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진압이 휩쓴 양곤은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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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민주화시위 그 후 현지 르포, 승려들 눈에 띄지 않고 바깥 출입도 삼가

버마사회에서 승려들은 ‘언터처블한’ 성직자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원에 보내져 생활하는 ‘누비스’ 승려가 적잖다. 양곤 시내 한 사원에서 누비스 승려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버마사회에서 승려들은 ‘언터처블한’ 성직자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원에 보내져 생활하는 ‘누비스’ 승려가 적잖다. 양곤 시내 한 사원에서 누비스 승려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군인들도, 승려들도 그리고 잠시 몰려들었을 외신기자들도 거의 다 빠져버린 버마 양곤 시내, 그러니까 ‘그림’이 별로 없는 그 공간으로 몸을 들여놓는 건 솔직히 말하면 뒷북치는 듯한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그렇다고 망설인 건 아니다. 유혈 진압에 시위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일 거라는 건 익히 예상되는 바였고, 문제는 그게 ‘잠시’가 될지 아니면 ‘영원히’가 될지, 안간힘으로 폭발했던 그 ‘항쟁급’ 시위의 재발 가능성을 들춰보는 건 버마 정세를 조망해보는 중대한 잣대가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제법 깔끔한 양곤 국제공항은 과거와 달리 음산한 기운은 덜했다. 하지만 버마 에어라인 비행기 4대와 아랍어로 적힌, 그러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비행기 한 대만 놓여 있던 활주로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2004년 10월께 나는 이 공항에서 아주 이상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짐작이 맞다면 국가대표급 선수들로 보이는 무리가 어딘가로 시합을 떠나는 길인 것 같았고 그 무리가 50대쯤 된 듯한 한 중년 남성을 둘러싸고 깨끗하지 않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집단으로 절을 여러 차례 올리는 장면이었다. 그 남성은 일장 연설을 하며 기나긴 훈화를 이어갔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장관쯤’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독재 국가 버마의 한 상징처럼 머릿속에 새기며 나는 그 땅을 떠났다. 피를 본 후에야 다시 찾은 양곤. 그곳에는 여전히 ‘개미허리’ 롱지(남성치마) 차림의 남정네들이 거리를 활보했고 출근길 혹은 등교길 시간대 치고는 시내를 달리는 차량이 너무 적어 보였다.

출근시간에도 시내에 차량 적어

나는 승려들을 찾아나섰다. 돌을 던지며 ‘폭력적으로’ 저항하던 알자지라 화면 속 그 승려를 만나는 일이야 어렵겠지만, 아무튼 반독재 저항 기력이 푹 꺼져 있던 버마를 그리고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그이들을 찾아나섰다. 쉐다곤 파야, 술래 파야 등 규모가 큰 사원에는 눈에 띄게 승려들이 사라졌고, 작은 사원의 승려들은 바깥 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이전엔 큰 사원을 둘러볼라치면 제법 유창한 영어로 말을 시키던 승려들이 꼭 있었다. 아니면 최소한 “헬로”라도 던지며 호기심을 보여주던 누비스(Novice, 10~20대 사이의 어린 승려들)가 적잖았고, 승려들의 도시 만달레이에서는 아주 철학적 주제를 들고 유창한 영어로 덤비던 승려도 있었다.

이 나라에서 사원은 중요한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학교 갈 형편이 안 돼 사원에서 국어(버마어)와 영어 교육을 받았다는 이들을 나는 적잖이 만났다. 그리고 또 사원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이들에게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피난처 역할도 한다. 그 사원에서 6년을 신세졌다는 민 쵸(33)는 고향 모니와를 떠나 양곤에서 공부한 후 1년 전 결혼하여 잠잘 곳이 생길 때까지 사원 신세를 졌다. 2003년 5월 30일 발생한 데파윈 학살(아웅산 수치 여사를 가택 연금하는 시발점이 됨) 직후 검거령을 피해 도망다니던 민족민주동맹 당원 아웅조우(가명·24)도 이 사원에서 저 사원으로 옮겨다니며 5개월간 수배생활을 버텨냈다고 했다. 그리고 또 타이-버마 국경지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버마학생민주전선에는 승려 출신 전사들이 간헐적으로 머릿수를 채우며 자리를 빛내고 있으니. 버마에서 승려들이란 ‘배운 사람들’이고 ‘의식화’되었으며 그래서 그중 다수는 ‘행동할 줄 아는’ 집단이었다. 그리고 사원은 먹을 것 없고 발 뻗을 곳 없는 이들을 거두는 인도주의적 구호 노릇도 하고 있다.

사원 큰 스님은 시위참가 사실 몰라

“사진이 찍혔을지 몰라 그날 이후 바깥을 나서지 않는다.”

양곤 시내 ‘T’ 타운십 ‘ㅂ’ 사원에 들어섰다. ‘사진이 찍혔을지 모를’ 승려 마하파탄 사이아도(38)가 누비스 승려들을 데리고 수업 중이다. “불교는 평화적 종교이고 폭력을 거부하며…” 마하파탄의 제자 누비스 스님 감미라(12)는 자기 스승이 시위에서 돌팔매질을 했던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어린 나이부터 지낸 이곳 생활이 만족스러운가” 등을 묻는 질문에 영특한 미소를 지으며 좋은 말들을 듬뿍 쏟아냈다.

마하파탄 승려에 따르면 사태의 시발점이 된 포코쿠의 승려 폭행 사건 이후 그쪽 승려들이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전국 사원에 이 사실을 알리며 분위기를 띄웠다. 이 사원에서는 그와 또 다른 동료 두 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사원의 큰 스님은 그 사실을 모른다. “큰 스님에게 정치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 우리가 시위에 참여한 사실조차 모르고 계신다.” 바깥 공양을 나서지 못하는 탓에 사원 안에서 밥을 해먹기 시작했다며 웃는 그는 큰 스님 앞 입단속을 당부했다.

바한 타운십(Bahan Town ship) 웨스트 쉐공다잉로드에 위치한 민족민주동맹(NLD) 본부도 마찬가지다(747호 기사 참조). 변한 건 별로 없었다. 사무실 안은 여전히 당원들로 가득했고, 격주로 열리는 ‘어린이 건강 프로그램’에 참여한 엄마와 아기들이 또 한가득이었다. 이들은 당원이 아니다.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영양식을 공급하고 또 건강강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민주동맹 여성부 중앙위원 에에마르(46)는 이 프로그램이 여성부의 주요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잔인한 군부독재에 대항마 1번 타자로 국제 뉴스를 타는 민주동맹이 실은 얼마나 부드럽고 온건한 활동을 펴는 당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데 달리 보면 제1 야당이 빈곤 가정의 아이들을 돌보아야 할 만큼 버마의 민생은 극심한 바닥을 헤매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었다. 45년 군부 독재가 말아먹은 경제와 교육문제를 그 군부 독재가 있는 힘껏 탄압하는 야당, 최근 새롭게 떠오른 탄압 대상 승려들 그리고 사원이 떠안고 있는 셈이다.

* 칼라 조는 교포 출신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입니다. 신변안전을 위해 가명을 사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양곤(버마)/ 칼라 조〈프리랜서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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