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인권운동가 정유미씨, 말기암 투병중 ‘아주 특별한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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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 위해 반드시 회복”

결혼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유미씨와 자니 클라인.

결혼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유미씨와 자니 클라인.

지난 8월 10일 오후 6시 서울 용산 철도웨딩홀. 150여 명의 하객이 모인 가운데 ‘아주 특별한 결혼식’이 진행됐다.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대신 개량한복을 입은 신랑 신부. 미국인 자니 클라인(52)과 재미교포 정유미씨(45)다. 보통의 결혼식과 달리 두 사람은 객석 앞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정씨는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마른데다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자니는 그런 정씨를 살뜰하게 보살폈다. 정씨는 후배의 편지 낭독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이내 환한 표정으로 아름다운 8월의 신부 자리를 지켰다. 이어 각각 활옷과 사모관대 차림으로 갈아입은 정씨와 자니가 정통 혼례식으로 백년가약을 맺는 순간, 하객은 이들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이날 자니와 정씨의 눈에는 연인을 향한 깊은 사랑의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나왔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음을 알기에 두 사람이 느끼는 애틋함은 더 간절해 보였다. 1년 전 위암에서 전이된 난소암 4기(말기),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정씨는 최근 병원으로부터 삶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자니는 사랑하는 연인의 곁을 더 단단하게 지키기 위해 간곡히 청혼을 했다. 시리도록 처연하고 아름다운 이날의 결혼식이 거행된 이유다.

미국서 대학 졸업 후 고국 민주화 매진

우리가 정씨와 자니의 사랑을 주목하는 것은 단지 정씨가 말기암 환자여서가 아니다. 정씨의 삶 자체가 지닌 숭고함 때문이다. 그의 현재 직함은 미군범죄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이하 전민특위) 공동사무국 사무총장. 전민특위는 1999년 AP통신을 통해 한국전쟁 중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미군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실이 밝혀진 것을 계기로 결성한 단체다. 한반도 전역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증언과 문헌자료들을 토대로 공동 조사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00년도 남과 북, 해외가 공동으로 건설했다.

정씨는 14살 때인 1976년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대학 졸업 후 고국의 민주화와 자주, 그리고 통일을 위한 사업에 매진해왔다. 2002년 12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신효선·심미순양 사건이 일어났을 땐 백악관 앞에서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며 삭발을 했고, 2001년과 2003년엔 유엔인권위에 참가해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제기했다. 2005년에는 광주항쟁에서 미국의 공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미국 전역과 캐나다 17개 도시 순회 강연회를 진행했다.

40살 넘어 뒤늦게 찾아온 사랑

건강했던 2001년 코리아 국제전범재판 때 참가한 경북 경산 코발트 폐광의 유족과 함께.

건강했던 2001년 코리아 국제전범재판 때 참가한 경북 경산 코발트 폐광의 유족과 함께.

8월 13일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남양주의 한 요양병원. 정씨와 자니는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7평 정도의 작은 규모에 1인용 침대 두 개와 작은 소파가 놓여 있는 소박한 원룸이지만 발코니로 축령산 자락이 보여 그나마 탁 트인 느낌을 준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방에는 자니 혼자 있었다. 정씨는 병원 측이 암 환자를 위해 정기적으로 마련하는 웃음치료를 받으러 갔다고 했다. 자니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환자복을 입은 정씨가 돌아왔다. 결혼식 날 한복을 입은 상태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던 복부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임신 7개월 정도 된 임산부로 오해할 만큼 가슴 아래 배 부분이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난소종양과 복수(腹水)로 잔뜩 팽만한 것이라고 한다. 정씨는 허리에 쿠션을 대고서야 힘겹게 소파에 앉아 인터뷰에 응했지만 자니와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할 때마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정씨는 “자니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 헤어지는 사람도 있는데 자니는 제가 아픈 사실을 알고 더 적극적으로 보살펴줬어요. 제 병을 알고 얼마 안 돼 반지까지 선물하면서 청혼했거든요. 미국 직장까지 그만둔 채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맞지 않는 한국에서 저와 함께 투병생활을 1년여간 해오고 있어요. 병이 다 나으면 양가 부모님 다 모시고 성대하게 결혼식을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지인들을 모시고 간단하게 언약식을 하려던 게 결혼식이 되고 말았거든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미국 내 진보운동단체에서 일하는 독신 활동가들을 위한 인터넷 미팅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됐다. 자니 역시 미국 브루클린에 살면서 저소득층 이민자들을 위한 활동을 벌이는 단체에서 일한 것이다. 뉴욕대에서 연기를 전공한 그는 1980~1990년에는 브로드웨이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자니는 정유미씨를 처음 만났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름다운데다 지적인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꾸려가는 모습에 매료됐다는 것. 사회적으로 진보적이고 생각이 열려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정씨 역시 자니가 마음에 들었다. 일에 빠져 사느라 연애 한 번 못하고 나이 40을 훌쩍 넘겼어도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마냥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006년 광주에서 개최한 6·15민족통일대축전 참가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주위의 권유로 병원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말기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 결과를 들었다. 예상할 수 있는 생존기간은 6개월이라고 했다.

“2005년 늦가을쯤 월경이 끊기고 지속적으로 소화가 안 돼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뉴욕의 내과 주치의를 찾아가 피 검사를 했더니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거예요. 그해 10월 위내시경 검사도 받았지만 헬리코박터균 때문이라면서 간단하게 약만 처방해줬어요. 이듬해 봄부터 몸이 붓기 시작했는데 전 단순히 살이 찌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간혹 통증이 있었지만 워낙 바쁘게 사는 터라 큰 병원을 찾아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죠. 그런데 지난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지인들이 제 건강이 나빠 보인다면서 병원 진료를 받아보라고 해요. 암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제가 시간 없다는 이유로 병을 키운 셈이에요.”

그는 “일에 몰입하느라 몸을 혹사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진보단체 활동가로만 뛴 게 아니었다. 낮에는 공인회계사로 금융회사인 ING그룹 계열사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인권학을 공부했다. 회계사로 안락한 삶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그가 지향하는 삶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장에서 번 돈의 대부분도 동생 뒷바라지와 전민특위 사업에 내놓았다. 해야 할 일이 늘 산더미였기에, 하루 24시간은 그에게 너무도 짧았다.

“제가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보람 있는 일이니까요. 영어와 한국어를 할 수 있고 한국과 미국의 역사적·정치적 관계를 잘 알기 때문에 제가 하는 일은 특별하다고 자부해왔어요.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15년간 밤낮 없는 생활을 해왔어요. 1995년에 회계사 시험을 본 것도 주중 40시간만 근무하면 그 외 시간은 우리 민족을 위한 활동에 쓸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전까지는 꽃집을 운영하면서 활동자금을 마련했는데 가게에 몸이 묶여 있어 답답했거든요.”

그가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 시카고의 설리반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인 1980년, 우연히 TV를 통해 5·18 광주민주화항쟁 현장을 접하고서다.

“그 전에도 아버지는 한국의 비민주화와 박정희 군부독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런데 박정희가 사망하고 1980년 5월 여자와 학생을 포함한 광주시민들이 계엄군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당하는 것을 TV를 통해 보면서 소름이 끼쳤죠. 정말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시카고에서도 지역 진보 인사들을 주축으로 500여 명이 모여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 촉구를 위한 시위를 하고 전두환 처형식을 했어요.”

시카고 일리노이주립대학에 입학해서는 시카고 인근 대학에 다니는 교포학생 및 졸업생이 주축이 된 청년모임에 가입, 역사와 풍물놀이 등을 익혔다. 조직적인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전국조직인 재미한청년에 가입하면서다. 당시 그의 삶의 지표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였다고 한다. 그리고 군부독재시대가 막을 내린 후에는 자연스럽게 통일운동이 주력이 됐다. 개인의 삶은 항상 뒷전이었다.

“건강 좋아지면 시부모님 뵙고파”

병원에서는 남은 생이 한 달이라고 했지만 반드시 낫겠다는 정씨의 의지는 확고하다. 난소종양과 복수로 정씨의 배는 많이 팽창해 있다.

병원에서는 남은 생이 한 달이라고 했지만 반드시 낫겠다는 정씨의 의지는 확고하다. 난소종양과 복수로 정씨의 배는 많이 팽창해 있다.

활동가로서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경남 함안의 할머니·할아버지들이다.
“제 큰아버님은 한국전쟁 때 한국군에 의해 학살됐어요. 그런 아픈 가족사가 있어 남과 북을 돌며 한국전쟁 때 미군의 민간인 학살 진상조사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어요. 이런 비극을 남과 북이 다 겪었는데 아직도 미국의 공식적인 사과나 배상을 받지 않는 상황이 마음 아파요. 하지만 전쟁 때 미군으로 인해 당신이 다치거나 가족을 잃은 함안의 어른들은 아픈 과거를 가슴에 묻은 채 꿋꿋하게 살고 계셨어요. 전 그 모습에 감명받았어요.”

자니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정씨에게 “I Love You”라고 말한다. 누우면 숨이 차 새벽에도 몇 번씩 잠에서 깨어, 앉아서 잠을 청하곤 하는 정씨를 보며 자니는 마음이 아프다. 정씨는 그동안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민간요법에 의지해 자신의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상태가 나빠지면서 올 7월부터 항암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건강을 되찾겠다는 정씨의 의지는 확고하다. 자신의 곁을 한결같이 지키는 자니를 봐서라도 완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건강을 회복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미처 만나지 못한 자니의 부모님과 시누이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사람에게 많이 미안해요. 직장도 일도 접고 이역만리 말도 안 통하는 곳에 와서 고생하고 있네요. 반드시 건강을 회복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만난 사람인데….”
정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정씨의 어깨를 자니는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자니가 청혼과 함께 준비한 반지

자니가 청혼과 함께 준비한 반지

자니가 정유미씨에게 보내는 시

다음은 8월 10일 결혼식에서 자니가 낭독한 시다. 정씨를 위해 자니가 손수 지었다고 한다.

당신이 내 삶에 들어옴으로써 나는 잃어버렸던 나의 조각들을 찾았습니다.
비로소 우리의 퍼즐은 완성이 되고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당신이 내 삶에 들어옴으로써 내 삶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비로소 우리의 꿈이 실현되어 혁명적 변화를 일으킬 열정을 공유할 짝을 찾게된 것입니다.

당신이 내 삶에 들어옴으로써 당신은 내 삶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기쁨과 슬픔의 보편적 본능을 함께 합니다.
당신이 내 삶에 들어옴으로써 나의 행복은 당신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장애물은 나의 적이 되고 당신의 승리는 나의 성취가 됩니다.

두 사람이 연애할 때 주문했다는 각자의 이름이 새긴 머그컵.

두 사람이 연애할 때 주문했다는 각자의 이름이 새긴 머그컵.

당신이 내 삶에 들어옴으로써 내 삶은 당신 안에서 평온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결코 떠나지 않을 바로 그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정유미 후원계좌
(농협) 417040-51-064725(예금주:한충목)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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