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기왕의 ‘장자’ 판본은 다 불사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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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46)기왕의 ‘장자’ 판본은 다 불사르라!

어느 출판사 사장이 ‘장자’를 읽고 싶은데, 번역본이 많으니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추천해달라고 해서 잠시 난감함에 빠진 적이 있다. 내가 읽은 것만 해도 스무 종은 족히 넘을 텐데, 그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난감했던 탓이다. 시중에 나도는 ‘장자’ 번역 판본이 50여 종은 넘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동양 고전 중에서 노자의 ‘도덕경’과 더불어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기 때문에 판본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장자와 노자를 한데 묶어 ‘노장’으로 일컫는 것은 그 바탕에 ‘도’라는 개념이 있고, 여기서 무위자연사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장자는 초(楚)나라 위왕(기원전 339~329) 시대의 사람이다. 대략 기원전 355년쯤 태어나 기원전 275년쯤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장자가 지혜롭다는 소문을 듣고 위왕은 그를 재상에 앉히고 싶어했다. 장자는 차라리 진흙 속에 사는 물고기로 살지언정 나랏일에 매여 속박당하고 싶지 않다고 위왕의 제안을 거절한다. 장자는 칠원리(漆園吏)라는 말단 관직에 만족하며 초야에 은둔하며 가난을 낙으로 삼고 살았던 철학자다.

장자 | 기세춘·바이북스·2007

장자 | 기세춘·바이북스·2007

물고기가 새로 변해서 북쪽 바다에서 남쪽 연못으로 날아갔다는 우화를 담은 ‘장자’의 첫 장 ‘소요유(逍遙遊)’의 첫 대목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물고기 ‘곤’과 큰 새 ‘붕’의 이야기는 뭔가 보여주기 위해 장자가 지어낸 우화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에 대한 해석도 구구하다. 곤은 붕새에 대한 타자가 아니다. 곤이 변하여 붕새가 된 것이다. 이것이면서 저것인 세계가 곧 장자의 세계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화이위조(化而爲鳥)’의 ‘화(化)’가 있다. 이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타고 오르며 저것으로 ‘화(化)’한 것이다. 저것은 본디 이것에서 말미암고, 따라서 이것과 저것은 상호작용하며 공존한다. 곤과 붕새는 서로에 대해 타자이면서 동시에 동일자다. 이것은 저것의 작용으로 존재하니, 이 둘은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며 하나인 것이다. 곤이 변하여 붕이 된 새는 바람을 타고 구만리 상공을 난다. 붕의 날아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부자연스러움도 없다. 한 번 바람의 기운을 올라타서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붕새는 그 날갯짓에 거침이 없다. 바람은 생기와 활력의 표상이다. 구만리 상공을 유유자적 날아가는 붕새는 사소함의 굴레와 경계들을 단 한 번에 뛰어넘어 대자유를 누리는 자의 꿈을 표상한다.

지금까지 읽은 ‘장자’ 번역본 중에서는 오강남 풀이본(현암사)과 기세춘(바이북스)의 번역본이 가장 뛰어나다. 먼저 ‘장자’의 들머리를 우리말로 옮긴 두 판본을 비교해보자.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天池)’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강남 풀이본이다. “북해에 한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한 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天池)’다.” 이것은 기세춘 번역본이다. 둘은 의미 맥락이 쉽고 한글 문장이 매끄럽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두 번역본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오강남이 ‘장자’를 경어체 어미를 써서 정중한 느낌이 나고 주관적 감정에 호소하는 데 반해 기세춘은 간결하고 간소한 일반 서술체 어미를 써서 그 뜻이 주관화되는 것을 경계한다. 오강남은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이야기로 읽은 데 반해, 기세춘은 ‘반문명·반체제적인 우화와 풍자와 반어’로 읽는다. 오강남이 장자에게서 차별지와 분별지를 넘어서서 활력과 신명, 그리고 절대의 자유로 이끄는 목소리를 들었다면, 기세춘은 격변하는 세태 속에서 세태의 변화무쌍함에 휘둘리지 않고 거리를 둔 채 그것들을 희롱하고 우스갯거리로 휘두르며 자유롭게 사는 자의 처세론을 담은 목소리를 듣는다. ‘장자’는 두 판본 중에서 어느 것을 읽어도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장자’는 내·외·잡편으로 나뉘어 있다. 일반적으로 ‘내편(內篇)’은 장주라고 알려진 한 필자의 저작물로, 그밖에 ‘외편(外篇)’과 ‘잡편(雜篇)’은 장주의 후학들이 덧붙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장자에 따르면 하늘과 땅은 형체 가운데 가장 큰 것이며, 온전하고 무궁한 것이다. 이 하늘과 땅을 있게 한 근거이며, 이것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는 바로 도다. 도는 천지가 있기 이전 예부터 이미 존재했고, 천지를 생겨나게 만들었다.

[독서일기](46)기왕의 ‘장자’ 판본은 다 불사르라!

그런 까닭에 도는 천지만물의 본체이므로 그 속성 역시 천변만변하는 성질을 가졌다. 도를 한 마디로 딱히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노자는 ‘도덕경’ 들머리에서 “말로 말할 수 있는 도는 이미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했거니와, 장자 역시 “도는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이니, 들을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니, 불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형체 있는 것들로 하여금 형체가 있도록 하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임을 알겠는가? 도는 이름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장자’, 知北遊). 장자에 따르면 도는 무(無)이고 유무(有無)다. 만물과 그것들이 작용해서 생겨나는 현상은 유고, 이 일체의 유는 무에서 나온다. 만물이 생겨나기 전 태초에는 무밖에 없었다. 이 무는 무무(無無)이며 무무무(無無無)이고 항상적인 무(無)다. 바로 그런 까닭에 장자는 도는 무위하며 무형하다고 했다(無爲無形, ‘장자’, 大宗師).

나는 결론적으로 출판사 사장에게 기세춘의 번역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기세춘에 따르면 장자는 자연주의자요 무정부주의자로 평생을 산 사람이다. 한 나라의 권세와 부귀영화, 문명과 체제, 심지어는 삶과 죽음마저도 초개나 뜬구름같이 여겼다.

그래서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자가 마음을 둔 것은 억압 없는 자연에서의 삶이요, 내 것과 네 것을 나누는 사적 소유에 경계가 없는 원시의 삶이었다. 장자는 천지만물과 사람의 근본이라고 할 도의 본질과 그 이치에 대한 숙고에 평생을 바친 철학자다. 우리가 읽는 ‘장자’는 숙고의 총체를 담은 책이다. 시로 우리 삶을 두루 비춰보고 성찰하게 만드는 동양의 지혜를 모은 고전이다. 그동안 김동성, 김학주, 김달진, 안동림 등이 번역한 글이 많이 읽혔다. 그러나 판본과 판본 사이의 ‘차이’가 커서 독자들은 혼란스럽고 곤혹스러웠다. 어느 대목에서는 그 뜻을 정반대로 해석한 것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그만큼 왜곡과 오역으로 덧칠된 판본이 많이 나돈다는 얘기니, 독자들은 그들 속에서 헤매기 쉽다. 칠순 노인은 “기왕의 ‘장자’ 판본은 다 불사르라!”고 일갈한다. 과연 기세춘의 ‘장자’가 그 기개와 당돌함에 걸맞은 번역인지는 독자 제위께서 직접 읽고 판단해보시라.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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