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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소원은 우리나라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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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소망성결교회 원승재 담임목사 끊임없는 나라사랑 목회 펼쳐

원승재 목사는 평생 나라사랑을 몸소 실천해왔다.

원승재 목사는 평생 나라사랑을 몸소 실천해왔다.

버지니아 공대 참사로 온 국민이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부산역 광장에서도 작은 추모행사가 열렸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게양하고 추모기도회를 하며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부상자들의 쾌유를 빌었다. 이 뜻깊은 추모행사를 준비한 사람은 작은 교회의 한 목사와 신도 10여 명이었다. 부산소망성결교회 원승재 목사와 신도들이 그 주인공.

원 목사의 활동상을 듣고 있자면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가 떠오른다. 나라가 기근으로 어려울 때, 기도로 비구름을 불러 위기상황을 극복했던 성경의 대표적인 선지자이자 예언자 엘리야.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달란트는 국가를 위한 삶”이라고 말하는 원승재 목사는 남다른 애국심으로 국가적 위기상황이나 규모 있는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 변하지 않는 믿음과 열정으로 60여 년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자비로 한국참전용사 초청 행사

그의 나라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은 1999년 전 세계 한국참전용사협회회장 20명을 초청해 한국에서 가졌던 15일간의 행사다. 당시 IMF 외환위기로 국가 최대 위기를 맞았던 모든 국민에게 힘을 주기 위해 그는 1년여에 걸쳐 자비로 이 일을 준비했다. “미군부대에서 초콜릿을 얻어먹고 군대 ‘짬밥’을 가져다 나눠먹던 시절을 생각하면 외환위기 극복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당시 절망에 빠져 있던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행사를 시작했다. 그의 초청을 받아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터키, 인도 등에서 온 참전용사들은 보름 동안 유엔묘지, 계룡대 육군본부, 국회의사당, 판문점 등을 방문하며 자국에서 가져온 ‘평화의 돌’을 전달했다.

특히 부산 주례보훈병원을 방문했을 때는 입원해 있던 한국군 장병들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서로 국적이 다르고 세월도 많이 지났지만 슬픔을 함께 나눈 동지애는 여전했다. 이들은 강연을 하면서 전쟁체험담을 들려주었으며, 보훈병원 관계자들은 “지금까지의 어떤 위로행사보다 감동적이었고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며 “한국을 다시 방문한다면 꼭 이곳을 잊지 말고 찾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현재 미국 한국참전용사협회 회장인 Harley J. Coon은 한국땅을 다시 밟은 것에 대한 남다른 마음을 전했다.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중 1950년 중공군 포로가 되었던 그는 33개월 동안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옥수수알 15개씩을 한 끼 식사로 받았을 정도로 힘든 생활을 견딘 그는 1953년 포로교환 때 2700명 중 생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계룡대 간담회에서 애국가를 선창한 노르웨이인 Nils Steen Egelien은 서툰 한국어를 자랑했다. 노르웨이에서 명예교사를 하며 한국전 참전 당시 배웠던 아리랑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단다. 또한 판문점 포로교환 인솔장교 인도인 Balraj Sur는 자신이 입었던 군복을 육군본부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며 열렬히 싸운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라며 “이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고, 한국 기업들 또한 외국과의 교역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유엔참전용사 3000여 명을 선양하고 있다.

원 목사의 나라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태풍 매미가 우리나라를 강타했을 때 이재민 구호와 시설복구에 발벗고 나서 많은 이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1993년 구포역 열차사고 때는 생존자 30여 명을 구출하기도 했다. 또한 2002년 중국 국제민항기추락사고가 일어났을 때는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10시간이 넘도록 구조대원들과 함께 산 정상과 아래를 수도 없이 오가며 사망자들을 안치했다.

국가유공자 복지증진 공로 표창

쓰나미가 동남아시아를 강타했던 2005년에는 직접 스리랑카에 가 현지 아이들이 쓰나미의 참상에 대해 표현한 글과 그림을 가져와 전시했다. 이를 본 부산 감천동의 옥천초등학교에서는 각종 옷가지와 학용품, 신발, 축구공 등 구호품을 모았고, 그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해 고사리 손으로 직접 쓴 편지와 함께 실어 보냈다.

전 세계에서 온 참전용사들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현장인 ‘돌아오지 않는 다리’ 를 다시 밟았다.

전 세계에서 온 참전용사들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현장인 ‘돌아오지 않는 다리’ 를 다시 밟았다.

뿐만 아니라 APEC, 아시안게임, 월드컵 등 국제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 도하 아시안게임 때는 직접 도하로 건너가 선수들을 격려하고 기도하기도 했다.

그는 1983년 다대포에 침투했던 무장간첩단 전충남·이상규를 생포하는 데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교도소 교화위원으로도 활동한 그는 1996년도에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으며, 작년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 복지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하기 힘든 일들을 이렇듯 작은 개척교회의 목사가 감당하고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사명감과 굳건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현재 그의 활동을 뒷받침해주는 사람은 그의 가족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가족에게 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비전이고 꿈이며 희망입니다. 나라가 어렵고 힘들 때,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의 힘을 모아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제 사역은 공식적으로 10년 후 끝나지만, 한국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통일을 이룰 때까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원승재 목사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아내 미재,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고귀함을 느낍니다. 무거운 짐을 말없이 홀로 감당해나가며 굳건하게 남편을 지켜주는 당신을 볼 때마다 힘이 생깁니다. 견디기 힘든 형편들이 우리를 조여올 때면 밤을 지새워가며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로 헤쳐나가는 당신. 그런 모습을 보면 ‘정신차려야지’ 하면서도 또 일을 저지르고는 했습니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통장을 한 움큼 들고 이 은행 저 은행으로 뛰어다니던 당신. 일처리를 하고 와서는 ‘나는 개띠도 아닌데 왜 이렇게 헐떡여야 하지?’라며 나를 웃게 만들던 당신. 당신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큰딸 은영아, 어려운 개척교회에서도 아빠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돕느라 제일 수고가 많았지? 우리 예쁜 은영이,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있을거야. 주 안에서 항상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고, 늘 기도하는 딸이 되길 바란다.

든든한 아들 종훈이. 아빠를 제일 믿어주었던 사람이 너라는 거 잘 알고 있다. 종훈이도 커서 이제 아빠 가슴보다 더 넓어졌겠구나. 가슴을 펴서 종훈이를 안아보고 싶다.

나의 영원한 팬, 막내딸 은혜야. 항상 “아빠 말씀 들어서 손해본 일 없어” 하며 아빠를 따라주는 우리 막둥이 사랑한다. 날마다 교회에서 아빠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몹시 예쁘고 고맙다.

30년이란 세월을 돌아보니 고생으로 바빴던 시간들뿐이구나. 너희에게 너무 미안하다. 이제 아빠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더 깊은 기도와 말씀으로 내실을 기하며 가정과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큰 축복을 받으려고 한다. 앞으로 우리 함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나되는 감격의 일들만 생기길 기도하자.

<부산·울산·경남본부|조현진 기자 jh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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