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항쟁 ‘불씨’ 꺼지지 않았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수만 명 ‘목숨 걸고’ 거리로 나서… 성난 민심행렬에서 ‘조직력’ 발견

지난 9월 26일,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승려가 시위 진압을 하는 군경 무장 병력과 대치하고 있다.

지난 9월 26일,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승려가 시위 진압을 하는 군경 무장 병력과 대치하고 있다.

“버마 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지난해 봄, 방콕 외신기자 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버마 인권대사를 지낸 파울로 핀헤이로(Paulo Pinheiro)는 버마 내부 상황을 묘사하며 ‘아무것도’를 강조했다. 3년 전 버마 안팎을 취재하기 시작하면서 필자가 버마 얘기만 나오면 밥 먹듯이 내뱉던 말도 정확히 이거였다. 강제 이주, 강제 노동, 강제 징집 그리고 소년병과 소수민족 여성들에 대한 정부군의 성폭력, 버마에는 정말 최소한의 인권도 기본권도 신체의 자유도 그리고 ‘쌀’도 없었다.

버마 비자 신청서가 신청자의 머리 색깔 심지어 눈 색깔까지 묻는 것도 신체의 자유가 없는 버마의 암담한 현실에 대한 암시로 볼 만하다. 국가는 언론을 지독하게 통제하고 있었고 국민들은 그런 자국 정부에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했다. ‘이 정도면 폭동 같은 거라도 일어날 듯한데’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2004년 9월,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의 우 르윈 전 대변인은 필자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버마는 조만간 그 어떤 인간적 위기상황(humanitarian crisis)에 직면할 것이다. 양곤은 지금 쌀을 찾고 있다.”

이건 버마 내부로부터의 민중항쟁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는데 그는 악화일로를 걷는 경제상황을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무자비한 폭력진압이 화 자초

그로부터 3년. 전 수도이자 제1의 도시인 랑군과, 마지막 왕국의 수도이자 제2의 도시인 만달레이 그리고 2003년 5월 30일 최소 280명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지 데파윈의 관문 격인 소도시 모니와에 이르기까지. 시위의 물결이 버마 곳곳을 쓸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5명, 아니 3명도 모일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 땅에서 수천 수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에 필자는 아찔해졌다. 그 땅에서 시위란 목숨을 내놓는 행위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주’ 자를 붙일 만한 이들은 대부분 나라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내부 동력의 에너지가 좀처럼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시위의 시발점이 된 건 민생고와 직결된 기름값 인상이다. 깡마른 이들이 넘쳐나는 버마 거리를 마비시킨 기름값 인상이 켜켜이 누적된 빈곤과 군부독재에 지친 시민들에게 동요를 안겨준 것이다. 게다가 지난해 7월, 월 1만~2만 원 벌이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나라에서 국가평화개발평의회(SPDC, 군 최고의결기구) 의장 탄슈웨 장군의 통통한 딸은 금빛 찬란한 5000만 달러대의 목걸이를 목에 걸었으니! 그러고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승려들에게까지 몽둥이질을 해대면서 군부는 더 많은 시위대를 불러오는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이렇게 승려들의 뒤를 따르고, 또 그 승려 대오의 좌우를 인간 띠로 감싸던 시민들의 행렬은 승려들의 솔선이 아찔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군부는 군부대로 2~3일간의 유혈 진압으로 200~300명의 시위대를 죽이고 승려와 외신기자에게도 거침없이 총구를 겨눔으로써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10월 9일 현재, 폭력 진압의 ‘성공’으로 시위는 ‘일단’ 잦아들었고 거리에는 군도 승려들도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4일 탄슈웨 장군은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 반대하고 군부에 대한 대결자세를 풀라’는 조건을 붙여 아웅산 수치와 대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군부의 이런 움직임을 낙관적 기류로 보는 건 성급하다. 그건, 탄슈웨 장군이 아웅산 수치 알레르기 환자이고 현 정권 수뇌부가 초강경파라는 점에서 ‘대화’라는 게 그리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탄슈웨 장군을 필두로 하여 권력서열 2위 마웅에 장군과 데파위 학살의 책임자이자 며칠 전 사망한 전 수상 소윈 장군 등은 2005년 10월 19일 전 권력 투쟁형 ‘친위 쿠테타’로 전 총리 킨년 장군 등의 ‘정보국 인맥’을 몰아내고 요직을 잡은 초강경파 ‘사령관 인맥들’이다. 무엇보다도 불과 며칠 전까지 평화적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군부가 ‘대화’에 무엇을 들고 얼마나 신실할지 의문이 드는 상황이라 섣불리 ‘환영’ 메시지 같은 걸 날리는 건 군사정권의 기를 살려주는 꼴이 될 수도 있음을 국제사회는 유념해야 한다.

군사정권 이탈자 발생도 고무적

사실 버마에 각종 이권사업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이기적 국제사회는 그동안 버마 민주화에 진솔하지도 않았다. 유혈진압 전후로 국제사회가 쏟아낸 ‘자제하라’던가 ‘유감 표명’ 등의 말랑말랑한 성명들은 지난 세월 이따금 체면치레용으로 한 번씩 던져보던 기존의 성명에서 별다른 논조 상승을 보여주지 못했다. 서울 버마 대사관의 시위 현장에서 만난 한 버마 운동가가 “UN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국제사회에 대한 기대와 좌절의 반복, 이게 버마 민주화 운동의 딜레마이자 함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낙관의 불씨는 없을까. 목숨 건 행렬이 ‘그 정도’였다면 현재의 소강상태가 ‘잠시 꺼진’ 불씨가 아닐까 필자는 조심스럽게 전망해 본다. 내외신 보도를 종합해보면 이번 시위가 우발적인 것만은 아닌, 일정하게 조직력을 갖춘 대오라는 힌트를 주고 있다.

“나는 불자다. 나는 승려들을 죽일 수 없다”며 10월 3일 최 장수 내전지역 카렌 주에서 싸우다 랑군 폭력 진압명령을 받은 정부군 장성 하나가 그 ‘적군’진영으로 이탈한 건 또 다른 구도에서 만나는 고무적 흐름이다. 9일 런던 주재 대사관에서 근무해온 예민툰이라는 이름의 외교관 역시 평화적 승려시위대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을 비난하며 사직서를 내고 이 흐름에 동참했다. 사실, 군사정권 내부의 동요와 분열, 강제 노동과 ‘동포 죽이기’에 지친 사병들의 탈영은 사실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일례로 2004년 6월 필자가 찾은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의 파푼 전선(카렌 주 위치)은 탈영병들이 거의 지키고 있을 정도였다. 국경 밖으로 빠져나와야 할 이탈자들은 민주화 세력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정권 이탈자들이어야 낙관의 불씨가 좀 더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탈 움직임이 사병에 그치지 않고 장성급으로 상승기류를 타면서 급기야 명령받은 총구를 반대로 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는 ‘희망’을 입 밖에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수 인종 간, 민주화 세력 간 갈등과 분열을 재정비하고 치료하는 건 또 다른 험난한 여정으로 남겨두더라도 말이다.

방콕|이유경〈분쟁전문 프리랜서 기자〉 penseur21@hotmail.com

아시아 아시아인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