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이 만난사람

팝페라 가수 임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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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업가로도 능력 발휘하고파”
온라인용 노래 제작 음원 판매 시작… “음악가로서 받은 사랑과 번 돈 사회 환원”

[유인경이 만난사람]팝페라 가수 임형주

“늘 꿈을 꾸면서도 시대를 읽고 시간을 리드하는 사람이 되려고 해요. 예술이나 사업도 시대의 흐름과 대중 취향을 알아야 하거든요”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란 유행가 가사처럼 팝페라 가수 임형주는 너무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천진난만한 소년의 미소를 짓다가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노인의 달관한 표정을 보여주고, 야망에 불타는 청년의 열정이 느껴지는가 하면 찜질방에서 만난 아줌마처럼 화장품 이야기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소녀 같은 뽀얀 우윳빛 피부를 자랑하면서 CEO처럼 확고한 경영마인드로 자신을 관리한다.

겨우 스물한 살, 남들은 미팅이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혹은 군대에서 청춘의 열기를 발산할 나이에 그는 세계를 무대로 신기록을 쌓아가며 이력서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지난해 영국 음반사인 EMI Classics와 100만 달러 계약을 맺어 화제를 모아 ‘세계적인 팝페라 테너‘란 명성을 다진 임형주는 음반판매량 집계 사이트 한터차트가 집계한 2006년 연말결산 클래식 음반 판매순위에서 4집 ‘The lotus’로 1위를 차지, 데뷔앨범 ‘Salley Garden’으로 2003년 연말결산 클래식 음반 판매순위 1위(신나라레코드, 핫트랙스, 한터차트 집계)를 기록한 이후 4년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4년 연속 1위를 차지한 아티스트는 임형주가 최초이며 게다가 그동안 내놓은 앨범들이 10위권 내에 랭크돼 아직까지도 꾸준한 판매고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불황의 음반가에 효자 노릇을 하는 그는 공연시장에서도 역시 상종가. 그의 콘서트는 전국 어디에서나 매진이며 10대 소녀부터 60대 할머니, 그리고 중년남성들까지 다양한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해마다 그의 생일날에는 팬클럽 회원들이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만든 무대를 그에게 헌정(?)하기도 하고, 일본 나루히토 황태자도 그의 팬임을 밝히며 그를 초대해 그의 노래에 피아노 반주를 했는가 하면 일본에서 가장 도도하고 파워풀하다는 가수 마쓰토야 유밍은 ‘나의 어린 왕자’라며 그의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해 일본 언론들이 더 놀랐다. 대만 건국 93년 만에 쌍십절 축제에 총통관 앞에서 노래를 부른 최초의 외국 가수인 그는 ‘클래식 한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003년 대통령 취임식 때 애국가를 불러 ‘애국가 청년’이란 별명을 얻은 그는 이제 대한적십자사 홍보대사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형주군, 줄 잘 섰네요(홍보대사란 좋은 일을 맡았군요라는 뜻)”란 특유의 덕담 인사를 받기도 했다. 4년 사이에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락했지만 임형주의 인기와 주가는 급상승했으니 ‘정치는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나 할까. 4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남들이 평생을 노력해도 얻지 못할 각종 기록과 부까지 거머쥔 청년. 그의 성공 비결은 뭘까.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다

“어릴 때 꿈이 오페라 가수였어요. 그런데 고음처리는 잘되지만 베르디, 바그너, 푸치니 등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의 묵직한 바리톤은 어울리지 않고 체구도 왜소한 편이라 고민했죠. 하지만 변성기가 되어서도 잘 변하지 않는 제 목소리를 들어본 전문가들이 감미롭고 부드러운 팝페라를 불러보라고 권했습니다. 약점 때문에 꿈을 접는 게 아니라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봤는데 성공한 거죠.”

‘팝페라’(팝+오페라)는 클래시컬한 성악곡에 팝 스타일을 가미한 ‘퓨전’ 장르로 팝페라라는 말 자체는 1997년에 워싱턴포스트지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해외에선 안드레아 보첼리, 사라 브라이트먼 같은 가수들이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나 국내에선 2002년 12월, 임형주가 처음 음반 발매를 하고 최초의 콘서트를 열면서 새 장을 열었다. 그로부터 그에겐 ‘팝페라의 황태자’란 타이틀이 꼭 따라 다닌다. 그런 탓에 사람들은 흔히 유명스타가 지나가면 ‘이영애다’ ‘박지성 선수다’ 등 이름부터 부르는데 그를 호칭할 때는 꼭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세트로 따라 다닌다.

“팝페라란 제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지만 그만큼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팝페라 시장을 개척했다는 자부심도 있지만 정통 클래식이 아니란 이유로 제 기사가 문화면보다 연예면에 소개되거나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크죠.

하지만 달리 해석하면 요즘 사람들에겐 다소 부담스럽거나 딱딱하게 들릴 수 있는 클래식을 부드럽고 부담없이 들려드려 클래식과 가까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드릴 수도 있고 장르에 관계없이 아름다운 곡을 선사할 수 있어 팝페라란 영역을 선택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데뷔 앨범부터 4집 앨범까지 수록된 모든 곡을 제가 선곡하고 편곡 과정에도 참여했는데 패션디자이너로 치자면 전 재단이나 바느질보다 디자인, 즉 옷의 구성을 잘하는 디자이너라고나 할까요. 소설가라면 작품이 어려워 소수만 읽는 작가가 아니라 베스트셀러 작가인 셈이죠.”

어떤 이들에겐 ‘짬뽕 클래식’으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은 ‘정통 클래식부터 팝은 물론 트로트의 매력까지 주는 종합선물세트’라며 갈채를 보낸다. 그의 콘서트에는 감상하는지 조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침묵과 곡이 끝난 후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박수의 공식은 사라진다.

“여러분, 값비싼 티켓 구입해서 오셨는데 한번 인조이해봅시다.”

임형주가 갑자기 연미복 재킷을 벗어 던지며 뒤돌아서 엉덩이 춤을 추며 국내 드라마 주제곡 매들리를 부르면 그동안 조용히 앉아 고상함과 우아함을 자랑하던 관객들이 갑자기 들썩이고 때론 일어나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연합뉴스의 이은정 기자는 임형주 콘서트 리뷰에서 “시대를 파괴하고 장르를 무너뜨리고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듯 모차르트의 ‘알렐루야’부터 최근 발표한 크리스마스 음반 수록곡 ‘하얀 이별’까지 250년을 건너뛰었고, 오페라 아리아 ‘우나 포르티바 라그리마(Una Furtiva Lagrima)’부터 나미의 노래 ‘슬픈 인연’까지 장르를 넘나들었다. 오페라 아리아, 성가곡으로는 대중의 귀에 친숙한 곡을 골라 일일이 재미있는 설명을 곁들였다. 또 비틀스의 ‘예스터데이(Yesterday)’, 고현정의 CF 삽입곡으로 유명한 ‘쉬 워즈 뷰티풀(She was beautiful)’ 등으로 자칫 지루해질 객석에 흥을 돋웠다. 선곡의 넓은 스펙트럼, 다양한 음역대를 소화하는 감미롭고 파워풀한 음색에 취해 있다가 문득 그가 20살이란 생각을 떠올리면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고 평했다.

남자 가수 특유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아니라 소년 같은 고음, 정통 클래식이 아닌 영역, 소년과 청년의 경계로 보인다는 모든 약점을 그는 오히려 ‘모든 영역을 넘나들며 대중에게 사랑받는’ 무기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같은날, 9시 뉴스에 콘서트나 해외 활약상이 소개되기도 하고 연예프로에 뮤직비디오가 소개되는 유일한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숱한 공연과 CF 출연 요청을 자제하고 신변잡기를 나누는 연예오락프로의 출연을 사양할 줄 알아 ‘신비롭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유인경이 만난사람]팝페라 가수 임형주

빌 게이츠를 존경하는 예비사업가

‘하늘이 내린 천사의 목소리’란 찬사를 듣고 있는 임형주이지만 정작 그의 두뇌는 철저히 현실적이다. 예술감각만큼 경영마인드도 뛰어나고 이미지 관리 능력도 뛰어나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도 마리아 칼라스 등 음악가와 더불어 빌 게이츠를 꼽는다.

우선 그는 ‘그저 노래가 좋아 노래하는 가수’이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좋아하고 소화해낼 곡을 고르고 직접 작사 작곡도 하지만 팬들의 취향과 기호에 맞는 곡을 선택한다. 올해도 4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최연소 팝페라 가수로 무대에 서는 것을 비롯, 5월엔 뉴욕 라디오 시티홀에서 개최되는 ‘월드팝페라 페스티벌’에 보첼리 등과 함께 세계 10인의 팝페라 가수 중 아시아 대표로 선정되어 공연을 갖고 세계인권연합회에 수익금을 기증할 계획이다. 6월엔 영국과 프랑스 앵발리드에서 독창회를 열어 말 그대로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의 스케쥴을 보여준다.

그러나 명성을 높이는 클래식 음반이 아니라 ‘돈이 되는’ 온라인뮤직 사업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올해부터 그는 SG워너비, 이승기 등의 노래를 작곡한 김도훈씨와 손잡고 온라인용 노래를 따로 불러 휴대폰 컬러링 등 디지털 시대에 맞는 음원 판매도 시작한다. 이미 자신이 부른 ‘The Rose’ ‘아베마리아’ 등도 많이 판매되었지만 디지털곡만 따로 만들 예정이다.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문화사업가로서의 능력도 발휘하고 싶어요. 음악 전문잡지를 만들거나 학교를 운영해서 제가 받은 사랑과 번 돈을 환원할 겁니다. 제 음반 제작도 맡고 스케줄을 관리해주시는 어머니가 제가 번 돈을 다 저금하고 계시지만 아직 돈을 더 많이 벌어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올 7월 창단 공연을 갖는 코리아 포스트 채임버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역할도 맡아 연주회 곡목 선정은 물론 음악을 통한 봉사활동도 활발히 펼칠 계획이다. 이벤트화된 봉사활동이 아니라 ‘봉사’란 말에 걸맞은 아름다운 음악나누기를 구상하고 있다.

“늘 꿈을 꾸면서도 시대를 읽고 시간을 리드하는 사람이 되려고 해요. 예술이나 사업도 시대의 흐름과 대중 취향을 알아야 하거든요.”

그보다 두 배가 넘는 나이를 먹고도, 열정어린 꿈이 아니라 허망한 개꿈만 꾸고 살아온 것 같아 어린 청년 앞에서 고개가 숙여졌다.

<글/유인경 편집위원 alice@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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