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우리 부부, 문화예술계 별종이래요”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2007 세계도자비엔날레 총감독 천호선·2006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김홍희씨

[문화]“우리 부부, 문화예술계 별종이래요”

이 부부, 참 안 닮았다. 둥글둥글하고 서글서글한 얼굴의 천호선(64) 쌈지길 대표와 갸름하고 세련된 용모의 김홍희(59) 경기도미술관장. 외관상으로는 다소 부조화한 인상을 주지만 이들만큼 찰떡궁합인 부부도 드물 것 같다. 오죽하면 미술계에서 이 부부를 가리켜 ‘변태부부’라고 부를까.

오해하지는 마시길. ‘변태부부’는 ‘닭살 커플’보다 더한 금슬을 뽐낸다고 해서 붙은 애칭이니까. 워낙 개성 강한 이들이 많아 이혼 등 불화가 잦은 미술계에서 변함없는 사랑을 지켜가는 이들 부부가 오히려 ‘별종’처럼 튀어보였던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은 여러 모로 닮았다. 부부가 함께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남편 천호선 대표가 올 4월28일 개막하는 ‘2007 제4회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의 총감독을, 아내 김홍희 관장이 한 해 앞서 ‘2006 광주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아 부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적 미술 축제를 이끈 것도 그렇다. 게다가 김홍희 관장이 현재 경기도미술관을 책임지고 있으니 두 사람 다 경기도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1984년 백남준 한국에 전격 소개

“아내는 제게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예요. 같은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수시로 조언을 주고받지요. 제가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해 행정적인 면이나 공무원들을 대하는 요령 등에 대해 아내에게 조언을 할 수 있고, 저는 미술이론가인 아내로부터 예술적인 부분에 대한 도움말을 들을 수 있거든요.”(천호선)

“천호선씨는 행정적인 경험뿐 아니라 쌈지길을 운영하면서 마케팅에 대한 자신만의 비결도 축적하고 있어요. 또 도자에 대한 눈도 가지고 있지요. 이번에 광주 도자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임명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일 거예요. 전 남편 덕분에 일반적으로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며 겪게 되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어요. 제가 좌절할 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사람도 천호선씨예요.”(김홍희)

천 대표가 운영하는 인사동 쌈지길 옥상에서.

천 대표가 운영하는 인사동 쌈지길 옥상에서.

천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8년부터 1979년 4월까지 대통령비서실 외무담당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그 와중에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카터 정부와 심한 외교적 갈등을 겪었고, 이를 문화외교로 전환하는 차원에서 뉴욕에 한국문화원을 설립했다. 천 대표는 1979년 4월 뉴욕주재 총영사관 한국문화원 창립 일원(문정관)으로 파견됐다. 이 일은 동양화를 수집하는 등 평소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컸던 천 대표의 인생 목표와 삶의 방향을 크게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뉴욕으로 가면서 죽을 때까지 문화예술 행정만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문화예술이야말로 한 나라를 떠받치는 주춧돌이잖아요. 세계 미술과 문화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많은 화가들과 사귀면서 이 같은 의식이 더욱 확고해졌어요. 뉴욕의 저희 집은 항상 작가들이 들끓었고, 아예 저희 집에서 재미작가 전시회를 열기도 했어요.”(천호선)

김홍희 관장이 미술에 입문한 것도 이때다. 나이 서른에 남편을 따라 뉴욕에 머물게 된 김 관장은 그곳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뉴욕에 둥지를 튼 이듬해부터 미술사 공부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15년간 미국과 덴마크, 캐나다, 한국을 오가며 학업에 매진했다. 전공은 비디오아트와 페미니즘 미술. 뉴욕에서 만난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 고(故) 백남준의 영향에서다.

“뉴욕생활이 시작되면서 제가 얼마나 현대미술에 무지한지를 깨달았어요. 영어도 배울 겸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죠. 하지만 공부가 순조롭지는 않았어요. 석사 10년, 박사 5년의 과정 동안 좌절도 많이 했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백남준 미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페미니즘미술도 주변부 학문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분야에 뛰어든 결과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저를 찾는 분들이 많아요.”(김홍희)

두 사람이 백남준과 우여곡절 끝에 맺은 인연은 백남준이 세상을 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천 대표는 “당시 백남준씨는 한국인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며 “자신이 예술가로서 정상의 위치에 선 후에 한국인을 만나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남편 쌈지길 대표, 아내는 미술관장

“포스트모더니즘 무용가인 멀스 커닝햄의 후원회 회장과 동반해서야 백남준씨를 만날 수 있었어요. 마침 천호선씨가 백남준씨의 경기고 10년 후배인데다 문화적 견해가 여느 공무원과 다르다고 판단하셨는지 이후 저희를 많이 아껴주셨죠. 전 백남준씨를 통해 미술사의 방향을 잡게 된 거예요.”(김홍희)

백남준을 한국에 알린 사람도 천 대표다. 백남준은 1984년 전 세계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야심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방영했다. 방영 직전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천 대표는 백남준을 이원홍 장관과 연결함으로써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한국에서는 KBS가 주관하도록 주선했다. 이 방송을 계기로 한국인들은 백남준이 얼마나 천재적 예술가인지를 확인하며 같은 한국인으로서 긍지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월 스페인에서 열린 ‘아르코 아트페어’에서는 특히 ‘백남준의 한국비전’전이 주목을 끌었는데 이를 기획한 주인공도 김홍희 관장이다. 부부는 백남준미술관 건립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현재 경기도 용인에 건립 중인 백남준미술관은 이르면 내년 1월 고인의 2주기에 맞춰 완공될 예정이다.

부부는 2년째 주말부부로 살고 있다. 지난해에는 광주비엔날레 관계로 아내가 광주의 아파트에 머물렀고, 지금은 남편이 도자비엔날레를 준비하느라 경기도 이천에 원룸을 얻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도자로 된 자기 밥그릇과 찻잔이 지정돼 있고 성인이 되어서는 자기 미적 감각에 따라 밥그릇과 찻잔을 사도록 하는 일본처럼 우리나라도 도자문화를 발전시키려면 어린시절부터 도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인지를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 대표는 또 “작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이 가미된 다양한 디자인을 도자기에 새겨넣으면 좀더 대중과 친숙해지고 세계적 경쟁력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홍희 관장의 꿈은 경기도미술관을 지역미술관을 뛰어넘어 세계적 명소로 만드는 것이다. 김 관장은 “도립미술관이나 시립미술관은 지역 작가 위주의 동네문화기구의 역할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은 현실에서 경기도미술관은 외국 미술관과의 교류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으로 거듭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두 사람은 내년 ‘38년 광땡 파티’를 할 계획이다. 결혼한 지 38주년이자 김홍희 관장이 환갑을 맞는 해이기 때문이다. 천 대표는 “특별한 파티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두 사람이 마주보며 웃는 얼굴에는 행복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