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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대화하는 자식들 낯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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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아빠들 사례, ‘해방감’은 순간일 뿐 ‘돈 버는 기계’로 취급받는 씁쓸함

[커버스토리]영어로 대화하는 자식들 낯설어요

기러기아빠 6년차인 정형외과의사 강정규씨(가명). 요즘 그는 그의 생활을 ‘3땡 인생’이라고 말한다. 아내와 두 아들을 미국에 보낸 그는 서울에서 경기도로 병원을 옮겨 혼자 지낸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아들을 걱정한 노모가 밥과 국, 반찬 등을 냉동시켜 보내주는데 거의 매일 끼니마다 그걸 전자레인지에 해동시켜 땡~ 소리가 나면 먹는 것을 ‘3땡’이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팔순이 가까운 어머니가 보내준 냉동밥을 데워 먹을 때면 콧등이 시큰하죠. 서울에서 일할 때보다 이곳이 노인환자가 더 많아 바쁘기도 하고 식당에서 인공조미료 잔뜩 들어간 음식을 사먹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 하루종일 병원에 갇혀 이런 3땡~식사를 해야 하는 신세가 한심할 때가 많아요.”

친구에게 속마음 털어놓기 꺼려

평소 시댁과 갈등이 심하던 아내는 아들들이 초·중학교일 때 영어조기교육을 강조하며 미국행을 결정했다. 어머니와 아내 틈에서 시달리던 그는 아들들의 장래도 생각해서 기러기 아빠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갑자기 늘어난 자유시간도 신나고, 고부갈등의 중간에 끼여 괴롭던 순간도 사라졌고, 아들들도 미국 생활에 적응을 잘해 자신의 선택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점차 차를 바꿔달라, 집을 장만하자, 사립학교에 보내자 등 미국 가족이 요구하는 돈의 액수가 늘어나 서울 집과 병원을 처분하고 경기도로 옮기면서 후회와 분노가 치밀 때가 많단다.

“저는 돈 버느라 취미생활은커녕 친구들 만날 시간도 없어요. 밥도 전자레인지에 해동한 것만 먹으니 무슨 맛이 있겠어요. 그런데 미국에 가보면 가족들이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저를 그저 돈버는 기계로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 가면 하루이틀은 반가운 척하고 저는 시차 때문에 사나흘 비몽사몽 헤매다가 생업 때문에 돌아와야 하는데 그들은 그곳 생활에 익숙해져 저를 손님취급하는 것 같고. 같이 외출할 때는 애들이 통역해줘야 하는데, 제 돈으로 공부해 영어를 익혀놓고도 영어 못하는 저를 무시하는 것 같아 불쾌할 때도 있어요. 더구나 이제 큰 아들은 대학에 갔고 둘째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아내는 귀국해도 되는데 친척 도움으로 취직해서 돌아올 생각을 안해요. 얼마전에 집까지 샀으니 더 그렇죠. 저보고 병원 처분하고 오라는데 제가 그곳에 가서 뭐합니까. 또 생활비는 뭐해서 벌고요. 자기들끼리 영어로 대화를 하는 아들들을 보면 대견하다기보다는 낯설어요.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할지도 모르겠고….”

그는 자신의 의대 동기동창들 절반 정도가 기러기 아빠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동창회에 나와서도 “우리 애가 이번에 올 A를 받았어, 아이비리그 대학에 갈 것 같아” “미국에 산 집값이 올랐어” 등의 자랑만 늘어놓거나 “애인 소개 시켜줘” 등의 농담은 해도 자신들의 절절한 심정을 내색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자식 성공 앞서 부부관계 흔들

조기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이 외국 선생님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있다.

조기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이 외국 선생님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있다.

기러기 아빠 중 일부는 이처럼 자신은 뼈빠지게 고생하는데 아내나 자식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자신의 노고를 몰라주는 것에 분노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난 10월에 일어났던 기러기아빠의 친딸 상습 성폭행 사건은 가장 극단적인 사례. 학원강사인 ㅇ씨는 2002년 아내와 큰딸 등 일가족 4명을 캐나다 토론토에 유학보내고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도록 강의를 하며 매달 600만 원을 송금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니 자식들이 잘 될 것’이라며 기대감이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의 요구로 캐나다에 집을 구하기 위해 한국 아파트를 처분, 자신은 작은 단칸방으로 내몰리고, 아이들과도 소원해졌다.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그것마저 거절당한 그는 3년 전 큰딸을 국내로 불러 들였다. 귀국한 딸이 공부는커녕 외박을 자주 하자 서운했던 그는 아내와 큰딸에게 복수심을 느껴 자신의 친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구속된 ㅇ씨는 “기대감이 무너지고 허탈감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 같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기러기 아빠와 엄마들은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생이별을 감수하지만 정작 자녀가 성공하기보다 먼저 부부관계가 삐걱거리는 경우가 많다. 각자 떨어져 지내다 보니 대화가 소홀해지고, 오해나 갈등이 생겨도 제대로 해소할 시간이 없어서다. 또 외롭다는 이유로 다른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실제로 바람까지 난 사례들을 종종 목격한다.

변호사인 김모씨는 2년 동안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아내를 불러들였다. 중학생 아들의 유학 뒷바라지를 위해 아내까지 캐나다에 보냈던 그는 혼자 있는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처음 한두 달은 정말 좋았어요. 술먹고 늦게 들어온다고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힐 걱정하지 않아 좋고, 일요일에 억지로 끌려 나가 놀이동산 가거나 외식을 할 의무감도 없이 실컷 골프도 치고 늦잠도 잘 수 있었으니까요. 신나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카드놀이도 하고 잘 놀았죠. 그래도 썰렁한 빈 집에 돌아올 때면 너무 쓸쓸하고 씁쓸하더군요.

그런데 기러기 아빠로 혼자 지낸다고 하니까 ‘어머,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이번 주말에 제가 가서 밥해드릴까요?’라고 은근히 유혹하는 여성도 있고, 저 역시 일탈의 욕망이 생기더군요. 게다가 가족을 만나러 캐나다에 갔더니 아내가 재미있다는 듯 ‘옆집 아줌마는 골프 코치랑 바람났고 뒷집 엄마는 캐나다 사람이랑 열애중이고…’ 등등을 전해주더군요. 서양인에게는 동양여성들이 신비해보이고 연령대도 잘 파악하지 못해서인지 한국 기러기엄마들도 인기라는 거예요. 이웃 기러기엄마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 어머니가 `이혼하고 그 위자료 받아 이 곳에 정착하겠다’고 하는데 제 아내도 그런가 걱정도 됐는데, 마침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에 넣고 아내를 데리고 왔죠. 부부는 아무리 싸워도 직접 얼굴과 살을 맞대지 않으면 관계가 소원해지고 갈등만 커지니까요.”

“남들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아”

기러기 아빠들 가운데 자신의 결정과 생활에 만족하는 이도 많다. 서울 시립대 최창귀 교수도 그런 경우. 그는 중학생이던 아들이 컴퓨터 게임에만 너무 빠져들어 환경을 바꿔주려고 조기유학을 보내기로 했다. 아내와 둘째아들도 동반했다. 처음엔 가족들을 보내고 자신은 작은 원룸에 사는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신도 1년 가까이 캐나다에 가서 생활하면서 오히려 한국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여유와 가족과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아들은 그곳 생활과 학업에 익숙해져 좋은 성적을 거뒀고 한국에 돌아와 명문대학에 합격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으니 소리치고 나무랄 일도 없고 평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을 메일로 보내기도 하니까 아들과의 관계도 훨씬 좋아졌어요. 아들도 한국보다 그곳에서의 생활과 학교 시스템에 잘 적응해서 자신감을 얻었고요.”

하지만 그런 해피엔딩을 맞기까지 투자한 돈과 시간이 아까워 다른 이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단다. 특히 단지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전국민이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는 것 같아 외국계 회사나 특별한 직장이 아니면 영어 시험을 폐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건축업을 하는 조수행씨는 두 딸과 아내를 미국에 보낸 기러기 아빠. 사업에 몰두하느라 가정에 소홀해지자 수시로 부부 싸움을 했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 직전에 ‘떨어져서 시간을 갖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며 아내가 제안한 것이 아이의 조기 유학에 따라가겠다는 것.

“처음엔 마음도 몸도 떨어져 진짜 헤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죠. 그런데 한국에 살 때는 아내도 친구들끼리 모여 백화점이나 헬스장에 몰려 다니며 나태하게 살고 아이들도 컴퓨터나 연예계 소식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막상 낯선 외국땅에서 가장 없이 살아야 하니까 바짝 긴장하더군요. 언어소통도 잘 안 되는 곳에서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늘 긴장하고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는 발전적인 모습으로 변화했어요. 이젠 아내도 영어를 잘 하고 아이들도 성적이 우수합니다. 무엇보다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게 되어 이혼의 위기를 극복한 것만으로도 기러기아빠 생활은 도움이 되었어요.”

물론 딸들이 나중에 외국인 사윗감을 데려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부부사랑을 찾았기에 그는 올해 가을에 아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기러기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다.

연예인 기러기 아빠들

왼쪽부터 박상원, 임백천, 김흥국.

왼쪽부터 박상원, 임백천, 김흥국.

유명연예인이나 정치인들 가운데도 기러기 아빠가 많다. 탤런트 박상원, 가수 김흥국, 개그맨 배동성, MC 임백천 등이 대표적인 경우.

SBS TV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고 있는 박상원은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캐나다에 있는 기러기 아빠. 덕분에 여유있는 시간을 각종 사회봉사단체 홍보 대사 등으로 일하며 바삐 산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에베레스트를 등반해 아이들에게 값진 경험을 만들어 주고 싶다’며 평소 자주 못보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애주가의 대명사이면서 최근 금주 선언을 한 가수 김흥국. 아내와 아들, 딸을 미국에 보내고 혼자 지내는 그는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고 외로움에 술을 자주 마셨단다. 또 아파도 병원에 가는 일이 별로 없었다. 모 방송국의 건강프로그램에 출연, 건강진단을 받고 예상수명을 알아본 그는 호흡기, 위 등의 몇개 기관에서 이상소견이 발견되고 특히 비만은 당장 개선이 필요한 상태로 나타나자 충격을 받아 금주선언을 했다. `미국에 있는 막내딸이 일곱살인데 딸 결혼식 때 아버지로서 손을 잡고 들어가려면 지금부터라도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것이 금주결단의 변.

MC 임백천은 아내와 남매를 미국에 보내고 기러기아빠 생활을 한다. 요즘은 인터넷도 발달하고 국제통화요금도 싸져서 직접 얼굴만 못 볼 뿐 대화부족은 전혀 느끼지 못한단다.


<유인경 편집위원 al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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