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신문 가나이 다츠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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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기사 ‘매니페스토 보도’ 선구자

[사람@세상]도쿄신문 가나이 다츠키 기자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중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전에서 후보들이 텔레비전에서 몇 차례 토론하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국 신문들이 후보자들의 정책공약을 매우 자세하게 비교·보도한 것을 보았고, 2002년 일본에 돌아와 정치부 기자로 복귀한 후 ‘정권공약 보도(매니페스토 보도)’를 시작했습니다.”

도쿄신문 정치부의 가나이 다츠키(金井辰樹) 기자(44)는 일본 언론계에 ‘매니페스토 보도’를 도입해 정착시킨 인물이다. 가나이 기자는 최근 한국언론재단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해 매니페스토 보도가 정착되기까지 겪었던 어려움을 설명했다.
가나이 기자는 “정책 중심의 보도를 해야 한다”고 신문사 내부의 윗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직 시차 적응이 잘 안 됐구나” 하는 빈정거림을 들었다. 도쿄신문에서 총리 관저 출입기자의 팀장(캡틴)을 맡고 있는 가나이 기자는 “일본 언론계에는 ‘권력투쟁(권력쟁취)’을 보도하는 기자가 1류 기자이고, 정책보도 기자는 2류·3류 기자로 취급하는 문화가 있다”고 소개했다. 가나이 기자는 그러나 정책보도가 없이는 일본의 정치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믿었고, 정치 발전을 위해 반드시 매니페스토 보도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치 현 출신으로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가나이 기자는 “일본에서는 지반(선거구 출신), 간판(지명도), 가방(풍부한 자금)의 3개 항목을 갖춰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면서 이런 정치문화를 깬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고 밝혔다. 가나이 기자는 언론사 내부에서 “종래의 공약과 무엇이 다른가” “정책보도는 재미없지 않은가” “정책 본위의 선거가 가능할 리 없다”는 편견과 비판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는 비판론자들도 “정책 본위의 보도가 좋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을 기초로 신념을 갖고 ‘매니페스토 보도’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좋은 줄 알면서 왜 실행하지 않느냐”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흔히 알려지기를, 세계 각국 언론은 정치보도에서 정책보도는 심각하고 심층적이어서 재미 없고, 그 대신 누가 이기고 지는지 말하는 ‘경마식 보도’가 쉽고 재미있다며 이런 방식의 보도를 하고 있다.

가나이 기자는 일본에서 2003년 4월 통일지방선거를 시작으로, 같은해 11월 중의원(하원에 해당) 선거, 2004년 참의원(상원에 해당) 선거, 2005년 9월 중의원 선거, 2006년 자민당총재선거, 2007년 4월 통일지방선거 등 수차례 선거를 거치면서 매니페스토 보도를 정착시켰다. 매니페스토 보도를 시작한 2003년 4월 선거에서는 11개 현지사 선거에서 14명의 후보가 매니페스토를 제기했고, 6명의 매니페스토 지사가 탄생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가나가와현의 마츠자와 나리후미 지사가 이때 당선됐다.

가나이 기자는 매니페스토 보도를 하면서 정치인들이 내건 공약을 검증·평가하다가 본의 아니게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게 보도하게 되는 등 매니페스토 보도의 문제점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일본 언론에서 매니페스토 보도가 5년째 계속된 올해 현재 일본의 선거전은 ‘정권 투쟁’이 아니라 ‘정책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고 가나이 기자는 평가했다. 5년 전 “정책 위주의 보도가 가능할 리 없다”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요즘엔 “정책 중심의 선거로 바뀌고 있다”며 변화를 인정하고 있으며, 언론은 매니페스토 보도에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가나이와 함께 방한한 게이오 대학의 매니페스토연구회 대표인 소네 야스노리(曾根泰敎) 교수는 최근 마이니치신문의 보도를 인용해 “유권자의 70%가량이 매니페스토를 읽은 뒤 투표장에 간다”고 밝혔다. 가나이 기자와 소네 교수는 “이제 매니페스토 선거와 매니페스토 보도가 대체로 자리잡았다”고 평가했다.

가나이 기자의 매니페스토 보도는 언론이 어떻게 정치를 보도하느냐에 따라 정치문화가 근본적으로 변모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다. 가나이 기자는 “올 연말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정책 중심의 뜻있는 선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가나이 기자가 매니페스토를 ‘정권공약’으로 번역하자 이후 이 표현은 일본에서 정착했다. 현재 와세다 대학 매니페스토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도 활동 중인 가나이 기자는 매니페스토 보급 활동도 열심히 펼치고 있다. 그의 저서 ‘매니페스토의 탄생’은 한국어로도 번역·출판됐다.

설원태〈편집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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