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선관위는 국민들께 침묵하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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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찬반금지’ 인터넷에도 동일 적용… 네티즌들 분노 반대 댓글 줄이어

선관위의 선거 180일 전 인터넷상 지지·반대 처벌 방침에 항의하는 네티즌들이 지난 6월 24일 과천 선관위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선관위의 선거 180일 전 인터넷상 지지·반대 처벌 방침에 항의하는 네티즌들이 지난 6월 24일 과천 선관위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선관위 검증하는 시민운동을 제안한다”, “차라리 대통령 선거 끝날 때까지 인터넷을 없애라”, “왜 유권자가 입을 닥쳐야 하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앙선관위)의 인터넷 게시판이 홍역을 치르고 있다. 2005년 개설한 선관위의 ‘나도 한마디’ 게시판에 오른 글은 2주 전만 하더라도 6000~7000건 정도. 그러나 불과 1주일 사이, 이곳에 오른 게시물은 2배를 넘어 1만6000여 건에 달한다. 대부분 게시물은 선관위를 비난하는 분노에 찬 네티즌 목소리. ‘칭찬합시다’게시판은 ‘나도 한마디’처럼 들끓진 않지만 최근 등록된 400여 건의 글 역시 선관위를 비꼬는 글 일색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순식간에 온라인 ‘핫이슈’로 떠올라

분노의 시작은 연합뉴스가 낸 짧은 기사였다. ‘내일부터 인터넷상 지지·반대 글 금지’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인터넷에 올리는 글이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금지 문서로 간주되는 만큼 유권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180일 금지규정을 어길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4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는 중앙선관위 관계자의 말도 전했다.
연합뉴스의 단신은 오보가 아니다.

현행 공직선거법의 93조1항은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하거나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 인사장, 벽보, 사진, 문서·도화 인쇄물이나 녹음·녹화테이프 기타 이와 유사한 것을 배부·첩부·살포·상영 또는 게시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법조항에는 인터넷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선관위는 지난 1월 “인터넷 UCC의 경우도 해당하는 판례가 있기 때문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며 ‘선거UCC지침’을 내놓았다.

네티즌의 반응은 뒤늦게 타올랐다. 기사는 순식간에 주요 포털에서 ‘가장 많이 읽은 기사’로 떠오르며, 수천여 개의 댓글과 블로거들의 ‘트랙백’(원격 댓글, 기사와 관련된 글을 자기의 블로그에 남기는 것을 말함)을 받았다. 오랜만에 정치관련 소식이, 찬반양론도 거의 없이 네티즌의 ‘공분’을 사는 ‘핫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 심각한 침해”

분노는 온라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지난 17일 오후 중앙선관위가 있는 과천 중앙청사 앞에는 ‘선거악법 개정’을 주장하는 40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이날 집회는 천정배 민생정치모임 팬클럽인 ‘희망천사’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르마’라는 닉네임으로 이 모임 사무일꾼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성남씨(40·서울 창동·자영업)는 “희망천사 회원들이 절반 정도였고, 선관위 게시판 등에서 보고 온 분들이 나머지 절반”이라고 전했다. 윤씨는 “정치 지향을 떠나 네티즌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안이기 때문에 다른 정치인 팬클럽과도 연대해 같이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야권 대선 주자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팬클럽인 ‘박사모’도 반대 입장으로 알려졌다. 정치인 팬클럽만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 보수인사인 지만원 박사 역시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직선거법 93조1항은 후보를 검증하지 않고 대통령을 뽑으라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지 박사는 “해당 법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좌익들이 만든 악법”이라고 주장했다. 근거는 무엇일까. 뉴스메이커의 취재에 응한 지 박사는 “만약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체를 국민들이 똑똑히 알았다면 과연 좌파를 뽑았을까 하는 뜻에서 좌익들이 만든 법이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남대문에서 물건을 사든, 국가가 무기를 구매하든 국민들이 알권리를 갖는 것은 당연한데 대통령을 뽑으면서 입을 막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고 반문하며 “잘못된 선거법 개정을 위해선 좌·우를 막론하고 함께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한 목소리를 내는 형국이다.

진보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논란이 된 21일 논평을 내고 “선관위 조치는 유권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것으로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참여연대는 온라인에서 선거UCC지침 철회 촉구 서명 및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헌법소원도 불사하겠다는 방침이다. 최재림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간사는 “93조1항에 원용해서 선거UCC지침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선관위의 운영기준과 잣대가 자의적일 수밖에 없어 결국 네티즌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여론조사기관인 메트릭스가 선관위 발표 전후 주요포털 정치게시판의 게시물을 조사한 결과, 약 1주일 사이에 전체 글이 약 25.2%, 잠재적 대선후보를 언급한 글이 74.4% 줄어드는 ‘자기검열 효과’를 불러온 것으로 나타났다.

왜 이런 논란이 일어난 걸까. 이지연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팀장은 정치권의 직무유기라고 말한다. 이 팀장은 “2002년 대선 때부터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사람들 중 인터넷 관련이 60% 이상”이라며 “당시부터 꾸준히 문제제기를 했지만 정치인들은 자신들 득표에 유리하냐 불리하냐에만 관심이 있지 유권자 중심의 선거법 개정은 관심 밖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관련 법개정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강창일 의원(무소속)이 대표 발의한 ‘공직선거법일부개정법률안’은 인터넷에서 선거운동 상시 허용을 핵심골자로 하고 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93조1항의 금지조항은 자연히 무력화된다. 강 의원실의 김천우 보좌관은 “선관위 쪽과도 검토협의를 마쳤고, 정치인 팬클럽도 이젠 여당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한나라당도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며 “다만 개정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시일이 걸리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일사천리로 통과된다 해도 법 시행까지 한 달 정도의 시일이 걸린다.

선관위 역시 법개정에 동의했으면서 엄격한 지침을 만든 이유가 뭘까. 17대 대선과 관련하여 지난 5월 말까지 중앙선관위가 각 인터넷 운영자에게 요구한 삭제 요청 건수는 1만8733건. 법개정 여하에 따라서는 국민 불신만 더하는 헛수고인 셈이다. 박기석 중앙선관위 사이버조사팀 담당은 “설령 법을 개정한다고 해도 어떤 방향으로 될지 아직 알 수 없다”며 “법집행기관인 선관위가 한 달이라도 본연의 임무를 방기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네티즌의 비난여론과 관련해 그는 “글 하나만 잘못 올려도 처벌받는 것 아니냐는 오해와 공포심에서 비롯한 것 같다”며 “또 선거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선관위 지침이 이미 1997년부터 헌법재판소나 판례 등을 통해 법적 근거를 확정한 만큼, 이제는 네티즌 스스로 자정노력을 벌여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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