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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아빠의 양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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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많은 ‘독수리아빠’는 훨훨… 가난한 ‘펭귄아빠’는 발동동

[커버스토리]기러기아빠의 양극화

‘기러기아빠’들이 늘어나면서 이들 사이에도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탄탄한 재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 수시로 외국으로 나가 가족과 상봉하는 ‘독수리아빠’가 있는 반면, 경제적·시간적 궁핍으로 그리운 가족을 못 만나는 ‘펭귄아빠’도 존재한다. 즐거운 명절을 앞두고 외로운 기러기아빠들의 초상은 어떤 모습일까

‘민족 대이동’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전국 각지에서 고향과 가족의 훈훈한 정을 찾아 가는 설날. 하지만 날개가 있어도 가족 곁에 날아가지 못하고 자동차로 한두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고향집에 안 가고 좁은 방에서 쓸쓸하고 우울한 명절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전세계에서 대한민국에만 산다는 조류 인간, 기러기아빠들이다.

자녀의 교육을 목적으로 부인과 아이들을 외국으로 떠나 보내고 홀로 한국에 남아 뒷바라지하는 ‘기러기아빠’는 이제 보편화되고 속어사전에도 올랐으며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이 ‘Gireugi’라는 용어로 대서특필할 만큼 외국에서도 집중조명되고 있다. 2007년 현재 18만~20만 명으로 추산되는 기러기아빠들도 재력과 형편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명절이나 휴가철 등 1년에 한두 번 외국에 머무는 가족과 상봉하는 이들은 원조 기러기 아빠. 그리고 탄탄한 재력과 비교적 여유있는 직업 덕분에 마음 내키거나 시간날 때면 수시로 외국을 드나들고 가족들도 방학 때마다 불러들이는 이들은 훨훨 나는 독수리 아빠라고 불린다. 반면 한국에서 뼈가 빠지게 일해 송금하느라 정작 자신은 가족들이 사는 외국에 갈 비행기삯이 없거나 직장에 얽매여 시간도 못 내는 이들을 펭귄아빠라고 칭한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오지도 가지도 못한 채 생이별을 하고, 돈이 없어 정작 자신은 비행기를 못 타고 공항에서 손만 흔드는 모습을 뒤뚱뒤뚱 걸을 뿐 날 수 없는 펭귄의 처지에 빗대 나온 신조어다.

기러기아빠의 원조는 1960~1970년대 해외건설붐을 타고 가족을 떠나 홀로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일을 하던 산업전사들이다. 가수 이미자씨가 애절한 목소리로 불렀던 ‘기러기아빠’를 떠올리면 된다. 기러기는 평생 일부일처로 지내고 뜨거운 부부애가 특징이어서 결혼식의 예패로 쓰이며 암수 중 한 놈이 먼저 죽으면 짝 잃은 놈이 구슬피 울며 갈대숲을 서성인다. 항상 같이 있어야 행복한데 한쪽이 떨어져 있는 안타까움이 커서 남아 있는 아빠를 ‘기러기 아빠’로 부르기 시작한 것. 이들이 이제 국제화시대, 영어가 필수생존품 시대로 변하면서 거꾸로 본인은 한국에 혼자 머물고 가족을 외국으로 보낸 기러기아빠로 변신했다.

“기러기아빠 건강 팔아 자식 교육”

5~6년 전만 해도 외국에서 공부하다 혼자 돌아온 대학교수, 대기업 주재원 등이나 서울 강남의 부유층이 주류를 이뤘으나 이제는 오히려 한국에서의 과외비 등 사교육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 차라리 교육비가 덜 드는 필리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그리고 차이나신드롬과 함께 비교적 가까운 중국에 조기유학을 보내는 사례가 늘면서 평범한 샐러리맨이나 변방사람들도 기러기아빠 대열에 동참했다. 여기에 외국이 아니라 자녀를 아내와 함께 서울에 유학 보내고 시골에서 홀로 농사지어 돈을 보내거나, 관공서나 회사의 지방발령 등으로 혼자 지방에 내려가 사는 아버지들도 ‘로컬 기러기족’으로 그 세를 확장하고 있다.

아내와 자녀를 떠나보낸 후 외로움과 경제적 어려움에 지친 한 펭귄아빠의 뒷모습. <경향신문>

아내와 자녀를 떠나보낸 후 외로움과 경제적 어려움에 지친 한 펭귄아빠의 뒷모습. <경향신문>

건물임대업을 하는 장도영씨는 독수리아빠다. 서울 강남 요지에 건물을 여러 채 갖고 있는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5년 전 미국으로 보냈다. 해외부동산 투자가 자유로워지면서 뉴저지에 아름다운 저택도 장만했고, 아내가 타는 차는 벤츠. 시간날 때마다 미국으로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들들과 아내는 방학 때면 귀국해 서울에서 생활한다. 자주 만나기 때문에 특별히 외롭다거나 서먹한 느낌도 없다.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인적자원, 즉 네트워킹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지금은 외국에서 공부하더라도 초·중학교 동창들과 계속 인연을 맺으라고 했어요.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계속 살지, 한국에 돌아와 일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어두는 게 중요하니까요. 한달에 1000만 원 정도를 보내는데 아이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가장 확실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명문대학을 못 나오고 맨몸으로 어렵게 돈을 벌어서 제 아들들만큼은 고생시키지 않고 버젓한 타이틀을 따주겠다는 보상심리도 있어요.”

스스로 ‘펭귄족’이라고 소개하는 김동현씨는 모 기업 차장. 초·중학생 남매와 아내를 호주에 보내고 혼자 7평 오피스텔에서 생활한다. 직장 생활도 바쁘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송금하기 위해 부업으로 번역을 하고 있어 만성피로에 시달린다. 올 설은 연휴가 짧기도 하고 돈도 없어 호주에 사는 가족도 못 만나지만 수원에 있는 본가에도 가지 않겠단다. 가족을 떠나보내고 홀아비처럼 궁상맞게 생활하는 자신을 보고 어머니가 속상해 하시고 다른 형제들도 ‘주제파악 못하고 외국 보냈다’고 비난하는 것이 듣기 싫어서란다.

“제 경우는 거창하게 자녀를 글로벌인재로 키우겠다거나 남들이 다 보내니까 덩달아 보낸 게 아니에요. 중학에 진학한 아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데 왕따를 주도한 아들 친구를 만나보고 학교 선생님과 상의를 해도 잘 해결이 되지 않더라고요. 제 아들이 좀 내성적이고 편향적인 성격이어서 그런가봐요. 친구들과 융화하지 못하니 자연히 학업성적도 떨어져서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시켜봤는데 성적이 안 올라요. 고민하다가 자연환경이 좋아 맘껏 뛰놀 수 있는 호주를 선택했고 애엄마와 함께 보냈죠.”

펭귄아빠들은 사무치도록 그리워도 가족을 자주 보지 못한다는 아픔만큼이나 일상생활의 불편함 때문에 심신이 지친다. 아침은 거르거나 회사 근처에서 김밥, 샌드위치로 때우고 점심도 구내식당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재빨리 돌아와 라면을 끓여 먹으며 청소, 빨래 등을 직접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동창회 등 각종 모임에 기를 쓰고 참석하거나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고혈압, 당뇨, 심근경색 등 각종 질병에 걸려 건강을 잃기도 한다. 내과는 물론 신경정신과까지 이런 기러기아빠와 펭귄족들이 자주 방문해서 의사들은 ‘기러기아빠들은 건강 팔아 자녀교육을 시키는 것’이란 말까지 한다.

또 다른 펭귄아빠인 조동수씨는 인터넷 삼매경에 푹 빠져 있다. 쇼핑이나 장보러 갈 시간도 없지만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져도 세탁소에 맡길 여유도 없어 인터넷 쇼핑으로 각종 반찬거리를 구입하고 얼마 전에는 단추를 사서 직접 바느질도 했다.

“혼자 살아 후줄근하다, 궁상맞다는 소리를 안 들으려고 전보다 더 옷차림이나 외모에 신경을 씁니다. 이 나이에 제가 흐트러지면 저도 힘들고 가족들도 괴로울 것 같아서 늘 긴장하며 살죠.”

외국의 엄마도 아버지능력 따라 분류

자녀와 함께 외국에 나간 엄마들도 남편 능력에 따라 독수리, 기러기, 펭귄으로 분류된다. 사진은 조기유학을 위해 공항 출국장을 향하는 엄마와 자녀들. <김영민 기자>

자녀와 함께 외국에 나간 엄마들도 남편 능력에 따라 독수리, 기러기, 펭귄으로 분류된다. 사진은 조기유학을 위해 공항 출국장을 향하는 엄마와 자녀들. <김영민 기자>

조동수씨는 아버지만 독수리, 기러기, 펭귄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 있는 어머니들도 남편 능력에 따라 똑같이 분류된다고 한다. 넉넉한 돈으로 외국에 집과 대형자가용을 마련하고 시간 나면 골프와 쇼핑을 일삼는 이들은 독수리 엄마, 유학온 아이를 돌보는 ‘가디언’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외국에 와서 1년에 한두 번 남편과 상봉하는 이들은 기러기 엄마, 그리고 한국에서 고생하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외국생활에서도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며 아버지 노릇까지 하는 이들은 펭귄 엄마들이다. 다른 엄마들이 고급승용차를 타고 명품을 휘감고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빠듯한 돈으로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사춘기에 예민한 자녀들과 끝없이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독수리건 펭귄이건, 홀로 사는 아버지들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름의 애환이 있겠지만 주변사람들의 고통도 만만치 않다. 쉰이 넘은 나이에 혼자 사는 아들이 안쓰러워 수시로 아들집에 드나들며 빨래·청소에 밑반찬까지 살림을 도와주는 팔순 노모, 툭 하면 술취해 ‘외롭다, 괴롭다’고 하소연하는 펭귄족 친구의 투정을 받아줘야 하는 친구들, ‘일찍 집에 가기 싫다’며 늦도록 야근하거나 수시로 술 마시자고 권유하는 펭귄족들은 은근히 따돌림 당하는 ‘은따’란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심리학자 최창호 박사는 “무조건 자식에 대한 투자라며 집을 팔아서라도 조기유학을 시키며 보상을 기대하는 기러기 아빠의 미래는 가난하고 쓸쓸한 ‘현대판 고려장’이 될 수 있다”며 자녀에게 올인하기에 앞서 철저한 미래계획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기러기아빠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양숙 연세대 연합신학 대학원 겸임교수는 “기러기아빠들의 돌연사나 자살이 점차 늘고 있는데 이젠 기러기 가족문제는 개별 가족 차원뿐 아니라 우리 사회전체의 구조적 문제로 봐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정과 부부, 경쟁과 성공, 삶의 목적과 행복이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생각해보라고 최박사는 거듭 강조한다.

온가족이 모여 훈훈한 정과 따스한 손길을 나누는 설날. 삭막한 방에서 혼자 떡국을 끓여 먹으며 눈물 흘리는 펭귄족의, 겨울보다 더 시린 마음은 누가 다독여줄까.

<유인경 편집위원 al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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