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귀향, 고(故) 윤이상 부인 이수자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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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선생 유해 통영에 이장하고 싶어”

[정동초대석]40년 만의 귀향, 고(故) 윤이상 부인 이수자여사

“그동안 눈물이 말라버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오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까 가슴이 미어졌기 때문입니다. 윤이상 선생도 함께 왔으면 산에 올라가서 조국의 산을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지난 9월 10일 세계적인 음악가 고(故)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80) 여사가 4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으면서 꺼낸 마음 속의 이야기다. 1967년 동베를린사건(일명 동백림사건) 이후 윤 선생과 가족들은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동안 윤 선생은 한국정부로부터 몇 번 방문 제의를 받았다. 그때마다 윤 선생은 ‘명예회복’을 원했고 정부는 그의 희망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지난해 화해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다.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의 동베를린사건 재조사 결과 “동백림사건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간첩단으로 확대 포장됐다”면서 “정부는 관련자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윤이상 선생이 바랐던 명예회복의 단초가 마련된 셈이다.

그리고 지난 5월 이재정 통일부장관은 이수자 여사에게 “불행했던 과거의 사건으로 윤이상 선생 및 유가족이 큰 고초를 겪은 데 사과하고, 윤이상 페스티벌 등 적절한 기회에 고국을 방문해달라”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특히 올해 통영에서는 ‘윤이상 탄생 90주년 페스티벌’이 열릴 예정이었고, 이수자 여사는 정부의 초청장을 받고 귀국을 결심했다.

“초청을 받은 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40년 만에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사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 23일 통일부장관에게서 편지를 받았고, 그 편지를 보고 윤 선생의 정치적인 명예회복은 됐다고 생각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명예회복이 됐는지 안 됐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윤 선생 때문에 사회적인 물의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방문에는 딸 윤정씨가 함께 동행했다. 윤 선생이 작고한 이후 윤정씨가 아버지의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윤이상연구소 후원회장, 한국에 있는 윤이상평화재단의 이사, 그리고 독일에 있는 윤이상협회 일까지 맡아서 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 여사의 아들 우경씨 역시 어머니의 귀향에 맞춰 9월 21일 한국 땅을 밟을 예정이다. 동베를린사건 이후 가족들이 처음으로 한국에서 모이는 셈이다.

“우경이는 LA에서 컴퓨터 관련 일을 하는데, 한국에 있을 시간이 1주일뿐이라고 합니다. 우경이에겐 딸이 둘 있는데, 며느리는 애들을 돌봐줘야 하기 때문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들이 들어오면 함께 제주도에 갈 예정입니다. 아직까지 제주도를 한 번도 가지 못했어요.”

“40년 만에 한국에서 추석을 맞이했는데, 어떻게 보낼 것이냐?”는 물음에 “외국에는 음력 달력이 없어서 명절을 챙기기 힘들어요. 그래서 추석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많지는 않네요. 현재로서는 무엇을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밝힌다.

우경씨의 아내는 이수자 여사가 펴낸 ‘내 남편 윤이상’(창작과비평사)에서 밝힌 것처럼 북한의 피바다극장에 소속해 있던 무용수 출신이다. 두 사람의 결혼은 ‘남남북녀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수자 여사는 귀국 이후 바쁘게 지내고 있다. 기자간담회, 통영 방문, 문인과의 만남, 대통령과 접견 등 빡빡한 일정에 맞추느라 피곤할 정도다. 특히 9월 14일에 있었던 윤 선생의 고향 통영 방문은 이 여사에게 특별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윤 선생은 통영에 있는 조상들의 선산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을 큰 불효로 생각했고,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석 전에는 40년간 아무 연락도 없이 살아온 이 여사의 고모와 동생을 만날 예정이다.

이 여사는 베를린과 미국 그리고 북한을 오가면서 생활하고 있다. 베를린에는 윤 선생과 함께 살았던 자택이 남아 있고, 미국 LA와 뉴욕에는 아들과 딸이 살고 있다. 또 북한에는 북측에서 마련해준 별장과 윤이상연구소가 있기 때문에 많은 시간 북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윤 선생을 위해 많은 것을 마련해줬다. 1981년부터 매년 10월 ‘윤이상음악회’가 열리고 있고, 1984년에는 윤이상음악연구소가 만들어졌다. 1990년 윤이상음악연구소는 특수기관으로 독립했고, 현재는 120여 명 규모의 큰 연구소로 발전했다. 윤이상음악연구소에는 민족음악연구실을 비롯한 연구사와, 음악잡지를 출판하는 출판사, 공연 관련 관리부서 등으로 나뉘어 있다. 연구소는 평양의 중심거리에 있는데, 600석 규모의 윤이상음악당도 마련되어 있다.

[정동초대석]40년 만의 귀향, 고(故) 윤이상 부인 이수자여사

이 여사는 평양에 자주 가는 이유에 대해서 “윤이상연구소 때문입니다. 제가 아무런 직책이 없지만, 북에서는 우리들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있거든요. 그래서 연주자들이 연습하는 모습 등을 지켜보느라 자주 갑니다”라고 대답한다. 또 이 여사는 수많은 북한의 명승지를 여행했는데, 평양 인근의 사찰은 거의 가봤을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이수자 여사의 일정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정부와의 만남이다. 지난 13일 이 여사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귀국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윤이상 선생의 음악적 명예회복’을 정부에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베를린 자택은 우리들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작품 저작권료로 집을 관리하고 있는데, 개인이 하기에는 힘이 듭니다.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는 빨리 팔아버리고 싶었지만, 남편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친필 원고와 그동안 연주회를 했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자료가 많습니다. 집을 기념관으로 만들어서 많은 후배가 와서 작업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선생의 음악적인 명예를 회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북한의 윤이상관현악단이 남쪽에서 연주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속마음도 털어놓는다. 윤 선생의 유해를 통영에 이장하고 싶은 것도 이 여사의 또 다른 소망이다. 현재 윤 선생은 베를린 시내의 유공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데, 안장 당시 “이장하지 않겠다”는 서류에 서명한 상태다. 독일 정부와 한국 정부의 협의가 없으면 이장은 쉽지 않은 셈이다.

이수자 여사는 이외에도 정부에 요구할 사항을 몇 가지 준비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말하기 어렵다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 여사는 이번 방문을 계기로 자주 한국에 들어오고 싶다고 말한다. 윤이상평화재단 행사나 통영국제음악회 일정 등에 맞춰서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 귀국에 대해 아직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특히 동베를린 사건 이후 윤 선생과 가족이 경험한 많은 아픔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여전히 ‘한’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개인생활이 전혀 없었고, 공인으로서만 살았습니다. 혈혈단신 혼자 노력으로 세계적인 현대 작곡가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따라다니면서 방해를 했어요. 제발 부탁합니다. 우리 선생님은 빨갱이도 아닙니다. 선생은 민족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예술가로서 꽃을 피우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수자 여사는 ‘2007윤이상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열리는 윤이상음악상 시상식 등에 참가한 뒤 북한에서 열리는 윤이상음악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10월 3일 평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동베를린사건과 윤이상 선생

윤이상 선생은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고, 1920년 부모와 함께 통영으로 이주했다.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가서 독일 음악가에게서 2년 동안 화성학 교육을 받고,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1937년 귀국해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1950년 부산사범학교에서 만난 이수자 여사와 결혼했다. 1955년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제5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한 후 그 상금으로 1956년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다.

1967년 동베를린사건으로 중앙정보부원에게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된 후 이수자 여사와 함께 기소된다. 그해 12월 13일 제1심에서 종신형이 선고됐고, 이 여사는 5년형을 받았지만 집행유예로 석방된다. 윤 선생은 1968년 3월 제2심에서 15년형으로 감형, 이어 1968년 3심에서 10년형으로 다시 감형됐다. 1968년 교도소에서 작곡한 ‘나비의 미망인’이 탄생했고, 1969년 3월 동료 작곡가와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이후 독일과 여러 나라에서 제자를 가르치면서 작품 활동을 해왔고, 1995년 5월 한국에서 분신자살한 청년들을 위해 지은 교향시 ‘화염 속의 천사’와 ‘에필로그’를 마지막으로 11월 3일 베를린에서 눈을 감았다.


<글·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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