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생명’ 최열의 ‘환경’ 통하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환경운동연합(5) 에필로그

76년 감방서 “열심히 하라” 메시지… 93년 4월엔 창립대회 참석 축사

최열(왼쪽)과 김지하의 만남은 한국 환경운동사의 큰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열(왼쪽)과 김지하의 만남은 한국 환경운동사의 큰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은 한국 환경운동사의 기념비적(?) 증거물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담고 있는 의미가 간단치 않다. 그냥 보면 김지하(시인,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가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에게 술을 따르는 장면에 불과하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들이 나눈 대화를 재구성해보면 한국 환경운동사를 관류하는 거대한 흐름의 맥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형님이 나를 환경운동가로 만든 거지요.”
“아, 또 그 소리…. 그만 술이나 마셔.”

1976년 여름 김지하와 최열은 서울구치소에 있었다. 김지하는 4동 독방에, 최열은 긴급조치 위반사범과 함께 수용한 5동에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최열이 ‘공해추방운동’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김지하는 지지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오랜 독방생활 생명사상에 눈떠

인권이 유린되고 언론이 말살된 유신정권 하에서 운동권은 환경운동가의 길을 걷겠다는 최열을 용납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죄’로 감옥살이하던 긴급조치 위반사범은 특히 그랬다. 그런 상황에 ‘좋은 결정을 했다. 열심히 하라’는 김지하의 메시지는 최열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을 법하다.

김지하는 6·3학생운동과 오적사건 등으로 수차례 수배·투옥되었으며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까지 받은 바 있었다. 당시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재구속돼 독방에 수감돼 있었는데 언제 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상징적 인물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간혹 간 큰 작가가 ‘김×하’로 표현하는 정도였다. 말하자면 가장 할 말이 많은 거물이 환경운동의 가치를 인정한 셈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된다.

“형님은 내가 백기완 선생의 요양을 도울 때도 찾아와서는….”
“그때 나는 생명운동을 생각하고 있었지.”
“그래요. 나는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구상하고 있었고….”

1981년 강원도 춘성군(현 춘천시) 추곡약수터에서 벌인 두 사람의 산중대담은 환경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이 국내에서 두 갈래의 큰 흐름으로 정리된 분기점이었다고 할 만하다. 최열은 ‘공해운동’이라는 현실 문제로 방향을 잡았고, 김지하는 ‘생명운동’이라는 본질적 측면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설립과 ‘생명에 관한 원주 보고서’로 각각 나타났다.

김지하가 생명사상에 눈뜬 것은 1979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그는 6년째 독방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랜 독방 생활은 인간의 심성을 파괴할 수 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6년을 버텨온 김지하에게 정신착란이 찾아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벽이 가까이 다가오고 천장이 막 내려오고….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81년 추곡약수터서 첫 대면

환경운동연합 초대 대표들. 왼쪽부터 박경리·이세중·장을병.

환경운동연합 초대 대표들. 왼쪽부터 박경리·이세중·장을병.

“그런 중에 민들레 씨가 날아들어 창살 틈바구니에서 자라난 것을 보았다. 굉장한 쇼크를 받았다. 그 순간 허공에서 ‘생명’이란 소리가 에코로 들렸다. 생명, 생명, 생명… 기독교 신자라면 계시라고 하고 과학적으로 보면 환청인데 그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명이란 것을 깨닫는다면 내가 안에 있어도 밖에 있는 것과 다름없지 않으냐, 조그만 생명체조차 자꾸 감옥 안으로 날아들어오는데 생명의 세계에서 안과 밖이 어디 따로 있겠느냐고….”

그는 생각했다. 바로 생명이다, 생명이 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있다, 생명에 대해 깨닫는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깨달음을 얻는 데는 참선이 좋다, 불도의 참선을 시작하자…. 그는 참선에 들어갔다. ‘완전히 해골이 될 때까지’ 참선을 계속했다. 그것이 무너져가던 그의 영혼과 육신을 다시 일으켜세운 생명수였을까. 그의 기억을 더 더듬으면.

“참선을 시작한 지 딱 100일 만에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참선이 거기서 깨져버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생명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눈을 돌렸다. 독일 녹색운동이라거나 불교, 진화론, 생물학, 뇌과학 계통… 이런 걸 자꾸 보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죽고도 1년이 넘게 내가 석방이 안 됐으니까….”

1980년 12월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장일순·박재일 등이 있던 ‘원주캠프’로 복귀했다. 이듬해 추곡약수터에 요양 중인 백기완을 병문안하면서 최열과 첫 대면을 했을 때는 그의 생명운동에 대한 구상과 틀이 어느 정도 잡힌 때였다.

최열이 당시 생각하던 ‘공해’와 10여 년 뒤 새롭게 채택하는 ‘환경’, 그리고 김지하가 추구한 ‘생명’은 서로 긴밀하게 통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다 같이 현실적 차원에서는 ‘환경’의 영역에 포함되지만 이념이나 철학적 배경은 전혀 달랐다. 이 세 가지 개념의 조화와 갈등은 한국 환경운동사의 또 다른 중요한 일면이기도 하다.

김지하는 최열의 공해(또는 환경)운동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최열을 적극 지지했다. 최열 역시 김지하의 생명운동이 현실을 개선하는 최선의 방법론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추곡약수터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대화를 더 엿들어보자.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공해문제도 심각합니다. 우리가 공해추방운동을….”

“열이가 자꾸 공해 얘기를 하는데 크게 보면 그게 바로 생명운동이지. 유기농운동이나 공해추방운동, 그리고 내가 하는 생태시운동, 즉 생명문학운동, 생명문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다….”

김지하는 유기농운동과 환경·공해운동, 생명문화운동을 모두 생명운동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 세 갈래의 운동이 ‘생명’이라는 큰 철학적 배경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지만 그 바탕 위에서 최열의 활동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환경에 대한 개념과 환경운동에 대한 이념이 채 정립되지 않은 초창기에는 두 사람이 확고한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 당시 이와 관련한 논쟁이 운동권 내부에서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김지하의 기억을 빌려보면.

“그런 논쟁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박현채 교수가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환경·공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당시 최열이 운동권에서는 썩 환영받지 못했는데 그때 유명한 말이 ‘공해는 사회주의에는 없고 자본주의에만 있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농담이지. 친구들이 최열에게 ‘왜 자꾸 삐져나가느냐, 공해가 다 뭐냐’라고 하니까 ‘사회주의에는 공해가 없고 자본주의에는 공해가 있으니까 공해에 대한 반대가 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투쟁 아니냐’고 한 것이다. 그래서 (공해추방운동이) 인정을 받았다. 그때는 웃지 못 할 난센스가 많았다. 물론 나는 혼자 생명 얘기한다고 변절자, 배신자라고 말도 못하게 욕을 먹었지만….”

1993년 4월 3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환경운동연합 창립식에서 박경리 공동대표가 환경연합 기를 펴보이고 있다.

1993년 4월 3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환경운동연합 창립식에서 박경리 공동대표가 환경연합 기를 펴보이고 있다.

‘환경이냐, 생명이냐’ 뜨거운 논쟁

김지하는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 때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라는 글을 써 운동권으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최열은 여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환경운동권 내의 좌파환경주의자들과도 입장을 달리 했다. 그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김지하의 생명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다르면서도 같은’ 인식의 접합점이 바로 앞에 소개한 사진에 함축돼 있다. 이렇게 무대는 환경운동연합이 출범하던 시점으로까지 이어진다. 시곗바늘을 그 시점을 옮겨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자.

“이제 저도 공해에서 환경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공해 개념으로는 지금의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
“공해는 공공경제학에서 나오는데 거기서는 자연을 자본이나 자원이 아니라 소득으로 생각하지.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거든. 불로소득으로 보니까 마구 다루게 돼. 말하자면 마이너스 공공재화이고 사회적 실패, 즉 오염이 생기는 건데 그런 차원에 있다가 그걸 환경으로 끌고오려면 이론적 배경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환경으로 가는데 좀 도와주….”
“환경이란 것도 인간을 둘러싼 자연적 조건이 오염돼 있기 때문에 개선하자는 것 아닌가. 완전히 인간을 중심에 놓고 휴머니즘적 입장에서 동식물이나 무기물을 둘러싼 무대장치쯤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야.”
“꼭 그렇지는 않아요. 우리도 생태적으로….”
“안 그렇다고 하지만 결국은 그래. 열이 네가 환경이라는 말을 쓰는 한 환경문제 해결은 없는 거야. 철학적 입장이 바뀌지 않으면 안 돼.”
“어떻게요?”
“생명이야!”
“그렇다고 생명운동연합이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

최열은 환경운동연합 출범을 앞두고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전문성과 대중성, 즉 ‘환경’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운동을 날아오르게 할 두 날개를 모두 갖춘 상태였다. 운동의 폭을 넓히기 위해 스스로 대표(의장)에서 실무자(사무총장)로 몸을 낮추고 ‘어른’들을 대표로 모셨다. 국민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조직의 대표는 운동권만이 아닌 광범위한 국민이 인정하고 존경할 만한 인사를 내세워야 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대한변호사협회장 이세중, 성균관대 총장 장을병으로 대표단을 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박경리는 평생 동안 단체의 대표나 직책을 맡은 적이 없었다. 최열은 “지구환경을 살리는 일이니까 이름만 걸어주어도 큰 힘이 된다”며 설득해 마침내 허락을 얻었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 담당 변호인이던 이세중은 “변협 회장은 다른 단체를 안 맡는 것이 관례지만 최열씨가 부탁하니까 맡겠다”며 수락했다. 장을병 역시 흔쾌히 참여했다.

단체 이름도 환경운동연합으로 확정했다. 운동의 외연을 최대한 넓히기 위해 ‘운동권’ 냄새가 안 나도록 아예 ‘환경연합’으로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지만 “운동까지 빼버리는 것은 곤란하다”는 다수의견을 존중해 거기에 따랐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대중성과 전문성이라는 양날개로 힘차게 비상할 환경운동연합의 목소리였다. 새가 아무리 날개의 힘을 키워 높이 날아오르더라도 울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새로운 환경운동단체가 내지를 고고의 성(聲), 즉 대중을 끌고갈 수 있는 강렬한 캐치프레이즈가 필요했다. 그가 김지하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최열은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 뜻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내세워서는 아직 대중의 이해와 참여를 기대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생명은 아직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지만 환경은 국내뿐 아니라 전지구적인 화두가 됐습니다. 일종의 유행 개념으로 환경을 내세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장자가 이런 말을 했다. 생명을 중시하면 이익은 가볍게 여기느니라….”

“그럼….”

김지하와 최열의 대화는 15년 가까이 흐른 지금의 환경운동이 처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가 되고 있다. 환경운동이 큰 흐름에서는 공해에서 환경으로, 환경에서 생태·생명으로 진화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는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연합 출범 후 세 가지 측면에서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가 있었지만 각기 나름의 한계에 부닥친 점도 있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역대 환경운동연합 대표들. 고건·김진현·신경림·손숙·임길진(왼쪽부터)

역대 환경운동연합 대표들. 고건·김진현·신경림·손숙·임길진(왼쪽부터)

창립회원 7000명 지금은 7만명

결국 모든 것이 서로를 받쳐주고 이끌어주는 구조가 잘 구축돼 효과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정답이 아닌가 싶다. 환경문제라는 것 자체가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멀리 내다보고 대중을 선도하는 것이 환경운동가들의 몫이지만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 또한 그들의 일인 것이다. 김지하와 최열이 처한 각자의 묘한 위치는 환경운동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런 속성을 웅변하는 듯하다. 최열의 말은 계속된다.

“…김지하 하면 ‘생명’이고 나는 이제 공해에서 ‘환경’으로 넘어왔으니까 이렇게 하시죠. 두 가지를 다 넣는 겁니다.”
“환경과 생명….”
“그렇습니다. 저는 환경이고…”
“그래, 나는 생명이다!”
“환경은…”
“…생명이다.”
“환경은 생명이다.”

환경운동연합 창립 때 내건 이 캐치프레이즈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환경문제에 대한 보편적 시각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지금껏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이 발행하는 환경잡지의 제호인 ‘함께 사는 길’에도 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이 다 함께 산다는 ‘생명’의 철학이 담겨 있다. 최열이 소개하는 이 캐치프레이즈와 관련한 일화 한 토막.

“어느 날 신문에 ‘환경은 생명이다’라는 현대중공업 기업 이미지 광고가 실렸다. 왜 남의 캐치프레이즈를 사용하느냐고 항의 전화를 했더니 ‘좋은 말인데 많이 써야 되지 않느냐’고 했다. 하긴 듣고 보니 그랬다. 그래서 ‘아, 캐치프레이즈라는 것이 중요하구나’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만우절을 피해 1993년 4월 2일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환경운동연합 창립대회가 열렸다. 7000여 명의 회원과 8개 단체, 50여 명의 상근자를 둔 국내 최대의 단일 환경운동 조직이자 향후 그 10여 배인 7만 명의 회원과 52개 단체(1개는 폐쇄)를 가지게 되는 아시아 최대의 환경운동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최열에게 ‘생명’이라는 술을 부어준 김지하도 이날 참석해 축사를 했다.
새로운 환경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끝>

<신동호 NIE연구소장 hudy@kyunghyang.com>

관련기사

秘錄환경운동25년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