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드라마 ‘로스트’ 출연 김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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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은 어떠냐구요? 아휴, 싫어요 전 한국남자가 좋아요”

[정동초대석]美드라마 ‘로스트’ 출연 김윤진

배우 김윤진을 처음 만난 건 7~8년 전이다. 영화 ‘쉬리’나 ‘단적비연수’를 끝낸 직후였을 것이다. 당시 김윤진은 말이 없었다.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며 묻는 말에 작은 목소리로 답변하곤 했다. 왠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와 2007년 여름 다시 마주 앉았다. 6월 마지막 날이다.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고작 몇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사람을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에게 종전과는 사뭇 다른 무엇인가가 생겼다는 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감’일 것이다. 한국배우 최초로 할리우드 안착에 성공했다는 긍지 때문인지 그에게 광채가 났다. 그는 ABC 전속배우가 돼 미국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로스트(LOST)’에 출연 중이다.

그는 시종 밝고 여유 있는 표정과 꾸밈없는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런 모습에는 완숙미를 향해 달려가는 30대 중반 여우(女優)의 아름다움이 묻어났다. 그는 요즘 한국에 머물며 올 가을 개봉 예정인 한국영화 ‘세븐데이즈’(감독 원신연)를 촬영 중이다. 이 작품에서 유괴당한 딸을 구하기 위해 일주일 안에 사형수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 역을 맡고 있다.

“제가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 의심이 많아요. 감독님께도 수시로 ‘이게 맞아요?’라고 묻죠 . 엄마도, 변호사 경험도 없기 때문에, 만약 제 아이가 유괴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고민했거든요. 게다가 유괴사실을 감추기 위해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설정돼 있어 미치겠더라고요. 그러다 얼마 전 세트촬영에서 혼자 소리 지르면서 펑펑 우는 연기를 했어요. 그제야 제 안에 켜켜이 쌓여 있던 어떤 덩어리가 빠져나가는 후련함을 느꼈어요.”

미국 드라마 ‘로스트’는 비행기 사고로 외딴 무인도에 떨어진 48명 생존자의 행동과 심리를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고 있다. 이 작품에서 ‘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김윤진은 지하조직과 연계된 재벌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남편 ‘진’(대니얼 대 킴)과 한국인 부부로 나온다. 내년 초 방영하는 시즌 4의 내용을 김윤진은 알고 있을까.

“출연배우들도 그때그때 대본을 받아봐야 알아요. 그 대본도 몇 페이지 정도는 백지상태죠. 비밀 유지를 위해 해당 배우에게만 구두로 알려주거든요. 007시리즈처럼 보안이 철저해요. 저도 시즌4에서 우리를 구하러 올지 모르는 사람의 정체가 뭔지 몹시 궁금해요.”

김윤진은 얼마 전 자신의 할리우드 도전기를 담은 에세이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해냄)를 펴냈다. 출간 즉시 이 책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7전8기 불굴의 정신이 빚어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명언을 실천하듯, 김윤진은 당장의 달콤한 열매를 마다하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코 수그러들지 않는 도전의식을 그는 ‘성장배경’의 영향으로 돌렸다.

“전 늘 다른 사람에게 뒤처져 있다는 느낌으로 살아왔어요. 10살 때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한동안 벙어리 아닌 벙어리 신세로 지내야 했거든요. 영어를 못 했기 때문이죠. 그로부터 벗어나려면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어요. 평소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다른 친구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던 탓에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식을 뿌리 깊게 갖게 됐어요. 한국에서 ‘밀애’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직후 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도 혼자 가야 고생하고 또 그만큼 많은 것을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지요.” ‘고진감래(苦盡甘來)’는 김윤진을 위한 성어일 듯하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김윤진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전 세계 210개국에서 방영하는 ‘로스트’에 고국이 행여 잘못 비칠까 전전긍긍하니 말이다. ‘선’의 회상 신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바꾼 것이나 한국에 대한 묘사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달라며 줄기차게 요구한 사람도 그였다.

“해외에 나가 살면 다 애국자가 되게 마련인 것 같아요. 드라마 배경이 한국인데 조금이라도 잘못 표현돼 있으면 자꾸 얘기하게 되거든요. 공형진 선배도 제게 국가대표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라고 했어요. 제작진이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 크리스티나 킴이라는 이름의 한국계 작가도 고용했는데 작은 부분에서 자꾸 실수를 하는 것 같아요. 최근엔 차이나타운에 있는 작은 다리를 한강대교라면서 보여줘 국내 네티즌의 욕을 먹기도 했잖아요. 그래도 용서되는 이유는 전 세계에 소개되는 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로스트’ 작업을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할리우드 시스템은 분야별 전문성이다. 특히 전문화한 조연출 제도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김윤진은 “한국에서는 감독이 되기 위한 전 단계로 조연출 과정을 거치는 게 일반적인데, 할리우드에서 조연출은 감독과 무관한 별도의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촬영장에서는 감독이 현장 진행을 전담하잖아요. 모든 스태프가 감독에게 컨펌(확인)을 받다 보니 감독은 지칠 수밖에 없죠. 반면 할리우드에서는 감독이 연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전문화한 조연출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요. 조연출은 스케줄을 작성하고 안전상황을 점검하는 것과 같은 촬영을 위한 모든 상황을 체크하고 촬영 진행을 해요. 만약 날씨 관계 등으로 촬영이 힘든 상황이 오면 감독은 조연출과 상의하고 조연출의 판단에 따라 촬영 여부를 결정하죠. 미국에서 유명한 조연출은 감독보다 개런티가 비싸요.”

ABC 드라마 ‘로스트’ 의 대니얼 대 킴과 김윤진.

ABC 드라마 ‘로스트’ 의 대니얼 대 킴과 김윤진.

그는 이미 미국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뉴욕이나 LA를 다니다 보면 알아보며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유색인종에 대한 은근한 편견과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하는 스태프는 없지만 유색인종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은 뿌리 깊어요. 그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영화나 TV에서 많이 보여서 우리의 얼굴이 더 이상 이방인처럼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해요.”

연장선상에서 하루 빨리 한국감독과 배우들이 똘똘 뭉쳐 할리우드에서 저력을 뽐내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친다.

“중국 영화인들이 그들의 언어와 감성으로 할리우드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 듯이 우리도 할리우드의 제작비를 가지고 가장 한국적인 영화를 찍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와호장룡’으로 주윤발, 양자경이 스타덤에 올랐잖아요. 그러려면 한국의 감독도 할리우드에 빨리 진출해야 해요. 중국은 청룽(성룡)이 장쯔이를 끌어줬듯 서로 잘 뭉치는데 우리는 독립군과 같아요.”

할리우드 진출 후 한때 안면신경마비로 ‘죽고 싶을’ 정도의 큰 좌절감을 겪기도 한 그의 꿈은 진정한 ‘월드스타’가 되는 것이다. 그는 “지금은 언론에서 예쁘게 포장해준 이미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라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다고 월드스타가 되는 게 아니라 한국 하면 김윤진을 떠올리는 정도가 돼야 월드스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로스트’ 출연료로 회당 10만 달러(약 9200만 원. 이중 에이전트에 10%, 세금으로 40%를 낸다고 한다)를 받고 있지만 그가 목표하는 지점은 단순한 출연료 수준을 뛰어넘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가 가진 강점 중 하나는 ‘긍정적 마인드’다. 하루를 “오늘은 행복한 날이 될 거야”라는 자기암시로 시작한다거나 마음이 침울해질 때마다 자신이 수많은 사람의 갈채를 받는 모습을 상상하는 습관은 그를 지탱해주는 긍정의 힘이다.

그런 그는 요즘 부쩍 결혼을 소망한다. 직업적 성공과 결혼이 주는 행복을 동시에 이룬다는 것에 강한 불신감을 표시하는 여배우가 적지 않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지금 그가 꿈꾸는 배우자상은 ‘진실한 사람’이라고 한다.

“진실하게 저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또 목표가 뚜렷하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지금 사귀는 사람은 없지만 계속 결혼에 대한 자기암시를 하다 보면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외국인은 어떠냐구요? 아휴, 싫어요. 전 한국남자가 좋아요.”

‘로스트’는 시즌4부터 종전 24부작이 아닌 16부작으로 제작한다. 때문에 김윤진은 1년 중 6개월은 ‘로스트’ 촬영을 하는 대신 나머지 6개월은 미국 드라마를 제외한 다른 작품에 출연할 수 있다. 그는 “아직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어 우선적으로 이를 고려하겠지만 작품만 좋으면 한국드라마든 미국영화든 가리지 않고 출연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윤진은 8월 초 ‘로스트’ 시즌4 촬영을 위해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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