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한국판 신보수’세상을 경계한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실용 내세워 토건국가·재벌사회·학벌사회·투기사회 조장 가능성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열린 금융감독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인수위원들과 금감위 간부들이 회의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열린 금융감독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인수위원들과 금감위 간부들이 회의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2007년 대선은 이명박 당선인의 ‘압승’으로 끝났다. 물론 투표율을 감안한 실제 지지율은 3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신보수주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단순히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보수세력의 분화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신보수’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신보수’란 무엇인가.

서구에서 신보수에 대한 논의는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에 의한 변화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진보개혁세력’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신보수주의가 문제의 핵심으로 여겨졌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즈 이전의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이며, 이것은 서구의 신보수주의가 서구의 경제적 우위를 계속 지키기 위해 펼친 노력의 역사적 결과물이다.

그런데 신보수의 형성은 사실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이다. 벨은 컬럼비아대에서 오랫동안 가르쳤고, 늙어서는 하버드대로 옮겼다. 서구의 문화적 전통에 해박하며 뛰어난 문필력을 지니고 있는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탈공업사회의 도래’를 주장한 사회학자로 잘 알려졌다. 벨에게서 잘 알 수 있듯이, 신보수주의는 탈이념에 바탕을 두고 자유와 시장을 강조하며, 과학기술과 이론지식의 역할을 강력히 주장한다.

‘한국판 구보수’ 문제도 해결 안돼

홍성태<상지대 교수·사회학>

홍성태<상지대 교수·사회학>

또한 역시 벨에게서 잘 알 수 있듯이, 신보수주의는 민주주의를 무시하지 않으며, 심지어 환경 문제조차 도외시하지 않는다. 예컨대 벨은 1989년에 발표한 한 글에서 “다가올 1990년대에 논의될 사회경제적 정책의 주요 쟁점은 개인의 생활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앞날까지 위협하게 될지도 모를 심각한 환경 문제일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나아가 “‘온실효과’가 심해지고 지구의 기후가 점점 더 따뜻해지는 이유는 이산화탄소와 공기 중에 퍼진 다른 가스들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신보수를 얘기할 때 우리는 ‘한국판 신보수’에 주의해야 한다. ‘한국판 신보수’는 다니엘 벨로 대표되는 미국 또는 서구의 신보수와 과연 같은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한국판 신보수’에는 심지어 ‘자유기업원’처럼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판 신보수’는 무엇보다 ‘한국판 구보수’와 비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판 신보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판 구보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판 구보수’는 과연 어떤 세력인가?

‘한국판 구보수’는 반공을 내세워서 폭력과 부패로 사익을 추구했던 반민주세력이다. 잘 알다시피 그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무려 44년 동안 정권을 장악해서 ‘민주공화국’의 형성을 가로막았다.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을 우리의 현실로 만들기까지 4·19혁명, 5·18항쟁, 6월항쟁 등 민주화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해야 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을 계기로 비로소 민주화의 길이 열렸으나 여전히 한국의 민주화는 취약한 상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사가 잘 보여주듯이 반민주적 ‘한국판 구보수’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판 신보수’가 나타났다. ‘한국판 신보수’는 ‘한국판 구보수’와 많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한국판 구보수’는 ‘한국판 신보수’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폭력이 아니라 지식과 선전에 크게 의지한다는 점에서 일단 ‘한국판 신보수’는 ‘한국판 구보수’와 많이 다르다. 또한 ‘한국판 신보수’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서구의 신보수와 같은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가?

서구의 신보수는 무엇보다 탈이념을 주장한다. 19세기의 유물인 역사철학을 거부하고 실제적인 과학기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서구의 신보수는 적어도 민주주의를 인정한 위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공존을 주장한다. 이에 비해 ‘한국판 신보수’는 ‘친북좌파’ ‘좌파적출’과 같은 반민주적 망언을 서슴지 않고, 4·19혁명을 ‘4·19의거’로 격하하는 대신 ‘5·16정변’을 ‘5·16혁명’으로 격상하며, 나아가 ‘식민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식민지배를 공공연히 찬양한다. ‘한국판 신보수’는 낡은 이념세력의 면모를 보인다.

‘한국판 신보수’가 서구의 신보수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것은 시장을 절대적으로 추켜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많다. ‘한국판 신보수’는 가장 반시장적인 박정희 체계나 재벌체제를 극구 찬양하고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판 신보수’는 시장의 당연한 요청을 거슬러서 병적으로 비대한 토건업을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대규모 토건사업을 끊임없이 벌이고 재정의 탕진과 국토의 파괴라는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려 한다. ‘한국판 신보수’는 시장을 외치는 반시장세력의 성격을 갖는다.

이명박 당선인이 잘 보여주듯이, ‘한국판 신보수’는 실용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용제일주의는 성장제일주의와 마찬가지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5공화국에 적극 참여했던 인사를 인수위원장으로 선정한 데서 드러난 반역사성은 좋은 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바로 ‘경부대운하’이다. 이것은 경운기보다 느리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모든 국민의 식수원을 위협할 막대한 위험을 안고 있다. 이처럼 위험천만한 반실용적 계획을 강행하면서 실용을 외치는 것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부대운하, 경운기보다 느리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배세력은 여전히 보수세력이다. 재벌이 지배하는 경제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계도 사실상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판 신보수’가 정권을 잡았으니 그야말로 ‘보수 지배의 공고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바야흐로 보수세력은 방송계와 문화계도 장악하고자 한다. 보수세력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논의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대통령제에서 권력의 교체에 따른 세상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치의 논리로 방송계와 문화계의 변화를 강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미 곳곳에서 커다란 마찰음이 들리고 있다. 이 상태로는 머지 않아 어디서나 거친 충돌이 일어나고 말 것 같다.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판 신보수’가 실용을 내세워서 토건국가, 재벌사회, 투기사회, 학벌사회, 무한경쟁, 승자독식 등의 고질적 문제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리는 ‘진정한 선진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생태복지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선진화’니 ‘일류화’를 외치면서 ‘한국판 신보수’는 이 나라를 ‘진정한 선진화’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세상으로 만들지 않을까 우려된다.

홍성태〈상지대 교수·사회학〉

관련기사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