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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 색다른 탈출,등.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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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론조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명소 중의 하나로 등대가 꼽힌다. 누구나 등대에서의 ‘아주 특별한 하룻밤‘을 희망한다. 서구인들이 템플스테이를 통해 절집에서의 하룻밤을 아주 특별한 감흥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실제로 등대에서의 하룻밤은 매우 각별하다. 일몰과 일출을 모두 볼 수 있는 천혜의 장소이며, 곶에 위치하여 경관이 뛰어나고, 우리가 몰랐던 등대원의 일상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에서도 등대로의 소풍을 꿈꾸는 대목이 등장한다. 등대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등대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일 수 있다. 현실적 강박과 옥죄임 속에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의 일탈을 그나마 보장해줄 수 있는 곳이 등대섬이다. 무인도로 탈출을 꿈꾸지만, 막상 숙소는커녕 물도 없는 무인도로의 일탈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등대여행은 일상으로부터 색다른 탈출이 될 것이다.
- 주강현 ‘등대여행’ 중에서

길을 밝히는 불빛 _ 등대를 찾아서

호미곶등대

호미곶등대

바다에서 배들이 위험을 피해 안전하고 빠르게 운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다에도 육지의 도로처럼 배들이 다니는 길이 있다. 이것을 항로라고 하는데, 항로는 육지의 도로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며, 바다에서는 배가 안전하게 운항하기 위해 해도라는 바다의 지도를 이용한다. 운항 중인 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여 안전하고 빠르게 운항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섬, 곶, 항만, 협수로 등에 인공적으로 설치한 시설을 항로표지라고 한다. 등대는 배가 육지의 위치나, 육지와의 거리, 위험한 곳 등을 확인하고 항만의 소재, 항구 등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탑 모양의 구조물로 빛을 비추는 대표적인 항로표지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유인등대 43기, 무인등대 519기가 있다. 자, 이제 지역별로 대표적인 유인등대 몇 곳을 찾아가보자.

등대여행 1번지 호미곶등대

등대여행 1번지로 호미곶등대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팔미도등대가 있지만, 그 지리적 의미와 역사성으로 해서 호미곶등대가 단연 등대여행 1번지다. 더구나 호미곶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또 이 곳은 한반도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할 수 있는 곳 중에 하나다.

호미곶(虎尾串)은 한때 ‘장기곶’으로, 형상면에서 한반도의 ‘토끼꼬리’로 불린 적이 있다. 일찍이 16세기 초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산수비경’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의 코,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고,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국토 최동단을 측정하기 위해 영일만 호미곶을 일곱 번이나 답사, 측정한 뒤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임을 확인, 호랑이 꼬리 부분이라고 기록했다. 육당 최남선 역시 백두산호랑이가 연해주를 할퀴고 있는 형상으로 한반도를 묘사하면서, 이곳을 ‘호랑이꼬리’라 이름 지었고, 영일만의 일출을 ‘조선십경(朝鮮十景)’ 중의 하나로 꼽은 바 있다.

그런데 어쩌다가 ‘호랑이꼬리’가 ‘토끼꼬리’가 되었던 것일까. 동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호랑이는 돌진할 때 몸의 균형과 스피드, 희로애락을 꼬리로 조절하고, 꼬리를 움직여 무리를 지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호랑이의 꼬리야말로 지축을 뒤흔들 듯이 포효하는 그 기운이 집약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뒤집어 표현하면 한반도의 국태민안은 바로 이 호미곶의 정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제는 호랑이의 꼬리인 이곳을 ‘토끼꼬리’로 비하하고, 그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쇠못을 박는 잔학상을 자행했다. 다행히 해방 이후 다시금 ‘호랑이꼬리’로 고쳐 부르고는 있지만, 그때의 치욕을 말끔히 씻을 수 있을 때는 언제쯤일까.

호미곶등대는 이른바 ‘제국의 불빛시대’인 1908년에 세워졌다. 1901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을 몰아낸 뒤 러시아 세력마저 몰아내기 위해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일본 수산실업전문학교 실습선이 한국 연안의 수심, 어군(魚群) 조사를 위해 항해하던 중 영일만 호미곶 앞바다를 지나다 암초에 부딪쳐 승무원 4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은 이 해난사고가 우리나라가 연안 해운시설이 미비해 일어난 사고라 하여, 해운시설의 설치 및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견디다 못한 우리나라는 1908년 12월 20일 호미곶등대를 준공한 것이다.

호미곶등대의 등탑은 굴뚝 모양의 팔각형 입체물로, 높이 26.4m에 외양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이 등대는 다른 고층건물과는 달리 건물 밑부분부터 폭이 좁으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아올려 지었다. 이런 방법은 지금의 기술로도 시행하기 힘든 것이어서 당시의 건축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등탑 내부는 6층인데, 각 층의 천장에는 조선조 왕실의 상징인 이화 모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등, 그 미관이 아름다워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상생의 손

상생의 손

1985년 개관한 등대박물관은 등대 관련 유물 및 해양수산 관련 자료 320종 등 총 4265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등대원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등대원생활관, 정해진 항로를 따라 항로표지를 이용해 입항하는 방법 등 항해 자체를 체험하게 하는 운항체험실, 에어탱크 모양의 음파표지와 지구본 모양의 광파표지를 통해 등대의 운영을 체험하는 등대과학관, 등롱과 등명기 등 빛을 이용한 광파표지, 소리를 이용한 음파표지 및 전파표지 등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등대유물관 등이 있으며, 이밖에 야외전시관과 테마공원, 수상전시관, 해양수산관 등도 거느리고 있다.

호미곶을 가려면 포항 시내에서 30여 분을 달려야 한다. 일출의 짧은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둠을 뚫고 호미곶으로 달려가면, 동이 트기 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커다란 손 하나가 바다 위로 솟아 있다. ‘상생의 손’이다. 그러고 보면 맞은편 뭍 위에도 손 하나가 서 있다. ‘상생의 손’은 시간과 공간, 자유와 평등, 문명과 자연이 화해하고 상보(相補)하며 상생(相生)하는 새 천년의 기념정신을 상징한다. 밤새 바다를 지키던 등대의 불빛이 사위어들면, 마침내 그 손 너머로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한반도의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호미곶 해맞이공원에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조형물이 서 있다. 신라의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다에 실려 일본으로 가 왕과 왕비가 되었다. 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매, 이 땅에서는 해와 달이 정기를 잃어 빛이 없어지니 연오랑은 세오녀가 짠 명주 비단을 고국으로 보내 다시 빛을 찾게 하였다. 한편 호미곶에는 연중 불어대는 세찬 해풍을 이용한 무공해풍력단지 건립의 일환으로 거대한 풍력발전기를 설치해 운영 중이다. 빛과 바람으로 가득한 그 바다를 호미곶등대는 오늘도 굳건히 지키고 서 있다.

섬에서 바라보는 등대섬 소매물도등대

소매물도등대

소매물도등대

우리나라 등대 중에서 주변 풍광과 가장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을 들라면 많은 이가 소매물도등대를 첫손에 꼽는다. 소매물도등대는 그냥 등대가 아니라, 꼭 ‘등대섬’으로 불린다. 이곳에서 등대와 섬은 오롯이 한 몸이다. 소매물도등대라고는 하지만 등대가 있는 섬은 오히려 본섬과 떨어져 있다. 그렇다고 등대섬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 본섬과 등대섬 사이는 불과 30여 m, 5분이면 충분히 등대섬으로 건너갈 수 있다. 그런데도 등대섬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려버린 탓일까, 물때를 놓치고 허겁지겁 물목을 건너다 심지어 빠져죽은 이까지 있다고 한다.

그렇게 기를 쓰고 등대섬으로 가지 않아도 등대의 풍광은 건너편 소매물도에서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소매물도 선착장에서 배를 내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망태봉이란 높다란 봉우리에 닿는다. 동백나무숲과 잡석더미를 헤쳐 정상에 서면 발아래로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넋을 놓고 그 풍경을 바라보다 한동안 오갈 생각까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짙푸른 바다 위에 한 점 섬이 떠 있고, 섬은 푸른 초원으로 덮여 있다. 그 위에 ‘언덕 위의 하얀 집’처럼 서 있는 등대. 이윽고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그 섬에 가고’ 싶어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음질치듯 내려가고야 마는 것이다.

소매물도등대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에 있다. 소매물도까지 가는 길은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배로 1시간 30분가량 걸린다. 거제도 남쪽 끝자락인 저구리에서 곧바로 달려서 30분이면 닿는 코스도 있지만, 거제도를 거쳐 저구리까지 가는 거리도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통영에서 소매물도까지 가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이러저러한 구경거리를 놓칠 수도 있으므로 되도록 정통코스를 따를 일이다.

그 구경거리란 한려해상에 점점이 박혀 있는 아름다운 섬들이다. 한산도와 비진도, 대매물도도 있다. 한산도는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가 머문 통제영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이다. 리아스식 해안의 멋진 풍광과 함께 우거진 숲이 더위를 식혀주며, 이순신 장군이 작전본부로 사용하던 제승당이 잘 단장되어 있다. 의항마을 서쪽에는 자그마한 해변이 있어 호젓하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고, 아이들의 교육을 겸해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곳이다. 8월 10일부터 14일까지 한산도 일원에서는 한산대첩제가 열린다. 비진도는 8자 모양의 아름다운 섬으로, 동쪽으로 몽돌, 서쪽으로 백사장이 자리 잡은 해수욕장을 낀 두 섬이 하나로 연결되어 펼쳐져 있다. 특히 몽돌해수욕장은 고동이나 바지락 잡기에 좋고 야영하기에도 좋아 매년 피서철이면 많은 피서객이 몰려든다. 이 섬의 팔손이나무자생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영국군 수병의 넋이 애달픈 거문도등대

거문도등대

거문도등대

여수항에서 남쪽으로 114.7㎞, 쾌속선으로도 2시간 거리인 남해 남단 거문도에는 생각지 못한 색다른 풍경 하나가 있다. 거문도 고도(거문도는 고도, 서도, 동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에 있는 영국군 수병 묘지가 바로 그것이다. 1885년(고종 22년) 4월 15일, 영국 함대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구실로 일방적으로 거문도에 상륙한다. 이로부터 22개월 동안 영국군이 불법으로 거문도를 점거하게 되니, 이른바 ‘거문도사건’이다. 1887년, 영국군은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의 어느 곳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후 일단 철수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국 함대는 인근 해역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거문도에 들러 머물다 가곤 했다. 영국군 수병 묘지는 그때의 사연을 안고 섬 한 귀퉁이에 쓸쓸히 남아 있는 것이다.

-1886년 3월, 알바트로스호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사고로 죽다. - 윌리암 J. 메레이와 17세 소년 찰스 댈리
-1903년 10월 9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 잠들다.

3기의 영국군 수병 무덤 앞에 서 있는 묘비명은 제법 착잡한 소회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벽 안의 이방인들과 희한한 동거를 해야만 했을 외딴 섬 사람들의 처지도 그렇지만, 이유야 어떻든 이역만리 먼 곳으로 와 숨을 거두고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17세 소년의 넋 또한 애달프기만 하다.

거문도등대는 거문도사건이 일어난 지 꼭 20년이 지난 뒤인 1905년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이 불빛 역시 제국주의시대 침략의 길을 밝히던 불빛이다. 일제는 한일병합 훨씬 이전에 확고부동한 진지를 구축하여 군사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거문도에 등대를 세웠다. 당장에 러일전쟁 와중에서 군대와 물자운송을 안전하게 도모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거문도등대는 동양 최대의 규모로, 천혜의 어업전진기지이자 해상통로인 거문도 일대를 밝혀왔다.

현재 거문도등대는 해양수산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유인등대 숙소개방과 연계되어 식기류, 조리기구, 침구류 등을 구비하고 등대를 체험하고자 하는 관광객들에게 이를 개방하고 있다. 유림해수욕장에서 등대에 이르는 1400m의 산책길은 특히 연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길이다. 까닭은 잘 모르겠지만 연인들이 껴안고 이 길을 걸으면 평생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백년해로를 한다는 것이다.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수월산의 호젓한 숲길을 따라 이국적인 등대에 이르면 멀리 백도군도까지 시야를 틔워준다는 관백정이 있으니, 그 드넓은 바다와 풍광을 보며 나눈 밀어와 언약이 각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 떨어진 백도는 39개의 무인군도로 형성되어 상백도, 하백도로 구분한다. 높고 낮은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모습들이 천태만상으로, 다양한 형상의 바위는 날씨와 시간, 보는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무쌍하여 ‘마법의 성’으로 불린다. 또 백도에는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를 비롯해 30여 종의 조류와 풍란, 석곡, 눈향나무 등 353종의 아열대식물들이 즐비하며, 큰붉은산호, 꽃산호, 해면 등 170여 종의 해양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섬 전체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일반인들의 입도를 금하고 있다. 그래서 해상에서 안타까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백도는 이 땅의 마지막 비경임에 틀림없다.

해녀섬, 그리고 우도팔경 우도등대

우도등대

우도등대

해녀섬으로 유명한 우도는 제주도에 딸린 섬이다. 우도란 명칭은 조선조 숙종 때 이곳에 목장이 설치된 것과 관련이 있다. 마침 섬의 생김새 역시 소가 누운 형상인지라 목장의 설치와 더불어 우도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제주도 북제주군 우도면이다. 우도에 처음 등대가 들어선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당시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본은 일본에서 청나라로 가는 항로를 조망하기 위해 화급하게 등간을 세우고 불을 밝혔다. 우도에 본격적인 등탑이 들어선 것은 그 이듬해인 1906년이었다. 2006년 5월 27일, 우도등대는 등대 백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열고, 점등 당시의 본래 등대, 즉 긴 나무기둥에 호롱불을 매단 등간과 자그마한 건물을 복원했다. 2003년 새 등탑이 들어서면서 그 임무를 마친 구 등탑은 현재 문화재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그와 함께 등대 아래 여유공간에 등대공원을 마련하고, 등대의 역사를 알려주는 세계 각국의 등대 모형을 곳곳에 설치, 한 자리에서 세계 등대여행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우도등대는 우도봉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어, 바다 건너 한라산의 사계와 성산일출봉 등 제주도의 동쪽 해안을 언제나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우도의 남쪽 해안에서 산책로를 따라 우도봉을 오르다 남쪽을 바라보면 성산일출봉이 바로 옆에서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마주하며, 서쪽으로는 우도 섬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우도에는 주간명월, 야항어범, 천진관야, 지두청사, 전포망도, 후해석벽, 동안경굴, 서빈백사 등 우도팔경이 있어 우도를 찾은 기쁨을 더하게 한다. 그동안 교통이 불편한 해녀섬 정도로만 알려진 우도는 성산항 간 차도선이 시간마다 운항하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마라도등대

마라도등대

제주도에서 우도등대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등대가 바로 마라도등대다. 마라도는 우리나라 최남단 섬으로서, 섬에는 최남단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해안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데 도보로 1시간 반이면 충분한데, 섬 가장자리의 가파른 절벽과 기암, 남대문이라고 불리는 해상터널, 해식동굴, 그리고 섬 전체를 덮고 있는 잔디가 이채롭다. 섬 곳곳에는 백년초라고 불리는 선인장이 자생하고 있다. 마라도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등대를 방문한다. 마라도등대는 마라도 동쪽 해안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등대 구내 역시 푸른 잔디로 조성되어 있어 개방시간 내에는 누구나 쉼터로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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