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하 MBC뉴스데스크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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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징 멘트 고민에 새치 많이 늘었어요”

[정동초대석]김주하 MBC뉴스데스크 앵커

대학생이 가장 닮고 싶은 인물로 꼽히는 여성 앵커, 출산을 앞두고도 뉴스를 진행했던 최초의 여성 앵커, 출산 후 뉴스 단독 앵커로 컴백한 최초의 여자 앵커. 주인공은 여대생의 롤 모델 역할을 하고 있는 김주하(34)다.

지난해 5월 출산을 위해 육아휴직을 했고, 지난 3월 보도국 국제부로 복귀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결혼과 출산 때문에 뉴스데스크 앵커자리를 내놓았을 때, 복귀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MBC는 김주하라는 브랜드를 믿고 주말 뉴스데스크 여성 단독 앵커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김주하는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당당하게 앵커로 돌아왔다. 김주하는 또 다시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것이다.

“부담감은 당연히 있죠. 특히 선배들이 ‘네가 잘해야 후배들이 그 자리를 또 이어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 막중한 임무를 실감해요.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후배들에게 기회가 많이 생기느냐 줄어드느냐가 결정되잖아요. 지금은 잘해야 한다는 생각 뿐입니다.”

평일에는 문화부 기자로 현장에 나가고, 주말에는 뉴스데스크 앵커로 일하기 때문에 1주일 내내 강행군이다. 방송국에 복귀한 후에는 주5일제라는 단어가 기억에서 사라져버렸을 정도다. 특히 기자로서 리포팅을 하는 꼭지라도 맡으면 1주일 내내 긴장한 채 살아야 한다. 4분 프로그램을 위해서 섭외부터 편집까지 마치려면 2~3주 혹은 1개월 이상이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 단독 앵커를 맡았을 때는 매주 한 꼭지씩 리포팅했지만, 체력의 한계로 한 달에 두세 번으로 줄였다.

김주하가 바빠지면서 덩달아 힘들어진 사람은 가족이다. 지난 5월 돌을 맞은 아들 준서를 위해서 친정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평일에는 친정집에서 준서를 돌봐주고, 주일에는 남편 강필구씨가 엄마를 대신해 아이와 함께 보낸다. 매일 늦은 시간에 퇴근하기 때문에 준서를 보는 시간이 하루에 30분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준서는 김주하가 방송국에 복귀하는 첫날 나가지 말라는 투로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서 울었다. 그 어린아이마저 엄마가 일하러 나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마다 준서와 헤어지는 것에 가슴이 메이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웃으면서 출근한다. 워킹맘이라면 겪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이제는 살림꾼이 다 됐어요(웃음). 결혼할 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해준다고 약속은 했지만, 막상 1주일 내내 집안일을 못하니까 남편한테 미안해요. 남편이 대부분 이해해주는데, 그래도 아이에 대해서는 걱정이 많더라구요. 남편이 어느 날은 ‘네가 애한테 영향을 주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된다’고 말할 정도예요. 엄마의 부재감을 남편이 걱정하고 있는 거죠.”
남편과 아이, 그리고 친정 부모의 도움이 없으면 김주하 앵커의 성공적인 복귀는 힘들었을 것이다. 김주하의 당찬 모습 뒤에는 이런 아픔이 숨어 있다. 씩씩하게 웃지만, 아이가 생각나면 힘이 빠질 때도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 당당한 엄마로 남고 싶기에 아픔을 이겨내고 있다.

1997년 MBC 아나운서국에 입사했으니 올해로 10년째. 2004년 사내공모를 통해 보도국 사회부 기자로 옮겼고, 기자와 앵커라는 1인2역을 충실히 해냈다. 시청자들은 당당하고 빈틈없는 김주하의 모습에 큰 신뢰를 보냈다. 김주하가 단독 앵커를 맡는다고 했을 때 시청자들은 변함없이 그녀를 응원했다.

첫 방송이 나간 후 김주하는 시청자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사건 현장을 전하고, 마지막 클로징 멘트까지 했을 때 김주하는 그때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방송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은 힘들었지만, 막상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는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여성 단독 앵커로서 첫 발걸음을 가뿐하게 내디뎠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하나 있다. 클로징 멘트다.

[정동초대석]김주하 MBC뉴스데스크 앵커

“방송이 있는 날은 계속 클로징 멘트 때문에 고민해요. 엄(기영) 이사님과 함께 할 때는 서로 나눠서 하면 되니까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막상 혼자서 다 하려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클로징 멘트가 잘 나온 날은 몹시 기분이 좋고, 아닌 날은 하루 종일 시무룩하고. 제가 선배들에 비해 새치가 없는 편이었는데, 클로징 멘트 때문에 새치가 많이 늘었다니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클로징 멘트는 진성호와 골든로즈호 선박 충돌 뉴스를 전한 후였다. 사건 자체가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있었다. 선배들이 뉴스를 본 후에 “너 한 대 칠 것처럼 방송하더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5월 13일 김주하가 방송에서 했던 클로징 멘트는 “자동차 사고가 나도 신고를 하는 게 기본인데, 망망대해에서 배를 침몰시키고도 나 몰라라 하는 중국 선원들의 행태는 어이없다 못해 기가 막힙니다. 우리 선원들 꼭 살아 돌아와서 억울한 일을 해결했으면 합니다”였다. 나중에 뉴스를 모니터링할 때 카메라를 잡아먹듯이 쳐다보면서 클로징 멘트를 하는 모습에 자신도 놀랐다. 시청자들은 이렇게 똑 부러진 말을 하는 김주하의 당당함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김주하는 얼마 전 색다른 도전을 했다. 책을 쓰는 일이었다. 그동안 많은 출판사가 계약을 하자고 했지만, 그녀는 마흔 살이 넘은 후에 하기로 마음먹고 다 거절해왔다. 하지만 휴직기간 동안 그동안 방송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책으로 펴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출판사에서 그런 제의가 들어왔고, 덜컥 계약해버렸다.

“손(석희) 선배에게 책을 낸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뜯어 말리더라고요. 자신이 책을 쓸 때 너무 고생을 했다면서, 애까지 낳는데 어떻게 책을 쓰냐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출산 전까지 책을 대부분 쓸 줄 알았는데, 전혀 안 되던데요. 책 쓰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원래 계약날짜를 훌쩍 넘길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나온 책이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라는 에세이집이다. 10년 간 앵커와 기자활동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기록했다. 특히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방송 뒷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는 방송을 할 때도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어렵게 다가가는 것을 싫어해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쓰고 싶었죠. 그런데 막상 써보니까 처음에는 논문처럼 딱딱한 글이 나오는 거예요. 쉽게 고쳐 쓰느라 고생 좀 했어요.”

김주하가 방송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세 가지가 있다. 황우석 박사 사태, 2002년 한·일월드컵, 그리고 독도에서 방송했던 것이다. 에세이집에도 이 내용이 들어 있다. 특히 한·일월드컵 기간 중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제일 고생한 부분이 화장실이었다는 비밀(?)을 책에 털어놨다. 뉴스 진행은 경기장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했는데, 그런 곳에는 화장실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고. 함께 뉴스를 진행했던 엄기영 앵커는 쉽게 화장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화장실 대신 옥수수밭을 이용한 것이나, 사람들이 고생한다고 가져다준 수박을 화장실 갈 일이 걱정돼 먹지 못했다는 일화도 이번 책에서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황우석 박사 사태가 터졌을 때의 진행 상황과 말 못하는 심적 부담까지 담담하고 자세하게 기록했다. 국제전화로 당시 사람들에게 일일이 하나씩 확인해가면서 정리를 해나갔을 만큼 여전히 황우석 박사 사태는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김주하는 앵커로는 드물게 특종을 많이 낸 기자이기도 하다. 공항택시가 사람들 몰래 할증요금을 받았다는 것을 밝혀냈고, 2005년 텔레뱅킹의 보안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특종 보도했다. 특히 공항택시가 할증요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몫이 컸다는 것을 책에서 고백(?)했다.

“그때가 2005년 4월 5일 목요일이었어요. 그때까지는 식목일이 쉬는 날이라서 남편도 쉬려고 했는데, 제가 꼬셔서 함께 취재를 한 거죠. 4시간이면 끝난다고 남편을 끌고 나왔는데, 새벽 4시에 나가서 저녁 8시에 일이 끝났으니 얼마나 미안해요(웃음). 그래도 남편이 있어서 그 사건을 보도할 수 있었죠.”

이렇게 에세이집에는 방송의 뒷이야기가 생생히 적혀 있다. 또한 방송인이 되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도 많이 들어 있다.

방송 10년 동안 많은 것을 이뤄냈지만 그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한다. 몸에 밴 겸손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27살에 아침 뉴스를 처음 맡았을 때도 아버지는 “너무 빨리 맡게 된 것 같다”고 말하고, 단독 앵커를 맡은 소식에 “겸손해라”라는 이야기만 해주는 분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김주하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학생들이 닮고 싶은 사람으로 저를 말할 때 칭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김주하가 아닌 앵커자리에 앉은 김주하를 말하는 거잖아요.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또 다른 사람이 학생들의 롤 모델이 되겠죠. 그래서 그런 말에 만족하지 않아요. 앞으로 뉴스 하면 김주하가 떠오르는 앵커가 되고 싶어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죠.”

김주하에게 20년 후를 물어보자 그는 “그때도 MBC에 있을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만큼 방송을 사랑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언론인으로서 당당하게 인정받고 싶다는 말이 허튼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글·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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