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문화와 역사의 500㎞… 한강은 지금도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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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작가 이지누가 본 한강의 문화

[서울 이야기]문화와 역사의 500㎞… 한강은 지금도 진화한다

2006년 7월 15일부터 올해 7월 9일까지 한강을 따라 걸었다. 한 방울, 하늘에서 떨어진 물이 모여 이루어진 샘을 시작으로 넓은 서해바다에 이르기까지 매주 한 차례씩 모두 47차례를 걷는 데 꼬박 1년이 걸린 셈이다.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와 서울을 거쳐 강화도 앞바다로 흘러나가는 물줄기는 그 길이가 500㎞에 이를 만큼 장대했으며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가령 댐 건설문제로 인구에 회자된 동강은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부터 영월군 영월읍 덕포까지를 일컫는 것으로 그 또한 남한강 줄기다. 또 원주 일대를 거쳐온 섬강과 만나는 흥원부터 여주의 신륵사 앞을 도도하게 흐르는 강줄기는 여강이라고 부르며, 양평에서 북한강과 만나는 양수리에 이르는 강은 양강 그리고 팔당댐을 지나 광나루부터 도성을 에둘러 빠져나가는 강은 한강이라고 불렀지만 경강(京江)이라고도 했다.

그들이 한 줄기이면서도 서로 그 이름을 달리 하듯이 긴 강줄기가 흘러내려오는 동안 지역에 따라 제각각의 문화를 남겨놓기도 했다. 강원도 일대에는 산간협곡의 울창한 수림들을 운반하는 뗏목이 있었으며 산골생활에 따른 척박한 살림살이의 애환을 노래한 정선아리랑이 강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런가 하면 충청도의 강줄기 곁에는 단양을 중심으로 산림처사들이 둔곡으로 삼아 은둔하는 경향이 짙었다.

[서울 이야기]문화와 역사의 500㎞… 한강은 지금도 진화한다

이는 불교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지금은 모두 절터로만 남은 충주의 청룡사, 원주의 거돈사, 법천사 그리고 흥법사와 같은 곳들은 남한강을 고속도로와 같은 교통로로 이용한 대표적인 경우다. 주로 고려시대에 창건된 이 절들은 개경부터 배를 타고 길어야 2박3일 혹은 1박2일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권력의 간섭에서 벗어나 수행에 몰두하려던 선승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성과의 관계도 긴밀해야 했으니 절집을 일군 곳들은 개경으로부터 멀고도 가까운 곳이었던 셈이다.

경기도에 접어든 한강은 여주와 양평을 중심으로 넓은 곡창지대를 형성하여 여주의 흔암리와 같은 곳은 구석기시대의 움집터가 발견되기도 했던 곳이다. 물론 당시의 쌀과 농기구가 함께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에는 당쟁에 휘말린 뭇 선비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으며 몰려들기도 했다. 강가에서 태어난 정약용은 진정한 자신의 꿈은 부가범택(浮家泛宅), 곧 물위에 띄워놓은 집에서 사는 것이라며 실제로 배 위에 집을 만들어 춘천까지 왕래했을 정도다. 그러나 흐르는 것은 경강으로 몰려들게 마련이다. 불은 타 올라가는 염상(炎上)이고 물은 흘러 내려가는 윤하(潤下)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강의 하구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경강은 나라 안의 모든 산물과 문화 그리고 학문과 사람이 모였다가 또 흩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한강은 선조의 혼이 깃든 ‘문화원류’

[서울 이야기]문화와 역사의 500㎞… 한강은 지금도 진화한다

그런 경강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것 같다. 서울시에서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준비했으니 말이다.

그 프로젝트대로 완성된 한강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을 것 같지만 기대보다 우려가 앞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라는 기치 아래 박정희 정권 당시부터 이루어진 국토개발이라는 것으로 누렸던 편리함과 폐해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온 세대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시에서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라는 긴 이름으로 발표한 내용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나 새마을운동 당시 배제되고 소멸되어버린 문화에 대한 항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문화란 유형과 무형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젝트에 겨우 포함된 것은 역사유적이라는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들에 대한 옹색한 배려가 있을 뿐이다. 경강은 도성에 인접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산수를 즐겼던 선조들 중 왕이나 사대부들에 의한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도 있었을 것이며 강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계승해온 민간신앙과 같은 전통문화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것은 홀대를 받으며 제외된 것 같다.

지금 동호대교가 놓인 강북지역은 두모포였다. 그리고 그 일대의 호수처럼 넓은 강은 동호(東湖), 절두산 성지가 들어서고 지하철 2호선 철교가 지나가는 일대는 서호(西湖)라 불렀다. 동호 일대에는 세종 당시부터 시행되었던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1517년에 지은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 있었으며 강을 건너면 압구정이나 삼성동 봉은사가 지척이었다. 더구나 강 한가운데에는 저자도(楮子島)라는 섬과 두모포 곁으로는 뚝섬(纛島)까지 있었으니 응봉산의 독서당에서 책을 읽던 선비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나들이 코스였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동호에 시회(詩會)를 위한 배를 띄웠으며 그때마다 마음 맞는 벗들과 함께 배 위에서 남긴 시가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두모포는 관직에 머물다가 고향으로 떠나는 선비들과의 전별연이 벌어지기 일쑤였으니 그 모습 또한 글과 그림으로 남아 있다. 갈대가 우거지고 새들이 머물던 저자도는 나라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용을 그린 깃발을 꽂아 신을 부르고, 거위의 목을 잘라 그 피를 신에게 올리고 나서 축문과 폐백을 모두 강 속에 던져넣는 것으로 마쳤는데 처음에는 종2품의 관원이 제를 지내다가 후에는 정2품의 관원이 제를 모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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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의 보고(寶庫)

[서울 이야기]문화와 역사의 500㎞… 한강은 지금도 진화한다

또한 봉은사의 스님들은 나라 안에서 시를 가장 좋아하는 스님들이었다. 시축(詩軸) 한 권 정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스님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만큼 봉은사에 선비들의 걸음이 잦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비들이 찾아와 유숙하기를 청하면 스님들은 시 한 수를 청하며 시축을 내밀었고 선비들은 의당 한 편의 시를 지어 시축에 적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서로 뜻이 통하면 벗이 되어 서로 시를 주고받았으니 봉은사는 법향(法香)뿐 아니라 문향이 그득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동호 일대는 독서당이 생긴 16세기 중반부터 추사가 봉은사에 머물던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서 독점적인 자리를 지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 싶다.

어디 그뿐인가. 동호가 독서당이나 지방으로 내려가는 선비들의 차지였다면 서호는 도성에서 더욱 가까워, 잠두봉(蠶頭峯)이라 불린 절두산 일대는 도성에 거주하던 선비들의 강상연희와 계회(契會)가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사숙재(私淑齋) 강희맹(1424~1483)은 1471년에 쓴 ‘서호잠령계음서(西湖蠶嶺契飮序)’에서 말하기를 “예전 잠두봉에는 까마귀와 솔개,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살았지만, 지금은 시끄러운 관현가무(管弦歌舞) 때문에 나무에는 새집을 찾을 길이 없다”고까지 했을까.

잃어버린 아리수(한강) 복원해야

그렇다고 한강에 사대부들의 문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민들의 문화로 대표적인 것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송파산대놀이는 물론 한강 유역의 부군당에서 밤섬 주민들이 모시는 당제를 들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정조가 화성으로 능행차를 할 때 놓이던 주교(舟橋)에 배를 징발당한 서민들이 신세를 한탄하며 부르던 주교아리랑과 같은 노래들이나 마포에서 강화를 잇는 배에서 불리던 노래들은 사대부들의 문화에서 찾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게 문제다. 글이나 그림 그리고 봉은사와 뚝섬 외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개발이란 있는 것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것을 이룩하는 것만이 아니라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사라진 것들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복원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우려스럽기도 하다. 프로젝트 기획안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 초점은 생태적 복원과 도시 공간 재편으로 인한 삶의 질 향상 그리고 서해로 나아가려는 수운의 편리성에 맞춰진 것 같기 때문이다.

[서울 이야기]문화와 역사의 500㎞… 한강은 지금도 진화한다

그것이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번 참에 한강의 문화공간을 제대로 복원해내지 못하면 우리는 영영 그것들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자식들을 데리고 한강으로 나간 어느 날, 중국으로 오가는 거대하고 호화판인 배를 바라보며 그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 할 황포돛배를 타고 다니며 한 시대의 문화를 일궜던 모습들을 후세들에게 전설처럼 이야기해야 할 불행한 시대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문화는 사라지고 문명의 힘만으로 강화된 한강을 따라 걷고 싶지 않은 것이다. 생태 복원은 훌륭하게 이루었지만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출입 금지’라는 팻말 앞에서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자연은 곧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의 긴 이야기들이 모두 사람과 관계된 것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문화에 대한 배려만 욕심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현재 없이 아름다운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앞서 말하기를 불은 타오르는 염상이고 물은 흘러내리는 윤하라고 했다. 그렇기에 불은 그 시작을 잘 다스려야 화를 입지 않고 물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시작보다 끝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부디 그 말에 따라 치수(治水)하여 비록 화려하지 않고 거대하지 않더라도 사람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 그대로 르네상스를 꿈꾼다면 더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나 한강으로 나가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후세에 전할 수 있어야만 한강은 진화하지 않겠는가.


[서울 이야기]문화와 역사의 500㎞… 한강은 지금도 진화한다

이지누 ㅣ 1991년 사진집인 『분단풍경』을 시작으로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이지누의 집 이야기』, 『잃어버린 풍경 1.2』,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과 같은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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