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카멜레온 노무현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한·미FTA 타결로 보수본색 드러내… 진보진영 “루비콘강 건넜다” 비판

[커버스토리]카멜레온 노무현

新자유주의자로 돌아선 노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도가 30%를 훌쩍 넘었다. 보수언론의 ‘노비어천가’와 줄잇는 칭찬릴레이. 박근혜 전 대표도 “높이 평가한다”며 극찬. 신진보냐, 신보수냐 논란을 부른 노 대통령. 그의 FTA드라이브 종착역은 어딜까?

4월 2일 밤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TV 앞에 섰다. 개헌추진과 관련, 한나라당 등과 가시돋친 설전을 벌인 지 한 달여 만이다. 이날 낮 타결된 한·미FTA를 국민에게 ‘보고’하는 자리였다. 노 대통령은 “개인으로서는 아무런 이득도 없으며 오로지 소신과 양심을 갖고 내린 결단”이라고 한·미FTA 타결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그러나 정치적 이득은 기대 이상이었다. 주요 신문·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절반이 협상결과에 만족한다는 답변을 했으며,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도 평균 10% 이상 대폭 상승, 30%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하나 특이한 현상.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보수세력이 ‘화끈하게’ 밀어주고 나섰다. 이들은 세간에 ‘모든 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다. 불과 두 달 전, 노 대통령의 ‘개헌’ 대국민담화에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고 독설을 내뱉었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국익 차원에서 노 대통령의 결단을 높이 평가한다”고 기꺼이 칭찬했다. ‘FTA 리더십’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노 대통령을 극찬한 동아일보의 3일자 사설은 거의 ‘노비어천가’다. 동아일보는 “지지층은 물론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과 당원들, 심지어는 자신의 참모까지 반대했지만 노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았다”며 한·미FTA 타결을 ‘새마을운동과 서울올림픽에 맞먹는 건국 후 최대 치적’이라고 추켜올렸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청와대는 ‘시차적응’을 못하는 분위기였다.

2002년 11월 13일,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열린 ‘우리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 에 참석한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연설 도중 농민이 던진 달걀에 맞고 있다. <주·월간 사진공동취재단>

2002년 11월 13일,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열린 ‘우리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 에 참석한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연설 도중 농민이 던진 달걀에 맞고 있다. <주·월간 사진공동취재단>

양극화 주장하는 FTA 반대론자는 누구

2일 담화에서 노 대통령은 ‘FTA는 정치와 이념문제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막연하게 양극화만 주장하는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정치적 비난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를 떠난 정태인 전 비서관은 물론, 졸속협상 저지를 외치고 있는 진보진영과 협상중단 단식농성을 벌인 전·현 열린우리당 의원들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과 ‘FTA 반대론자들’이 처음부터 등을 돌렸던 것은 아니다.

“농민들의 무너지는 가슴을 이해한다. 송구스럽다.” (2002년 11월)
“염치도 없다. 한·미FTA 하면 또 돈 내놓으라고 하고, 한·중 하면 또 내놓으라고 하고….” (2007년 3월)

2002년 11월, 삭풍이 몰아치는 여의도 둔치에 선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농민들로부터 계란을 맞는 수모를 당했다. ‘송구스럽다’는 인사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개최한 ‘우리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 자리였다. 집권당의 실패한 농정에 대한 ‘야유’였지만, 한편에서는 상반된 목소리도 들렸다. “걔 중엔 그래도 노 후보가 제일 낫지 않나….” ‘노무현 만세’를 외치는 농민대회 참가자도 보였다.

그로부터 5년 후. 4월 20일 서울 양재동AT센터에서 열린 ‘농·어업인 정책 업무보고’에 참석한 대통령의 ‘염치발언’은 농민들을 격앙시켰다. 전농 등이 참여한 한·미FTA 농축수산비상대책위는 이튿날 즉각 성명을 내고 “농민들의 반대의견을 ‘구걸하여 돈을 얻기 위한 행위’로 치부했다”며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지난 5년 사이, 노무현 대통령의 현실인식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진보관’이 변했다고 당당히 밝힌다.

지난 2월 그는 ‘대한민국 진보,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청와대 브리핑에 기고했다. 그는 “진보진영은 개방을 할 때마다 ‘개방으로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우리 경제는 모든 개방을 성공으로 기록하며 발전을 계속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하면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채택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며 ‘유연한 진보’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교조적 진보’에 대응한 참여정부의 노선이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토론을 선호한다. 글에서도 노 대통령은 “나는 논리를 좋아하며, 더욱이 체계적으로 정연한 논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그러나 논리에 빠져 현실에 맹목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해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실제 노 대통령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토론을 즐긴다. 질문순서 등 사전 각본을 깨고 말단부터 고위 공무원까지 격의없는 토론을 주도한다. ‘대한민국 진보…’ 기고에서도 “(노무현이)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서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며 ‘진보진영의 한 학자’를 거론해 비난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신진보론’에 대한 진보진영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신문지상을 통해 학계의 진보논쟁이 촉발되었지만 노 대통령의 ‘고언’은 반비판의 대상일 뿐 논외로 치부됐다. 진보진영은 한·미FTA타결로 노 대통령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보고 있다.

3월 30일 밤 서울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한·미FTA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윤중 기자>

3월 30일 밤 서울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한·미FTA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윤중 기자>

교조적 진보 맞선 유연한 진보?

300여 개 진보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는 한·미FTA 저지운동의 중심에 있는 단체다. 이 단체의 박석운 집행위원장은 “과거 우리는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상부구조는 정치·사회적으로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정권으로 판단했다”며 “하지만 한·미FTA의 추진과정에서 참여정부는 매우 과격한 형태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정책을 강행했고, 또한 자유주의적 개혁에 역행하여 군사독재 시절과 유사한 행태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자유주의적 개혁을 포기하고 ‘막가파 신자유주의’로 갔다는 힐난이다. 그는 “신자유주의는 진보가 아니다”고 단언하고 “노 대통령이 진보 운운하는 것은 참칭이자 착각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의 인식도 비슷하다. ‘낯선 식민지, 한·미FTA’라는 책을 펴낸 이 교수는 한·미FTA 저지운동 진영의 대표적 논객이다. 이 교수는 “한·미FTA가 체결된 날 밤, TV로 중계되는 노 대통령의 담화를 보면서 ‘저 양반이 보고를 제대로 받고 있나’는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미FTA를 통해서 진보진영과 노무현 정권은 최종 결별의 수순으로 갔다”며 “이 참에 시민사회도 자기반성, 입장정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세력의 반농민 캠페인에 중산층 정서에 기반하고 있는 노 대통령이 말려 들어갔다는 판단이다. 이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평등주의적(egalitarian) 전통에 기반한 ‘반기업정서’와는 또 달리, ‘반농정서’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국민전략’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농민을 국민으로부터 분리시켜 ‘왕따’시키는 전략이라는 것. 이 교수는 “반농 캠페인의 결과는 너무나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분석은 다르다. 일관된 노 대통령의 이념적 지표는 실용적 진보주의와 사회적 약자 보호였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실용전략이었다는 것. 김 교수는 “그러나 국정을 운영하다보니 국가정책이 본인이 생각한 것처럼 진보드라이브를 걸기는 어려웠고, 결과적으로 그의 노선은 보수적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에 기울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노 대통령의 말은 본인 스스로 가장 정확하게 ‘커밍아웃’한 것이었다”라며 “‘신자유주의’는 정책적 방향이고, ‘좌파’는 노 대통령 스스로 지키고 싶었던 마음속의 가치”라고 풀이했다.

7년 만에 거리농성 나선 참여연대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사회적 약자 보호로 이어질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김 교수는 “노 정권의 목표는 개방을 통해 경제와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며, 노 대통령은 그것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그러나 한·미FTA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노 대통령 본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진보단체들은 한·미FTA와 관련, 체결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운동까지 거론하고 있다. 대표적 진보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3월 21일 회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은 상징적이다. 이 단체는 ‘한·미FTA의 졸속타결을 막기 위한 의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임원과 활동가들이 거리농성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참여연대가 거리에 나선 건 노 대통령 탄핵 후 3년 만이며, 거리농성은 2000년 낙선운동 이래 7년 만의 일이다. 참여연대는 타결 직후 “국민의 민주적 선택권을 박탈한 ‘통상쿠데타’”로 한·미FTA의 성격을 규정했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민주화의 진전이 있었다고는 하나, 정치시스템의 민주화와 이해충돌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정권의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다”며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나 한·미FTA와 같은 사안에서 노 정권은 국민적 동의와 같은 민주적 절차는 무시하고 돌진해도 무방하다는 사고를 보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로 규정할 만하다”고 말했다. 한·미FTA를 두고 벌어진 논란이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1990년대 초반 대학생활을 경험한 진보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로 이뤄진 ‘시민사회청년활동가모임’의 안진걸 총무는 “지금까지 ‘그 사람’을 개혁적인 인물로 오해했다. 독설과 권위주의로 가득 찬 사람을 서민지향적이고 탈권위주의적인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만약 노 대통령이 좌파나 진보에 대한 지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시끄럽더라도 집회를 허용하고, 한·미FTA의 문제점을 알리는 방송 광고를 막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노 대통령 앞으로 ‘한나라당 입당원서’를 보내는 일을 준비 중이다.

한·미FTA, 찬반 문제가 아니다

진보진영은 노무현 대통령이 ‘FTA 반대입장은 근거도 없는 사실, 논리도 없는 주장, 과장된 논리’라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한·미FTA 반대 주장엔 원칙적 반대론도 있겠지만, 졸속으로 추진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섞여 있다”며 “FTA 추진을 두고 진보진영과 등을 돌렸냐 아니면 같이 갈 거냐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은 절차상으로 국민과의 소통이 충분했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비판론자들이 명확한 데이터나 증거 없이 주장한다고 하는데, 정교한 데이터에 근거해 홍보하지 않은 것은 정부도 마찬가지”라며 “추진과정에서 노 대통령을 둘러싼 관료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FTA 추진론자들이 주도하는 통상관료들에 둘러싸여 정책결정에서 찬반논리가 반영되는 시스템이 없었다는 지적이다.

이해영 교수도 “FTA를 놓고 찬성이냐 반대냐는 물음은 성립하지 않는다”며 “우리가 묻는 것은 어떤 FTA냐는 것이며, 미국형 FTA 논리를 문제삼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한편으로 FTA대연정 또는 노 대통령 자신이 언급한 ‘유연한 진보’에 조응하는 신진보세력 형성 예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북핵문제나 남북정상회담 등 ‘다음 일’의 성사 여부에 따라 범여권 진영의 대선후보 결정 등에 향후 정치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대연정-신진보’론의 근거는 협상타결 직후 큰 폭으로 오른 국민지지도다.

FTA대연정·신진보는 없다

정치적 해석에 먼저 선을 긋고 나선 곳은 청와대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4월 4일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지지층에 등을 돌리고 보수세력과 손잡았다’는 것은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는 청와대의 노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왜곡하는 것”이라며 ‘FTA대연정’을 부인했다.

그러나 진보진영은 노 정권의 ‘원칙과 소신’에 대해 회의적이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흔히 사례로 예시되는 교육 3불정책이나 대북·부동산 정책 등을 보면 과연 그 정책들을 ‘신진보’로 묶어 부를 수 있는지 회의적이다”며 “부동산 문제만 보더라도 저항이 거세다보니 입장이 두세 차례 바뀌면서 어설픈 정책이 나온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덧붙여 그는 “당장 비전2030과 이번에 타결된 한·미FTA의 내용에서 발생하는 불일치를 어떻게 해결할지 알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수사 차원에서 쏟아낸 말과 실제 정책 집행과정에 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해영 교수는 “제대로 된 정책 없이 당선된 뒤 보호주의를 내걸다 중상주의, 다시 터무니없는 자유무역으로 오락가락한 것이 노 정권의 통상정책”이라며 “유권자들도 이번 기회에 사회정책에 대한 감성적 접근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관련기사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