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착각이 세상을 바꾸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환경운동연합(2)

교도관 출신 환경운동가 김석봉… 그의 ‘천직’은 착각인가 운명인가

댐 반대를 위한 ‘자전거 1인 시위’ 에 나선 진주 환경운동가 김석봉. 진주가 ‘댐 반대 운동의 메카’ 이자 ‘자전거 시범도시’ 가 된 이면에는 그의 노력과 열정이 숨어 있다.

댐 반대를 위한 ‘자전거 1인 시위’ 에 나선 진주 환경운동가 김석봉. 진주가 ‘댐 반대 운동의 메카’ 이자 ‘자전거 시범도시’ 가 된 이면에는 그의 노력과 열정이 숨어 있다.

‘아니, 저건…?’

주변을 흘끔거리던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옆 사람이 무심한 표정으로 백지에 쓰고 있는 한자가 이상했다. 교(矯)…도(導)…소(所)… 놀람은 의심으로, 의심은 곧 회한으로 바뀌었다. 그랬구나! 그걸 몰랐다니! 그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이보시오. 거기 뭐라고 쓴 거요?”
“교·도·소… 몰라서 묻소?”
“그게 아니라 왜 그걸 쓰느냐는 얘기요.”
“나 원 참, 우리가 갈 곳이 교도소 아닌가요?”
‘아…!!!’

정기간행물 교정·보도로 오인

그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뜻하지 않게 교도관이 된 김석봉(현 진주환경운동연합 대표)의 우화 같은 실화다. 그는 고교 시절 지역의 백일장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열혈 문학소년이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공무원 시험을 칠 때 지원한 분야가 그래서 교정·보도직이었다. 정부 간행물을 교정(校訂)해서 보도(報道)하는 직으로 생각했던 그는 면접시험장에서 옆 사람이 쓴 한자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교도관에 지원할 사실을 알았다. 교정직(矯正職)은 교도소, 보도직(輔導職)은 소년원에 근무하는 공무원을 말한다.

한 개인의 사소한 착각이 개인사뿐 아니라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음을 김석봉의 소설 같은 이야기가 가르쳐주고 있다. 그가 착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청송교도소 교도관이 되지 않았다면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 지리산에 두 개의 대형 댐이 건설됐을지 모른다. 도법·수경 스님이 산문을 박차고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진주가 ‘자전거 도시’로 탈바꿈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운명인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으로 면접에 임한 김석봉의 뇌리에는 ‘운명’이라는 두 글자가 맴돌았다. 그래, 운명이다. 운명을 받아들이자. 그는 교도관이 됐다. 그리고 첫 임지인 청송교도소에 부임했다. 이때가 신군부의 폭압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1983년 7월이었다.

청송교도소는 낙천적인 성격에 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한 청년 김석봉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그에게 교도소는 인간 사회의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가 응축된 곳이었다. ‘대도’ 조세형과 ‘옥중투사’ 박영두(1984년 청송감호소에서 사망)가 거기에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 벌어지는 불합리와 부조리에 저항하면서 그는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회장이자 현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강대승, 대표 김석봉, 지리산 식수댐 반대운동을 계기로 환경운동가로 나선 수경 스님과 양재성 목사(왼쪽부터).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회장이자 현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강대승, 대표 김석봉, 지리산 식수댐 반대운동을 계기로 환경운동가로 나선 수경 스님과 양재성 목사(왼쪽부터).

문목사 통해 많은 양심수 알게 돼

교도관은 물론 재소자 사이에서도 ‘노조위원장’으로 통할 즈음인 1987년 1월 그의 임지가 진주교도소로 바뀌었다. 6월항쟁 국면이라 교도소 안에 양심수가 들끓었다. 문익환 목사(1994년 작고)도 거기에 있었다. 시를 좋아하던 그는 ‘시인’ 문익환과 교류했다. 문 목사를 통해 소내의 많은 양심수를 알게 됐고, 그들을 이해하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의식화(?)됐다.

그가 교도관 생활을 청산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주화’되면서였다. 6월항쟁의 결과로 1987년 12월 25일 양심수들이 특별사면되어 대거 석방됐다. 양심수가 다 나가버리자 그는 교도소에 혼자 남은 처지가 됐다. 교도관 생활에 흥미를 잃은 그는 ‘양심수’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사표를 썼다.

민간인 신분이 되자 그는 이번에는 ‘진짜’ 교정·보도직을 지향했다. 이전에 몸담았던 ‘남도시동인’ 회원들을 주축으로 진주청년문학회를 결성, 회장을 맡았다. 이를 발판으로 진주민족예술단체협의회를 조직해 사회운동에도 관여했다.

문학인으로, 또 사회운동가로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환경운동과는 무관했다. 더더구나 자신이 환경운동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환경운동을 은근히 무시하기까지 했다. 저게 무슨 운동이냐. 고급운동 정도로 봐 줄까….

진주는 묘한 곳이다. 보수적인 듯하면서도 진보적이고, 진보적인 듯하면서도 보수적이다. 일견 환경운동이 활성화하기 어려운 풍토인데도 일찍부터 시작돼 모범적 활동을 벌이는 곳이 진주다. 진주는 김석봉을 비롯해 한기양(현 울산환경운동연합 고문)·오성규(현 환경정의 사무처장) 등 전국적인 환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진주 환경운동은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이하 남강모임)에서 시작된다. 계기는 1991년 터진 페놀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배출된 페놀은 진주 시민의 젖줄인 남강의 오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진주의 조직이 환경운동연합의 창립단체인 ‘빅8’(서울의 공추련과 목포·부산·광주·울산·대구·진주·마창의 자생적 환경운동 조직)에 포함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남강모임이 결성된 것은 1991년 9월 25일이다. 페놀사건을 겪으며 진주YMCA 환경모임을 중심으로 “남강도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예방적 환경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초대 회장에 선출된 강대승(변호사)을 비롯해 이한우(치과의사)·노범섭(자영업)·장승환(한의사)·전점석(현 창원YMCA 사무총장) 등 오피니언 리더들이 앞장섰다.

이 모임이 각광받은 것은 창립식을 가진 지 꼭 한 달 만에 터진 ‘남강 물고기 떼죽음 사건’이다. 페놀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진주 시민들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강모임은 ‘물고기 장례식’을 치르는 등 이 사건에 적극 개입하면서 일약 진주를 대표하는 환경단체로 부상했다.

이듬해에는 지리산 양수댐 건설 계획이 발표됐다. 경남 산청군 반천리에 상부댐, 내대리에 하부댐을 각각 지어 양수발전을 한다는 것이었다. 남강모임은 ‘민족의 영산’이자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의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이 사업을 그냥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지리산 보전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지리산 양수댐 반대운동은 전국 규모의 환경운동 조직 건설이 불가피함을 증명해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양수댐 건설은 국가적 사업이며, 그 주체는 한국전력이라는 거대 공기업이다. 또 이를 에워싸고 있는 세력이 ‘건설 마피아’로 불리는 막강 자본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지역 환경단체로서는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을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남강모임은 전국 환경단체에 도움을 호소했다. 매년 공추련이 주축이 돼 실시해온 전국 환경단체 연합수련회가 1992년 8월 10일 지리산 양수댐 반대운동의 현장인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초등학교에서 개최됐다. 전국 환경단체 활동가 100여 명이 참석한 이 수련회를 통해 전국 조직 결성 논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통합 대상인 각 지역단체에 대한 구체적인 실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추련 의장인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이 각 지역단체를 순회방문하기로 했다.

전국 조직 결성, 즉 지역단체의 통합을 위한 조직적 논의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91년 5월 3일 열린 ‘전국환경단체연대회의’ 제3차 실무회의에서였다. 각 지역단체 대표자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원칙적인 합의를 이룬 때는 한기양이 이산화티타늄 공장 입주 반대를 내걸고 천막농성 중이던 그해 7월 초였다.

공식 합의가 이뤄진 것은 리우회의를 앞둔 1992년 4월 10일 ‘전국환경단체대표자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전국 조직 결성 문제에 대해 대표자들은 다음 3가지 항에 합의했다.

①가능한 많은 단체들을 포괄하여 협의체 수준의 전국 조직을 결성하되 그 시기는 10월 께로 한다.
②추진 주체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위원장으로는 최열 공추련 의장을 선임한다.
③준비위원회는 기존 전국환경단체연대회의가 그 기능을 대체하여 맡고, 준비위원회 내에 실무소위(6~7명)를 구성하여 구체적인 실무 작업을 수행한다.

진주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인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창립식. 1991년 9월 25일 전국 환경운동연합 조직 중 7번째로 발족했다.

진주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인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창립식. 1991년 9월 25일 전국 환경운동연합 조직 중 7번째로 발족했다.

도법·수경스님 산문 나서는 계기로

’92 전국 환경단체 연합수련회가 진주 남강모임의 초청으로 지리산 자락의 대포초등학교에서 열린 데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배경이 중첩돼 있었다. 즉 전국 환경단체가 강력하게 연대해 싸워야 할 현장에서 통합 문제를 논의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현장에서는 이성보다 감성에 더 노출되게 돼 있다. 머리로 뿐 아니라 오감으로 문제를 터득하는 것이다. 단체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지역단체와는 성분이나 탄생 배경이 전혀 다른 남강모임이 최열을 주축으로 한 주류 환경운동에 가담할 수 있었던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다시 김석봉의 얘기로 돌아오면 당시 그는 이처럼 숨 가쁘게 돌아가던 환경운동권의 움직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농민·노동자·빈민 등 기층민중의 삶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주간 ‘노동자신문’ 지국을 맡아 자전거를 타고 노동현장을 구석구석을 다니며 신문 배달도 했다.

그가 진주, 나아가서 전국적 환경운동가로 입신한 계기 역시 뜻하지 않게 교도관이 됐던 과정과 비슷하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됐다. 양수댐과 달리 이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진주에서도 ‘우리 농업 지키기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는 이 대책위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것이 그를 다시 뜻하지 않은 길로 인도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UR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진주환경운동연합에 들어가 사무실을 같이 쓰게 됐다. 출근해서 책도 보고 환경연합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환경운동이 중요하고 모든 운동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참에 사람이 없어 상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잘된 일이고 개인적으로도 잘 선택한 길이었다.”
교도관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환경운동가가 그 뒤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는 그동안의 역사가 잘 말해준다. 지리산 양수댐 반대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1993년 ‘지리산 양수댐 건설 반대를 위한 서부 경남 대책위원회’ 이름으로 환경처 장관 등을 고발하는 법적 대응까지 취했지만 이듬해 기각된다. 그가 진주환경운동연합에 영입되기 전의 일이다.

환경운동권에서 그는 ‘성격이 진솔하고 낙천적이며 어려운 일에 직접 나서 몸을 던지는 행동가이자 실천가’로 통한다. ‘혓바닥’이 아닌 ‘발’로 하는 운동가, 침체된 분위기를 살리는 ‘분위기 메이커’의 전형이다.

일례로 그는 사무국장을 맡은 뒤 2년 동안 환경운동연합 회지인 월간 ‘함께 사는 길’을 우편 발송하지 않고 회원들에게 직접 배달했다. 회원들을 직접 만나 회지도 전달하고 대화도 나누는 것은 조직 활성화에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웬만한 정성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1997년 김혁규 경남지사(현 열린우리당 의원)가 서부 경남 관광개발의 일환으로 산청군에 둔철골프장 건설을 추진했다. 김석봉은 아예 앰프를 사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가서 반대운동을 했다. 결국 골프장 건설 계획이 무산됐고, 지금은 산청군이 그 자리에 생태숲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전국 조직에 기대지 않고 지역의 힘으로 거둔 성과다.

진주환경운동연합과 그의 역량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은 지리산 식수댐 반대운동이다. 진주를 ‘댐 반대운동의 메카’로 만든 지리산 천평댐과 문정댐 반대운동의 성공은 그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정부가 12개 댐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진주를 시작으로 공청회를 개최하려던 것을 실력 저지로 무산시켰다. 그와 산청군의회 의장, 진주환경운동연합 의장은 삭발하고 진주가 생긴 이래 최대 군중집회(5000여 명 참여)를 조직, 상여를 메고 시내를 돌았다.

부산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댐이라고 해서 환경운동권에서 ‘식수댐’이라고 이름붙인 이 댐은 실상사 선방에서 정진하던 수경 스님을 산문에서 나와 환경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문정댐이 만들어지면 만수위가 실상사 1.5㎞ 지점까지 닿는 상황이 되자 주지인 도법 스님이 “네가 선방에서 배우고 기도를 올려도 풀 한 포기 움직일 수 있느냐. 생명을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서라”고 권유한 데 따른 것으로 전해진다. 김석봉의 기억을 빌리면….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이명균·이철조,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시절부터 활동한 박희권·장승환(왼쪽부터).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이명균·이철조,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시절부터 활동한 박희권·장승환(왼쪽부터).

환경 파괴하는 인간의 삶 교정하다

“도법 스님한테서 연락이 오기를 댐이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했다. 가서 댐에 대해 설명했더니 스님들이 나섰다. 실상사 스님들은 경험이 없어 해인골프장 반대운동을 했던 혜능 스님을 해인사에서 모시고 왔고 선방에 있던 수경 스님까지 산문을 나왔다. 두 분이 우리 사무실에 찾아왔다. 수경 스님은 ‘진주환경운동연합이 나를 환경운동가로 만들었다’고 했다.”

지리산 식수댐 반대운동은 불교계가 가세하면서 ‘댐반대국민행동’으로 확대됐다. 김지하 시인, 도법 스님, 원불교 이선종 교무, 진주의 원로인 김장하 남성문화재단 이사장(현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지리산생명연대 대표) 등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 조직은 지리산생명연대·지리산생명평화결사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고, 도법·수경 스님은 ‘생명평화 탁발순례‘로 환경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기독교 환경운동을 주도하는 양재성(목사, 현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도 지리산 식수댐 반대운동을 계기로 환경운동가가 된 경우다. 감신대를 졸업하고 1990년 경남 함양제일교회에 부임한 그는 지리산생명연대 초대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2001년 9월 김석봉은 댐 반대운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난의 행군을 결행한다. 우리나라 다목적댐 1호인 남강댐을 출발해 경남 함양, 경북 김천·상주·군위·영주·영덕·울진, 강원 양구, 경기 포천, 충남 청양, 전북 임실·순창과 남원 등의 댐 건설 예정지를 도는 ‘자전거 1인 시위’에 나섰다. 15일 동안 1750㎞를 달리는 대장정이었다. 첫날 엉덩이가 붓더니 혹이 2개가 돋았다. 파스를 붙이고 파우더를 뿌려가면서도 그는 강행군했다.

자전거를 몸에 달고 사는 그의 ‘친환경적 삶’은 도시문화까지 바꿔놓았다. 2002년 들어 진주환경운동연합은 대형 개발 사업만이 아니라 시민의 피부에 닿는 생활환경운동에 눈을 돌렸다. 자전거 프로젝트였다. 자동차 중심도시 진주를 자전거 중심도시로 바꾸려는 그의 시도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진주가 자전거 도시 시범지역으로 선정됐고, 자전거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교정(矯正)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되거나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보도(輔導)는 도와서 잘 인도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환경운동가는 또 다른 측면의 교정·보도직일지도 모른다.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의 삶을 교정하고 보도하는 그의 ‘천직’은 그래서 착각이 아닌 운명이었던가.

신동호 hudy@kyunghyang.com

秘錄환경운동25년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