외선 감지기를 이미 파악한 뒤다. 그러나 채씨는 나머지 2개 적외선 감지기가 자신이 선택한 곳 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몰랐다. 센서는 작동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경비업체 직원들은 채씨가 현장을 떠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보안업체 관계자들은 ‘신고’를 받고 정시에 출동했다고 주장했다).

채씨는 준비한 1.5ℓ페트병 3개를 꺼내들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액체는 시너. 시너를 접해본 사람은 특유의 강렬한 냄새를 안다. 그러나 강화도에서 두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이동하는 동안 이를 눈치 챈 승객은 거의 없었다. 채씨가 김장용 비닐로 시너 통을 감싸 냄새가 새 나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2층 누각에 올라간 채씨는 페트병 두 개는 개봉하지 않고 나란히 세워두고, 나머지 1병은 바닥에 천천히 부은 뒤 눕혔다. 기름은 맥박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졸졸 흘러나왔다. 채씨는 경기 가평의 한 노래방 상호와 전화번호가 적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불이 번지는 것을 확인한 채씨는 숭례문을 빠져나갔다. 10여 분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택시를 잡아탄 뒤 4호선 숙대입구역에 내려 사당역으로 간 뒤,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타 빙 돌아 신촌에 도착하여 버스를 탔다. 일부러 집 방향과 정반대 노선을 택한 것이다. 채씨는 경찰 조사에서 “불이 어떤 쪽으로 번지는지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2월 10일 PM 8:50

“한 남자가 숭례문 계단을 타고 올라간 뒤 불길이 치솟았다”
그러나 목격자가 있었다. 택시기사 이상권(45)씨는 서울역에서 숭례문 방면으로 향하는 갓길에 택시를 정차하고 있었다. 그는 한 남자가 숭례문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이윽고 불길이 인 뒤 남자가 빠져나와 남산 쪽 골목으로 접어드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택시를 몰아 범인을 추적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그는 경찰에 용의자의 인상 착의와 도주 방향을 신고했지만, 경찰은 추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화재초기만 하더라도 소방관과 관계자들, 지켜보는 시민들 모두 쉽게 불을 끌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화재초기만 하더라도 소방관과 관계자들, 지켜보는 시민들 모두 쉽게 불을 끌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화재’가 발생한 후 긴급전화를 통한 시민 제보는 여럿 있었다. 중부소방서 상황실엔 “한 남자가 숭례문 계단을 타고 올라간 직후부터 누각에 연기와 불길이 치솟았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채씨가 방화한 직후 시민 제보를 받은 교통경찰이 지령실에 통보하여 경찰도 현장에 출동했다. 57분까지 숭례문에 집결한 소방관은 99명. 서울시 소방방재본부 측은 “이때부터 문화재청 쪽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30분 후에야 연락됐다”고 주장했다.

▶2월 10일 PM 9:10

2층 누각 1차 진화, 천장에 옮겨붙은 불씨
소방대원 10여 명이 숭례문 2층에 올라갔다. 천장에서는 계속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원들은 불붙은 나무막대기를 발견했고 이를 황급히 진화했다. 폭발력이 강한 신나는 이미 증발한 상태였다. 일부 언론사 카메라 기자들도 현장에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몰랐다. 천장은 점점 연기와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꼬챙이를 들고 불이 붙은 나무를 부수려고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2월 10일 PM 9:20

화염에 휩싸인 숭례문, 관계자들 발만 동동
연휴를 맞아 서울 집에 머무르던 김성도 문화재청 건축문화재과 사무관은 ‘YTN 보도’를 보고 바로 달려왔다. 보고를 받은 김상구 건축문화재과장이 먼저 출발했고, 최이태 안전과장과 차장, 국장 등은 자료를 챙기고 차로 서울로 달려갔다. 유홍준 청장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 사무관은 소방관들과 함께 2층 누각에 올라갔다. 그는 “불을 끄는 주체는 소방청이기 때문에 나는 전문가로서 적심에서 불이 났으면 기와 해체 등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주장했다. 중구청 관계자들도 현장에 도착했지만,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9시 22분, 화재비상 2호가 발령됐다. 중구소방서뿐 아니라 인근 종로소방서 등 소방 인력이 대폭 보강됐다. 귀성길의 시민들도 불타오르는 숭례문을 지켜보며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서울소방방재본부가 중구소방서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2월 10일 PM 9:30~10:30

“저거 추녀 까야 해!”
윤흥로 문화재위원이 현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은 것은 9시 30분 무렵. 숭례문의 구조가 어떻게 되냐는 자문 요청 전화였다. 그는 2층에 서까래와 적심이 있다는 설명을 한 뒤 급히 집을 나섰다. 현장으로 달려와 화재상황을 쭉 지켜보던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할말이 없다”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숭례문이 소실된 뒤였다. 윤 위원은 “이런 일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불이 더 커진 건 나도 이해가 안 된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2003년 문화재청을 퇴직한 그는 한국문화유산 고건축 현장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서대문구 홍제동에 사는 김동현 문화재청 건축문화분과위원(전 동국대 교수)도 차마 이렇게까지 사태가 진전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TV 뉴스 속보를 보고 택시를 타고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 무렵. “서까래 사이에서 불꽃이 보였습니다. 저는 서울역 쪽에서 봤는데, 물을 집중적으로 부어도 물이 닿을 때는 불길이 나지 않다가 물길을 다른 데로 돌리면 거기서 또 불이 나오는 거예요. 그제야 아! 적심에 불이 붙었다는 생각이….”

새벽 1시, 무너져내리는 숭례문. 마치 폭격을 당한 듯하다.

새벽 1시, 무너져내리는 숭례문. 마치 폭격을 당한 듯하다.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게 그냥 간단한 불이 아닌 것 같았어요.” 독립운동가 고(故) 조문기 선생의 장례식장에 가 있던 황평우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은 TV 뉴스 끝자락에서 화재 소식을 처음 접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간 그는 카메라 등을 챙겨 차를 몰고 현장에 갔다. 멀찌감치 신한은행 뒷골목에 차를 주차하고 현장에 가 보니 숭례문 2층 안쪽 누각에 불길이 도는 것이 보였다. “연기가 계속 펄펄 나는데 저거 분명 문제가 터진다, 라고 생각하던 순간 적심에 불이 붙어 뿜어져나오는 거예요. 이미 늦은 거죠. 저거 빨리 기왓장을 들어내야 하는데….” 황 위원장의 눈에 문화재청 김상구 과장이 들어왔다. 그는 “김 과장, 저거 추녀 까야 해!”라고 소리쳤다. “김 과장도 내가 하는 소리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죠. 그때가 10시 30분쯤 되었을 겁니다. 김 과장이 지휘 본부로 찾아가더라고요. 지휘 본부에 사람이 없어서 무전기 조작법을 몰랐지만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김 과장의 목도 타들어갔죠. ‘빨리 꺼! 추녀 깨!’ 하지만 이미 그때는 늦었습니다.”

▶2월 10일 PM 11:00~2월 11일 AM 1:30

“45년 전 직접 나무 깎아 올렸는데….”
뒤늦게 대전에서 올라와 현장에 도착한 최이태 문화재청 안전과장이 황평우 위원장을 발견했다. 그는 “황 선생, 진짜 잘못했어. 내 책임이야. 나 죽여도 좋아, 우리 좀 도와줘, 나 잘할 거야, 미안해 미안해…”라고 반실성한 사람처럼 말했다. 최 과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래도 문화재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데… 슬펐고…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나 속상하고 죽고 싶었다.”
그는 25년 문화재청 공무원 생활 중 여러 사건을 접해봤지만 자신이 40년 넘게 살아온 서울에서, 그것도 숭례문이 그렇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고 덧붙였다.

TV CF 등을 통해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대목장(大木匠) 기능 보유자인 전흥수(69·인터뷰 참조)·신응수(66)·최기영(63) 도편수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뛰어왔다. 모두 숭례문에 얽힌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최 도편수는 TV 속보를 보자마자 오후 11시 무렵 수유동 자택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20대조 할아버지 최유경은 조선시대 초, 판한성 부사를 지내면서 숭례문 축조를 지휘했다. 이날 화재가 선조의 피땀 어린 유산을 소실케 한 것이다. 경복궁 복원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신응수 대목장은 1961년부터 63년까지 숭례문 복원작업에 도편수 고(故) 조원재 선생의 제자로 직접 참여했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숭례문을 지켜보며 그는 “직접 나무 깎아서 올렸는데, 너무 살 떨리고 참담하다. 이층 누각은 무너질 것 같다. 무너질 경우 일층도 위험하다”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의 눈가는 모두 젖어 있었다.

1시 30분 무렵 숭례문은 커다란 굉음을 내며 붕괴했다. 서쪽 지붕이 먼저 무너졌다. 그 뒤 구멍이 뚫리면서 비로소 소방관들은 지붕 안쪽으로 소방 호스 물줄기를 맞힐 수 있었다. 지붕만 무너져내린 것이 아니다. 길게는 3시간에서 5시간 동안 애를 태우며 이 광경을 지켜봤던 문화재 전문가, 공무원, 소방관과 시민들의 가슴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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