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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10년 서울 지하철역의 노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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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새벽바람이 제일 무서워요”

10년 전 한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았다. 그리고 당시 길거리 노숙자는 한국인의 뇌리에 IMF 외환위기의 상처를 담은 풍경으로 남아 있다.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뉴스메이커는 IMF 외환위기 10주년을 맞아 당시 노숙자의 집결지였던 서울역과 시청을 3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편집자 주>

# 첫째 날.

지하철 역의 노숙자. 술은 그들 삶의 유일한 위안이다.

지하철 역의 노숙자. 술은 그들 삶의 유일한 위안이다.

“지금 이 시각, 서울 시내의 휴대전화 망이 불통되었다고 합니다.”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는 살짝 들떠 있었다. 진눈깨비는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했다. 눈이 보도에 쌓이기 시작했다.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라디오를 통해 버스에 울려퍼지는 흥겨운 노래. “창밖을 봐/눈이 와/그렇게 기다리던/하얀 눈이 와….” 버스에 올라타는 연인들은 눈으로 머리와 어깨가 젖었지만 싫지 않다는 표정이다. 첫눈이 단연 화제다. 자리에 앉은 젊은이들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해 첫눈 소식을 공유하느라 연신 손가락을 놀리고 있다.

보호센터를 마다하는 노숙자들

밤 10시 30분 서울역 지하. 늦은 밤이지만 유리창 너머 레스토랑 안은 여전히 많은 손님으로 북적대고 있다. 그리고 구석. 뭔가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거리는 사람들. 노숙자들이다. 젊은 남녀 커플이 웃으며 그들을 지나친다. 아무도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아니, 의도적으로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다.
연 평균보다 사흘 빠른 첫눈이라고 하지만, 겨울은 이미 그들 한가운데 와 있었다. 세 겹으로 껴입은 점퍼. 한 할머니는 머플러로 머리를 휘감고 그 위에 또 구멍 난 털모자를 눌러쓰고 있다. 먼지와 때가 눌러앉은 등산용 배낭. 그 안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서울역 대합실에 한 노숙자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서울역 대합실에 한 노숙자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서울시 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거리 노숙인은 600여 명. 쉼터와 상담보호시설에 입소한 노숙인은 2400여 명이다. 서울시가 운영 중인 노숙자 시설은 7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상담보호센터 5곳과 2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쉼터 45곳이 있다. 보호센터와 쉼터를 합하면 3300여 명쯤을 수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노숙자 600여 명이 거리에 머무는 까닭은 무엇일까. *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한 노숙자에게 다가섰다. “식사는 하셨어요.” “…….” 해장국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고 싶었다. “…….” 기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는 싫다는 뜻으로 손만 휘저을 뿐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수은주는 영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날 여의도 한 공원에서 노숙하던 진모씨(41)와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신원 미상의 남자가 세상을 떠났다. 경찰은 “추운 날씨 탓에 얼어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올해 첫 동사자(凍死者)다. 신문 한 귀퉁이를 장식한 뒤, 세상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 둘째 날.
“휴대전화로 119에 어떻게 신고하는지 아는 사람 있어요?”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지하보도. 목에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적힌 카드를 건 젊은 여성이 주위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잠깐 걸음을 멈춰 돌아보는 이도 있었다.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한눈에 상황 파악이 된 것이다.

반백의 할아버지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있었다. 사정을 물어보는 기자에게만 그는 귀에 대고 “항문에서 피가 나왔다”고 울먹인다. 구호단체 관계자에게 각혈하는 모습을 보인 뒤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해진다. 10여 분 만에 119대원들이 도착했다. “결핵이 전염성인 거 몰라요?” 한 119대원이 자원봉사단체 관계자와 주변에 몰려든 사람을 힐난한다. 119대원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긴급구호용 간이 들것을 들고 왔지만, 이 노숙자 할아버지는 누울 수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 받아줄 병원은 없어요. 아저씨가 신원보증할 거예요? 이 할아버지 치료비, 간병비를 다 책임지시겠다면 병원 응급실에 데려갈 수는 있어요.” 당장 조치가 필요한 긴급상황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119대원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구호단체 관계자를 향해 “그게 그렇다. 아침이 되면 다시 119를 불러라. 그러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다른 요원이 노숙자를 향해 훈계를 한다.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인 것도 같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싫어서 쉼터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야. 데려다주면 다시 나오고, 또 나오고…. 왜 나오는 줄 알아요? 술 마시려고 그런 겁니다.” 조금 정신차린 노숙자 할아버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맞다!”고 말한다. 이 날도 수은계는 영하를 가리켰다. 구세군 브릿지센터 사람들이 왔다. 119대원들은 할아버지에게 마스크를 씌운 뒤 돌아갔다. 손쓸 방법이 없다. 이대로 오늘밤을 무사히 나기를 바랄 수밖에.

“술 마시려고 쉼터서 나옵니다”

노숙자들이 지하보도에 만든 박스집들. 2~3년 전부터 등장한 신산한 풍경이다.

노숙자들이 지하보도에 만든 박스집들. 2~3년 전부터 등장한 신산한 풍경이다.

구호단체 관계자들이 돌아간 뒤, 그는 기자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구호단체사람들에게 고마움도 느끼지만, 그래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사람들이 하는 거, 다 머릿수 채워 정부 돈 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줄줄이 나오는 할아버지의 기구한 일생. 그는 자신이 고아라고 말했다. 노숙한 지는 4개월. 그전 직업은? 광화문 국제극장, 스카라, 국도극장에서 영사기사일을 했다. 극장들이 차례로 문 닫고 ‘노가다’를 하다 ‘오야지’에게 돈을 뜯겼다. 조선·동아 등 일간지 기자들에게 호소했지만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쉼터도 여러 곳 전전했다. 새벽 5시만 되면 지하철을 타고 떠난다. 한 끼 식사를 해결할 곳을 찾아 인천, 청량리, 대학로를 전전한 뒤 다시 밤이면 이곳으로 돌아온다. 밤 11시. 한 남자가 대화를 방해하고 나선다. 술에 취했다. “지금 몇 시냐”고 물어보던 이 남자와 할아버지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남자가 할아버지의 안면을 발로 걷어찼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뜯어말렸지만 두 사람은 이미 한 대씩 주고받은 다음이었다. 태평로 지구대 경찰이 출동. 새벽 1시. 노숙자 할아버지에게는 조사받으러 간 경찰서가 잠시나마 추위를 녹일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순찰차를 탄 할아버지에게 “내일은 꼭 병원에 가시라”고 말했다. 이날 새벽에도 함박눈이 왔다. 경찰은 “새벽 3시 정도에 내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 셋째 날.
할아버지는 결국 병원에 갔을까. 이날 낮 기온은 영상 8도. 많이 풀렸다.
전날 할아버지가 있던 시청 지하철역. 오후 9시밖에 안 되었는데도 벌써 박스집을 짓고 드러누운 사람들. 할아버지가 고통을 호소하던 자리엔 다른 노숙자가 박스로 집을 지어놓았다. 플라스틱 끈으로 얼기설기 이어져 있다. ‘E-마트’ 로고가 눈에 띈다.

얼기설기 박스집 짓고 드러누워

노숙자 이씨는 박스는 할인마트에서 가져온다고 말한다. “아침이 되면 누가 다 가져가요. 그래서 그때마다 새로 가져와서 만들어요.” 이씨는 “겨울을 나는 게 제일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박스 틈을 가리키며 “새벽이면 이곳으로 바람이 쌩쌩 들어온다”고 말했다.

바로 옆의 아저씨. 군화를 녹여 만든 듯한 특이한 신발을 신고 있다. 그는 박스집을 만들지 않고 신문을 뭉쳐 켜켜이 쌓아 ‘신문침대’의 양날을 세우고 있다. 전날도 봤던 공정(工程)이다. 역시 바람을 피하기 위한 것이리라. 새벽바람이 무섭다는 이씨는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오는데, 특히 새벽 3시가 넘어가면 정말 춥다”고 덧붙인다. 옆자리의 ‘신문침대’ 아저씨에게는 그나마 침낭이 있다. 이씨는 “이전에는 구호단체에서 침낭도 나눠줬는데, 난 못 받았어요”라고 설명한다. 이씨가 취침 준비를 하며 가방을 연다. 남루한 옷가지들 틈으로 성경책이 눈에 띈다. “신자는 아니고 낮에 밥이라도…”라며 이씨는 말을 흐린다. 고향이 청양이라는 이씨의 사연. 아버지와 싸워 집으로는 못 들어간다. 지난 여름엔 용산역 구름다리 사이에서 노숙을 했다. “여름엔 바람도 잘 들고 시원해서 좋지. 하지만 겨울엔 추워서….” 이씨가 시청으로 옮긴 이유는 그래서다. 옮긴 지는 2주일이 안 됐다.

박스집을 만드는 데는 보통 1시간이 걸린다. 숙련도에 따라 다르다. “마트 가면 테이프 있잖아요. 그거 가져다가 틈새를 이으면 그래도 덜 추운데 귀찮아서….” 이불이 있었는데 도둑맞았다고 한다. 치열한 생존경쟁이다. 그때 옆자리의 박스집 뚜껑이 열렸다. 주름진 손가락이 나왔다. 잠시 꼼지락거리더니 다시 뚜껑을 닫는다. 제일 힘들 때는? 이씨가 말을 잇는다. “밤 12시 전후에 술 취한 사람들이 시비걸 때예요. 박스집 안에 들어가 있는데 발로 툭툭 치면서 시비해요. 얼마 전 불꽃놀이 축제를 할 때는 애들이 와서 뻥 차고 도망갔어요.”

지금 제일 필요한 건 침낭. 도시락이라도 사다드릴까 물었다. 이씨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다른 건 말고 담배 한 갑 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씨에겐 담배 두 갑을, 다른 이들에게는 호빵을 사서 나눠줬다. 잠시나마 냉기를 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날 새벽, 수은주는 다시 영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전국의 노숙자 4700여 명 추산
“게으르다, 지저분하다, 무위도식한다는 게 일반인들이 노숙자들에게 갖는 불신인 것 같아요.” 구세군 브릿지센터의 이호영 국장이 한 말이다. 구세군 브릿지센터는 노숙자 지원 및 구호를 전문으로 하는 단체 중 하나. 그에 따르면 노숙자 문제는 개인으로 돌릴 문제가 아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사회가 내뱉은 ‘낙오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국 노숙자 규모는 4700여 명으로 추산된다. 1만 명당 17명이 노숙자인 미국보다 적다. 지원단체 관계자들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들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정부도 노숙자들을 무조건 시설에 수용하기보다는 쪽방이라도 자기 집을 갖게 하는 방향으로 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단 주거를 정하고 지역의 사회복지사가 맡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지역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행동하는 양심’ 매주 화요일 자원봉사
‘행동하는양심’은 2002년 무렵, 포털사이트 다음카페에서 시작한 비영리자원봉사단체다. 장애우팀, 보육원팀, 양로원팀, 홈리스팀 등으로 영역을 나눠 다시 1팀, 2팀, 3팀 식으로 자원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주로 대학생, 직장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날 시청에 나온 팀은 홈리스 3팀. 이 단체 관계자는 “홈리스 3팀의 경우 매주 화요일 저녁에 모여 시청 일대의 노숙자를 상대로 말벗이 되거나 음료수나 간식거리, 옷가지 등을 모아 찾아뵌다”고 말했다.
http://www.actionslove.or.kr, ☎ 02-2637-1443

***서울시 “노숙인도 무료진료 가능”
119대원들의 설명은 맞는 것일까. 서울시 복지건강국 자활지원과의 김미란씨는 “노숙자도 병원에 가면 행려환자로 등록해서 받아준다”고 말한다. 서울시의 말에 따르면, 이 경우 서울역 무료진료소를 통해 ‘진료의뢰서’를 발급받아 가면 된다. 김씨는 “응급상황일 경우 진료의뢰서는 나중에 발급받아도 된다”고 말했다. 은평시립서북병원 관계자는 “응급실을 운영하고 있진 않지만 결핵 관련 응급환자는 야간진료도 실시하고 있다”며 “당시 출동한 119구급대원 분들이 잘 몰랐던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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