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정상국가 지도자’로 김정일, 변신 가능성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10인의 전문가 한반도 빅뱅을 말한다- 북한 생존전략

한국전쟁 종전 선언 이뤄지면 개혁·개방 본격화할 듯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북한의 생존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식 사회주의론’의 제시를 통한 체제 결속과 문단속을 하는 것이다.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목격한 북한 지도부는 붕괴된 사회주의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서 ‘주체사상을 구현한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다’라는 테제를 제시하고 주민들의 사상적 동요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둘째,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을 통한 체제수호 및 북·미 직접 협상을 모색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교전관계에 있는 북한은 WMD 개발을 체제 수호의 사활적 무기로 생각하고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주력했다. 북한은 WMD 개발을 카드로 대미 직접 협상을 모색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북한 지도부는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과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것이 생존의 ‘중심고리’라고 인식한 것이다.

셋째,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의 조심스런 편입을 통한 생존 모색을 지적할 수 있다. 북한 지도부는 사회주의 시장이 붕괴된 이상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고 보고 1991년 12월 나진-선봉에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하고 대외개방정책을 조심스럽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생존전략은 시기별로 강조점을 달리할 뿐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김정일 정권의 생존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탈냉전시대의 북한 외교의 핵심은 북한식 사회주의체제의 유지와 관련하여 미국과 직접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1984년 미국과 남북한이 참석하는 ‘3자 회담‘을 제의하고 미국과 직접 접촉을 시도했으나 한·미 양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88년 말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참사관급 비밀 접촉을 시발로 북·미 간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계획이 외부세계에 알려지면서다.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계기로 미국과 직접 협상을 꾀했다. 그동안 제국주의를 반대하면서 미국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북한이 탈냉전과 함께 가장 우선적으로 미국과 직접 협상을 추진하게 된 데는 사회주의의 전반적 위기 속에서 그들의 체제 유지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기대와 희망대로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경제난 그리고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배해온 김일성의 사망 등 국내·외적인 난관이 있었음에도 탈냉전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지루한 줄다리기를 지속한 한 끝에 1994년 10월 제네바 북·미 합의를 통해서 핵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체제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북한은 미국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대북한 ‘연착륙 정책’에 어느 정도 호응해왔고, 북·미관계 개선에 필요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의 부시 정부 출범으로 북한의 북·미관계 개선 전략은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 일변도의 대북압박정책에 맞서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하여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국면 전환을 모색했다.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한반도 정세는 대전환의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은 ‘핵 모호성 전략’을 넘어 핵 카드를 노출하여 협상을 모색하는 벼랑 끝 전술의 거의 마지막 카드다. 북한의 핵실험은 국제사회를 향해 ‘핵 확산이냐 협상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충격 속에 목격한 국제사회는 북한 핵을 용인할 수 없다는 목표가 분명해졌다.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의 인접국가들은 북핵실험을 직접적인 안보위협으로 인식하게 됐고, 미국 부시 행정부는 비확산정책의 실패를 자인할 수밖에 없는 수세에 몰렸다. 이라크전쟁의 수렁에 빠진 부시 행정부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외교적 성과로 삼아야 할 절박한 사정에 처해 있다.

부시 대통령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지난해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전 종료 선언 용의표시’를 했다. 종전 선언은 북한에게 핵을 버릴 수 있는 명분을 줄 테니 비핵화를 실현하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북한과 미국은 올 1월 베를린 양자 접촉를 통해서 북핵실험 이후 북·미 현안 전반을 논의했고, 곧이어 6자회담을 재개하여 2·13 합의를 도출했다. 2·13 합의는 미국이 선 핵폐기 주장과 양자회담 불가방침 및 잘못된 행동에 보상 없다는 원칙을 바꿔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수용해서 만든 동시행동 합의서다.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자금 송금문제로 상당기간 합의 이행이 지연됐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지난 6월 힐 차관보의 평양 방문이 이뤄지는 등 북·미관계가 다시 급진전하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이 “나는 이미 선택했다”며 자신의 임기 내 북핵문제 해결을 자신한 이후 9월 초에 열린 실무회의에서 북·미 양국이 연내 2·13 합의 이행 완료를 확약함으로써 북·미관계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제네바에서 열린 북·미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제2차 회의에서 올 연말까지 북한이 모든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농축우라늄프로그램(UEP)을 비롯한 핵 프로그램을 전면 신고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에 테러 지원국 명단 삭제, 적성국 교역법 적용해제 등 정치·경제적 보상조치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이 대북 적대시정책을 바꾸고 평화공존을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법률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데 뜻을 같이함으로써 북·미관계 정상화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종전 선언을 달성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남북정상회담을 활용할 가능성도 고려했을 것이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북·미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우선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관련 합의를 도출하여 당사자의 해결의지를 확인하고, 미국을 포함한 3자 정상회담, 또는 중국을 포함한 4자 정상회담 등을 통해 종전 선언을 하려는 큰 그림이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의 종료 선언이 이루어질 경우 북한은 부시 행정부 임기 내 북·미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나와 개혁·개방을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세계를 향해 ‘불량국가 지도자’에서 ‘정상국가 지도자’로 이미지 변신을 위한 연출을 시도할 것이다. 미사일 시험 발사와 핵실험이란 충격요법을 통해 국면을 전환한 북한 지도부는 정상회담을 통해 북·미 적대관계를 해소하면 핵 폐기를 할 수 있다는 ‘전략적 결단’을 확인할 가능성이 있다.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동국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동국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관련기사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