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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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문제, 남북정상회담 의제 되는 건 당연”

[정동초대석]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북한 사람보다 북한을 더 잘 아는 사람’, ‘순수 토종 정치학자’.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해 말 통일부 장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학자(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로 돌아온 이 전 장관의 마음은 뿌듯하다. 참여정부 4년여 동안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을 거치면서 관여했던 북핵, 한·미동맹, 남북문제 등 굵직한 외교·안보 현안들이 술술 잘 풀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최대의 이슈였던 북핵 문제는 6자회담 2·13 합의로 북핵 비핵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으며, 오는 10월 초순에는 남북정상회담까지 열린다.

“장관직은 기차역 기관사 같은 자리입니다. 사심 없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일은 참여정부하에서 정상회담이 열리고, 이를 다음 정부에 넘겨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았다면 남북관계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비판론자들은 정상회담도 못 하는 정권이라고 몰아붙였을 겁니다.”

이 전 장관은 자신이 재임하는 동안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지 않은 데 대해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북한은 그동안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남북 및 북미관계를 주목해왔다. 사실 2005년에 정상회담을 시도했는데, 뜻하지 않게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터졌다. 북한과 미국은 BDA 문제를 2년여 동안 끌어오다가 북·미 직접 대화가 이뤄졌고, 올해 초 2·13 합의로 BDA와 북핵문제가 해결되는 전기를 마련했다. 드디어 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셈이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이 전 장관이 있었다.

그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 의제로 서해북방한계선(NLL)을 포함시키느냐와 관련해 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1992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남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계속 협의해나간다. 경계선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남북한은 현재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합의했다. 그 때문에 북한이 이 문제를 제기하면 남북기본합의서에 명시된 대로 남북은 협의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볼 때 북방한계선 문제가 정쟁거리가 되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이 전 장관의 시각이다.

사실 이 전 장관처럼 참여정부에서 장관직을 하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기용할 때부터 장관직을 마무리하는 날까지 보수·우익세력의 끊임없는 표적이 됐다. 일각에서는 그에게 항상 ‘친북·좌파’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하지만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민주개혁 진영에서도 이 전 장관의 외교·안보 정책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였다고 할까.

“청와대에 NSC 이외에 외교·안보 관련 인사들이 있었는데, 그 분들은 NSC가 대통령을 모시고 더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시에 (저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라크 파병 문제가 단적인 예입니다. 진보 진영에서는 파병을 반대했고, 보수 진영에서는 정부가 보낸 3000명보다 더 많은 병사를 보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정무적인 생각은 않고 오직 (외교·안보) 정책적인 부분만 생각했습니다. 청와대 비서실 일부에서 비판적인 얘기가 나온다는 것도 2004년 이후에나 알았습니다.”

[정동초대석]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끝까지 믿어줬다. 일설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항상 그가 올린 보고서를 극찬했다고 한다. 그가 노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2년 1월이다. 대선 1년 전에 그는 서동만 교수, 윤영관 교수 등과 함께 노무현 후보 자문위원을 맡았다. 그는 노무현 후보에 대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화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자 그는 대통령인수위 외교·통일·안보 분과위원을 걸쳐, NSC 사무차장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NSC 사무차장 시절 부하 직원들은 그를 ‘세븐-일레븐’이라고 불렀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늦게까지 일했다는 데서 나온 별명이다. 외교·안보 현안들을 대통령께 보고해야 하는 자리기 때문에 늘 엄청난 긴장과 책임이 뒤따랐다고 회고했다. 이종석 전 장관이 공직에 있을 때 한·미동맹, 용산기지 이전, 이라크 파병, 김선일 피살 사건, 북한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등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큼직한 사안이 유독 많았다.

그럼 그는 어떻게 북한 전문가가 됐을까.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그는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걷다가 서른의 나이에 성균관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요즘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면 대학시절이 생각난다고 한다. 그는 1980년 휴학 중인 상태에서 총학생회의 모든 문건을 만들고 기획하는 등 ‘서울의 봄’에 관여했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은 기억은 ‘화려한 휴가’ 장면 그대로다. 복학 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한국현대사 등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다. 당시 학교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주최한 통일 관련 논문에 응시해 1등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성균관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원래는 동북아시아 정치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한국 정치를 공부했고, 이 과정에서 북한을 모르고는 한국 정치를 이해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1958년 북한 정권 수립사를 우선 공부했습니다. 한국 정치를 끝내놓고 동북아 정치를 하겠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북한에만 머물게 됐습니다.”

그의 석사 논문은 ‘북한 지도 집단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연구’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일본·중국 등 제3국 자료를 고증해 김일성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밝혔다. 또 박사 논문 ‘조선 로동당 연구’는 북한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의 바이블이다. 그는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노동신문을 창간호부터 1980년대까지 분석했다.

“모 대학교 연구소 창고에 있는 노동신문을 복사기로 복사하려 했는데, 30~40장 정도 하니까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집에 복사기를 임대해서 들여놨고, 노동신문을 가져다가 집에서 복사했습니다. 1개월 동안 A3 용지로 무려 8000장을 복사했습니다. 복사하고 스크랩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습니다.”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여 작업했기 때문에 북한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세종연구소 연구실에는 아직도 50여 권의 노동신문 스크랩북이 꽂혀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가짜 학력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연구원, 교수 사회에서 비록 고졸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국내파는 명함조차 내밀기 힘든 것이 우리 정치학계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종석 전 장관은 비유학파 출신으로서 이를 정면 돌파했다. 세종연구소 임용 때도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아니었다면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중 국내 박사는 저뿐입니다. 세종연구소가 생긴 후로도 저하고 정세현 전 장관이 유일합니다. 이것은 세종연구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계의 문제입니다. 차별받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른 국내파들에 비하면 행운입니다.”

당시 세종연구소는 국내 박사이자, 좌파 성향의 이종석 전 장관의 임용을 꺼렸다. 그러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 것일까, 통일부 차관을 지낸 임동원 전 국정원장(당시 객원교수)이 그를 적극 추천했다. 이 전 장관은 만난 적도 없는 임 전 국정원장이 자신의 글을 보고 보증을 해준 덕분에 세종연구소에 합격할 수 있었다.

<글·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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