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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경제, 자본주의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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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조치 이후 시장경제 요소 수용… 외화벌이 독점한 권력형 재벌 ‘재산 120억원’

북한사회에서의 자본주의 척도는 조선정성제약연구소(소장 전영란·이하 정성제약)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2005년 6월 6·15공동선언 발표 5주년을 맞아 건설한 정성제약 수액약품공장은 남과 북이 합작한 최초의 현대식 대량 의료품 생산 공장으로, 연간 500만 병의 기초수액제(링거액)를 생산하고 있다.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거리 승리1동에 자리 잡은 이 공장은 2003년 3월 남측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기아대책과 북측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정성제약연구소가 합의함에 따라 건설됐다.

정성제약은 지난해 3월에는 알약품공장 준공식을 갖고 항생제, 해열제 등 기초의약품에서 전문 치료제에 이르기까지 60여 종의 약품에 대한 대량 생산체제에 돌입했다. 알약품공장은 타정기(알약을 찍어내는 기계), 계수기(알약을 병 단위로 자동 포장하는 기계), 4면 포장기(4면을 동시에 밀폐하는 포장기계) 등 현대식 설비를 갖춰 알약·캡슐·과립 등의 약품을 대량으로 생산·포장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정성제약은 이 외에도 병주사제공장, 유로키나제공장, 고려의학공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남측의 시설·기술 지원으로 최첨단 제약공장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량강도와 개성시 현지에도 생산기지를 두는 등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정성제약의 사업 영역은 제약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난 2월에는 남측의 ㈜산과들농수산과 함께 개성공단에서 마늘탈피공장인 ‘산과들·정성제약 개성공장’을 건설해 북한 노동자 1500명이 매일 아침 남측에서 실려온 마늘을 까서 다시 남측으로 보내고 있다. 이 마늘까기 작업은 한국 마늘재배 농민들을 살리고, 임가공 수익으로는 북한 정성제약의 의약품 원료를 구입하는 ‘윈윈 전략’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 하루 30여t의 조업 실적을 보이고 있는데, 산과들농수산은 1t당 220달러의 임가공비를 정성제약에 주고 있다.

정성제약, 문어발식 사업 다각화

정성제약은 남측에 ‘향’도 팔고 있다. 향기관리 프랜차이즈 업체인 ‘에코미스트코리아’에 북한산 피톤치드(수목이 해충이나 미생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공기중에 발신하는 천연의 향균물질)를 공급하고 있는 것. 청정지역인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와 전나무, 측백나무 등을 원료로 한 피톤치드 오일 4종이 인천항을 통해 직수입되고 있다. 정성제약은 연간 20t의 피톤치드 오일을 생산해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제약에서 마늘까기, 피톤치드 원료 판매 등 말 그대로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11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단 대표는 “남북 경협 사업의 성공적인 모델 케이스로 논의되는 게 정성제약인데, 연구소이면서 공장이기도 한 곳”이라며 “방문 당시 기업을 소개하는 비디오테이프 속에 ‘우리 경영진은 경영기법을 혁신하여…’라는 문구가 있는데, 경영 마인드 같은 것이 확산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중국과 남측 자본이 일방적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일부의 우려도 있지만, 새롭게 바뀌려는 노력이 북한 사회에 팽배해 있다고 분석한다.

북한은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시장경제 요소를 국가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국가가 모든 인민을 배불리 먹인다’는 사회주의 이상을 공식 포기한 7·1조치는 임금 및 물가 현실화, 환율 인상 및 배급제의 단계적 축소, 사회보장 축소, 기업의 자율권 확대, 인센티브제 도입 등 시장경제 요소의 부분적 도입을 골자로 하고 있다.

북한은 당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관계 정상화 움직임, 북·일 정상회담 등 국제 환경의 변화에 맞춰 나름대로 야심찬 개혁정책에 나선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매도하고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를 고집해온 북한으로선 엄청난 결단이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도 ‘7·1조치’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만, 그 본질은 “변화된 환경에 맞게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최대 실리를 획득하는 것” “일한 만큼, 번 만큼”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이 조치는 배급제를 당원, 군인, 국영기업 직원 등 ‘제도권 계급’에 제한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생존’하게 했다. 동시에 허울뿐인 정부고시가격을 버리고 암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으로 대체함으로써 시장의 기능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현재 북한에는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합시장이 300~400개 정도 있다. 우리나라의 재래시장 같은 형태로, 기존의 장마당처럼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형태가 아닌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종합시장이다.

고위층 자제들 무역업계 장악

“국가가 정한 가격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시장가격이라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는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말처럼, 정치적 통제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북한에도 자본주의 시스템이 느리지만 조금씩 도입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7·1조치 5년이 지난 지금 북한에서는 ‘자본귀족’이 등장했는가 하면 고위층 자제를 중심으로 한 권력형 자본가도 생겨났다. 평양 통일거리 시장에는 바나나부터 PDP TV까지 다 팔고 있는데, 일반인이 넘볼 수 없는 이 물건을 사는 사람은 외화벌이일꾼, 재일동포, 화교들이다. 중국에서 물건을 사다 시장에 공급하는 이들은 북한의 3대 신흥 부자다.

북한 무역업계를 장악한 고위층 자제들은 권력형 자본가로 떠올랐다. 이른바 ‘붉은 자본가’인 이들은 부모의 권력을 등에 업고 시장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있다. 사실상 북한의 돈줄을 장악한 셈으로, 엘리트 교육을 받고 대외 접촉 기회가 많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 누구보다 밝기도 하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노동당 내 ‘총독’으로 불리는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사위인 차철마(40대)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외화벌이 사업을 독점, 북한 최고 갑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현재 개인 자산만 12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 그는, 북한 권력서열 2위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의 며느리인 40대 후반의 전영란 정성제약연구소장도 북측 재벌로 통한다.

하지만 북한의 개혁은 경제적 실리와 사회주의 원칙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개혁의 부작용에 따른 체제 이완과 붕괴 가능성을 우려해 이미 시행하던 조치를 거둬들이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외부의 지원과 생산 증가로 곡물량이 어느 정도 늘어나자, 2005년 10월 배급제를 부활시켰다가 현재는 기업체 자체 충당 시스템으로 배급제가 정착되고 있다. 2004년 시범 실시했던 7~8명 규모의 협동농장 분조관리제도 중단되고, 가족단위의 식당 운영제 역시 1년 만에 폐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개인투자를 통한 주택건설 허용과 그중 일부를 개인에게 유상 분양하던 시책도 2004년 중단시켰다가 최근 다시 허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반영하듯 김 위원장은 지난해 1월 중국을 방문, 덩샤오핑의 남순 코스를 밟으면서 대내외에 개혁의지를 과시하는 듯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간부들에게 “우리는 중국처럼 개혁·개방하면 안 된다.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도 바라지 마라”라고 못을 박았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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