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 탈취범 잡은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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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휴게소에 설치된 우체통.

고속도로 휴게소에 설치된 우체통.

출근길 도로변에 빨간 우체통 하나가 눈에 띈다. “우체통이 사라지는 추세라던데 우리 동네에는 거꾸로 새로 생겼나?”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아니다. 우체통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늘 그 옆을 지나다녔지만 이용하지 않으니 통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새삼스럽게 우체통이 보이는 것은 순전히 뉴스 때문이다.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한 총기 탈취범을 잡는 데 우체통이 수훈갑의 공을 세웠다는 것 아닌가. 우체통의 존재가 엉뚱한 일로 고맙게 느껴진다.

사실 우체통에서 발견된 편지가 아니었다면 총기 탈취범의 행방은 지금도 오리무중이었을 것이다. 군경이 검문검색을 아무리 요란하게 해도 소용없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범인을 잡은 것은 우체통 속 편지에 묻어 있는 지문이었다.

문제의 편지는 법적으로 보면 우편물이라 할 수 없다. 우편법에 정해진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편지 겉봉에 우표도 없고,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도 없으며 봉함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물건은 우체국이 배달할 의무가 없다.
문제는 ‘경찰서 보내주세요. 총기 탈치범입니다’라고 겉봉에 쓰인 문구였다. ‘탈취범’이라고 해야 할 글자를 잘못 쓴 것으로 미루어보면 아이들 장난으로 여겨질 소지가 다분하다. 아닌 게 아니라 우체통에 편지 아닌 다른 물품을 집어넣는 사람이 좀 많은가. 지갑과 같은 유실물은 이틀이 멀다하고 발견되는 우체통의 단골손님이다. 그 외에도 쓰다 만 휴지조각에 쓰레기 뭉치, 심지어 먹다버린 자장면 찌꺼기까지 우체통에서는 온갖 ‘잡화물’이 나온다. 언젠가는 한 행인이 불씨가 살아 있는 담뱃불을 던져넣는 바람에 우체통 안에서 불이 난 적도 있다. 그러니 자칭 ‘총기 탈치범’이라고 해도 “에이 설마” 하고 넘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부산 연제구 연제7동 우편취급소 직원 양지성씨(26·남)는 혹시나 하는 경계심에 봉투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총기를 어디에 버렸다는 등의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우정사업본부가 양씨에 대해 정부 포상을 상신했다.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우체통은 왜 빨간 색일까’를 조사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그러자 인터넷에 이런저런 질문과 대답이 줄을 이었다.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넉넉하고 따뜻함을 나타낸다” 등등. 우정사업본부에 문의해보니 콕 집어서 설명할 만한 배경은 없다. ‘색깔의 수수께끼’(서프라이즈 정보)에 따르면 빨간색은 신속함이나 긴급 상황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빨간색 우체통은 눈에 잘 띈다는 장점과 함께 편지를 신속하게 전달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빨간 우체통이 최고 인기다. 영국, 캐나다, 일본 등 25개국이 빨간색을, 독일, 프랑스, 브라질 등 17개국이 노란색, 미국, 러시아 등 7개국이 파란색 우체통을 쓴다. 이밖에 중국은 녹색, 인도네시아는 오렌지색이다. 일부 나라에선 긴급우편과 일반우편, 국영우체국과 민간우체국의 우체통 색깔을 달리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1956년까지 빨간색을 쓰다 1957~1984년까지는 윗부분은 빨간색, 아랫 부분은 초록색이었고 이후 지금의 우체통을 사용해오고 있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우체통은 우리 곁에서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우정사업본부 통계에 따르면 우체통은 1993년대 5만7600여 개에서 2002년 3만7800여 개, 2005년 3만여 개, 지난해에는 2만7300여 개로 줄었다. 모든 우체통은 반드시 하루 한 번 직원이 개함(開函)하게 돼 있지만 한 통의 편지도 안 들어 있는 날이 부지기수다. 자연히 줄여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보듯 우체통은 개인과 개인, 우리와 남,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마지막 창구다. 우체통만큼 은밀한 곳에서 광장으로 나갈 수 있는 비밀통로는 어디에도 없다.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은밀하게 세상을 향해 자기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언로(言路), 그게 우체통이다.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jt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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