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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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박사가 판치는 세상 대안은 다산사상에 있어요”

[정동초대석]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 단국대학교 이사장(66)은 요즘 매우 바쁘다. 10년을 끌어온 단국대 이전 문제를 마침내 매듭지었다. 단국대는 가을학기부터는 죽전에 있는 새 둥지에서 출발한다. 박 이사장의 집무공간도 새로운 캠퍼스로 바뀐다. 개교 60주년. “회갑을 지낸 사람이 다시 인생을 새출발하 듯”이라고 박 이사장은 비유했다.

어찌 보면 그의 삶도 닮아 있다. 그는 13, 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뒤 정치권을 떠나 학문의 길로 나섰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이사장 직함이 있다. 다산연구소 이사장.

기자의 책장 한 구석엔 1970년대 유신 말기 그가 펴낸 책 한 권이 꽂혀 있다. 벌써 스물다섯 해 넘게 함께 한 책이다. ‘流配地(유배지)에서 보낸 便紙(편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아들과 제자에게 보낸 서한집이다. 가로쓰기로 한자가 섞여 있던 그 책은 보기 좋은 양장판에 순한글 세로쓰기로 개정을 거듭해 지난해 말 17쇄를 발간했다. 기자는 그가 정치계에 뛰어들 당시 편역자를 다시 확인해봤고, 언제부터인가 이메일로 꾸준히 전달되는 다산연구소의 뉴스레터에서 그 이름을 다시 보았다. 다산전도사. 공인된 박 이사장의 별명이다.

“다산의 사상이 비록 200년 전 생각이지만, 사회변혁이나 역사변천의 논리로서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사회는 부패해 있고 뇌물공화국입니다. 가짜 박사·논문이 판치는, 이런 부도덕한 세상에서 오늘 우리나라의 개혁을 위해서는 어떤 사상적 지표를 가져야 할까요. 공자나 석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이 1000년 2000년을 가도 유효하듯, 어느 시대가 되더라도 유효하고 가치를 지니는 사상이 있는 겁니다. 저는 그게 다산사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박 이사장은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양극화 현상이나 불평등 문제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딜레마에 대한 답을 다산사상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족적·정치적 현안에도 지혜를 빌릴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다산 선생은 한편으로 국토나 역사지리, 이런 부분에도 조예가 깊은 분입니다. 우리나라의 영토나 국토 문제와 관련해서 정체성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 양반입니다. 지금 독도 문제나 동북공정, 만주 등에 대해 다산 선생은 명쾌히 이야기하고 의문을 풀어줬습니다. 다산 선생은 정치와 관련, 당쟁 문제를 가장 큰 폐해로 봤는데, 정책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출신지역·파당으로 싸우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신분 문제와 관련, 다산은 사람이 상·중·하품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종래의 봉건적 학설에 견결히 반대하고, 후천적 제도가 저지른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누구든지 자신의 노력에 따라 신분 변화가 가능하다는 근대를 여는 사상을 제시한 겁니다.”

다산 사상이 일종의 팔방미인이라는 식인데, 사상·철학의 파당성이 있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고 한다.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의 이름은 다산플라자다. 다산을 치켜세웠다고 독재와 공무원의 부정비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1980년대 집권 초기 어느 신문을 보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럽 순방을 하는데, ‘목민심서’가 꽂혀 있더라는 대목이 나오더군요. 저는 전시용으로만 꽂아놨지 전혀 안 읽어봤다고 확신합니다. 정말 ‘목민심서’를 좋아하고 다산을 숭배했다면 그렇게 뇌물을 받고 비자금을 만들었겠어요? 다산을 읽었으면 다산답게 행동해야지.”

내친 김에 요즘 화제가 되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 대한 소감을 들어봤다.
“광주항쟁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저런 극악한 양민학살이 있었구나, 저만큼 처참한 일반인의 피해가 있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처참한 때가 저네들이 말하는 ‘화려한 휴가’ 10일간이 끝난 뒤거든. 몸서리쳐지는 공포였고, 그게 더 소름끼치는 일이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서 살다가 1982년 3월 3일자로 출소했는데, 1987년 6·29선언이 있을 때까지 5년 이상 독재정치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어요.”

박 이사장이 말한 ‘끔찍한 시기’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박 이사장은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지만,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하기는 불가능했다.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당했고, 모든 전화는 도청됐다. 1984년 말, 그는 복권되어 교사로 복직했는데, 그런 뒤에도 경찰의 감시 눈초리는 끊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사회과학 서적을 본다든가, 다산 원전을 갖고 씨름하는 일이었어요. 많이 팔리는 책은 아니어서 인세는…. 1984년인가 85년부터는 다산연구가로 알려져서 강사로 나섰는데, 경찰도 강연 주제가 다산이니까 어쩌지는 못하더라고.”

그가 다산사상에 매료된 시기는 청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도 ‘목민심서’나 ‘경세유표’와 같은 다산의 대표 저작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중화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선 후기 실학 사상가들의 노력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한문으로 된 서적들이 한글로 번역이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실학사상의 진면목을 접할 수 없었다. “대학에 가서 학교 도서관에 영인본으로 보관되어 있는 다산저작을 읽었는데, 고등학교 때 우리가 듣던 이야기는 ‘큰 백사장에서 모래알 하나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단한 개혁적 사상을 지닌 분이고, 또 세상을 바꾸고 변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분이었어요. 대학 다닐 당시엔 가난하고 부패한 자유당 시절이니까….”

한·일회담반대운동 등 학생운동에 가담하면서도 ‘썩은 것을 도려내고 바꿔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산사상은 여전히 그에게 매력적이었다. 대학원에 적을 두면서 학생운동을 하던 후배와 교류하던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다록(茶綠)사상’을 주창했다. “항용 쓰는 말로, ‘다사록행(茶思綠行)’, 즉 ‘다산 정약용의 개혁사상을 녹두 전봉준의 실천력으로 사회 변혁을 이루자’는 게 당시 화두였어요. 1970년대 초반, 전남대에서 ‘녹두’라는 표제의 지하신문이 나왔는데, 녹두라는 이름의 동아리가 있었지요. 녹두 전봉준 이전에 다산이 있었고, 저는 후배들과 만나 그런 이야기를 수없이 주고받았죠.”

그리고 이른바 ‘함성지’ 사건. 서슬 퍼런 유신을 정면으로 비판한 이 사건으로 그는 곤욕을 치른다. “사실 나는 구체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는데, 동지적 관계가 있어 유신정권이 나를 끌어들여 수괴로 만들었어요. 당시 학생이 8명이고, 저는 교사 신분이었는데, 결국 9명이 구속되고 6명이 불구속입건되는 ‘내란음모’ 사건이 된 겁니다.”

고(故) 김남주 시인은 사건 전부터 그와 교류한 대학 후배다. 훗날 후배들이 연루된 남민전 사건을 그는 어떻게 평가할까. “남민전 사건을 저는 공산주의운동이라고 보지 않아요. 강고한 독재체제를 이기려면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그 당시 늘 우리가 하던 이야기거든. 김남주 등이 강고한 지하전위단체를 만들려고 했던 걸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서, 폭력도 불사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사상적으로 의심한 적이 없어요. 그 친구들이 진보적이지만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공산혁명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아울러 그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나오기 전까지 북의 ‘정통사상’ 역시 다산사상에 뿌리를 둔 걸로 보았다. 마오쩌둥 사상이 고대 중국의 사상과 마르크시즘을 접맥시킨 것처럼, 해방 후 이북정권이 수립된 후 1960년대 중반까지 학계에서 다산사상의 연구가 활발했다는 것. 국내에도 출판된 과학원 철학연구소의 ‘다산정약용 탄생 200주년 기념논문집’이 단적인 사례다. “당시 남쪽에서는 모르고 넘어갔지만, 8개 분야로 나눠 다산을 정밀하게 연구했는데 수준 높은 논문들이 꽤 있어요. 물론 유물론적으로 결론을 몰아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최근 고액권 화폐에 들어갈 인물로 누가 적합하냐는 논란이 있었다. 역시 그는 그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을 밀까. “당연하죠. 한국의 사상·학술사에 다산만큼 훌륭한 역할을 한 분이 없어요. 퇴계 이황이 학문에서 이룩한 업적이 성리학이지만, 그 성리학을 초월해서 새로운 근대사회의 여명을 열어젖힌 개혁사상으로 다산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한 분이 다산입니다. 언젠가 고액권 화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을 누구로 할까 여론조사를 했는데, 1위가 백범 김구 선생이고, 2위가 다산이었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우리 국민들이 이제야 역사를 제대로 보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민족통일운동가로서의 백범, 그리고 청렴사회·도덕성이 구현되는 나라를 꿈꾼 다산 선생이 국민 숭앙의 대상이 되고 그 사상이 이념적 잣대가 된다면 나라가 바로 서는 거지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한·미FTA협상 타결 당시 박 이사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다산 선생도 FTA를 찬성했을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지금도 그는 그렇게 생각할까. “당시 신문이 잘못 쓴 거예요. 다산은 교역 확대를 늘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손해보고 불이익당하면서 교역하자는 건 아니에요. FTA가 상대방이나 우리나라에 다같이 이익이 된다면이라는 전제를 말했는데, 거두절미하고 쓰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해당 기자에게도 사과를 받았습니다. 다산은 당시 중국으로 사신을 가는 사람들이 민족주체성을 갖고 당당한 양국관계를 설정하고 외교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비해 경제적·군사적으로 약하지만 주권국가인 한 당당히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찬성할 것은 찬성해야지요. 지금 광우병 쇠고기 논란 등에서 우리 정부가 굴복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다산 선생이라면 아마 격노할 거예요.”

그는 요즘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많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기”라고 말한다. 매일 오전 5시 정도에 기상해 아침운동을 한 뒤, 두 개 정도 신문을 읽는다. 오전에는 단국대로 출근해 학교업무를 보고, 오후에는 다산연구소로 가서 글을 쓰고 새로 나온 책을 읽는다.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실학사상의 인물과 고향을 돌아보는 글과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고, 다산 원전을 살펴보면 하루가 간다. 일요일에는 ‘거시기산악회’라는 이름으로 이돈명 변호사, 백낙청·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등 ‘민주화운동 동지’들과 함께 등산을 한다.

그가 떠나온 정치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원래부터 학문을 꿈꿨어요. 학문할 수 없는 신분이 돼서 그렇지. 1980년대 나이가 40이 넘으니 정치 참여를 통해 역사에 대한 기여도 의미 있겠다 싶어 정치를 해봤는데, 내 성격상 안 되겠더라구. 정치가 거짓말을 잘 해야 하고, 없는 것도 있는 마냥 해야 하니…. 그래서 학문을 통해 사회 기여를 생각한 건데, 아주 서가에 묻혀 진리를 탐구하는 그런 학문이라기보다 그래도 내가 한문을 아니까 한문을 모르는 분들에게 그 가치를 알려주는 것도 의미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글·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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