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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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길]눈은 살아있다

- 선자령 눈꽃트레킹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눈’

지금은 지은이도, 그 전문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젊은 시절 무의식 중에 읊조리던 시 한 구절이 있었다.

봄 여름 가을 내내 잠만 자다가 겨울이면 내가 버린 들판에 나아가보리라

양떼목장. 양들은 침묵하고, 우편함에 새해 연하장은 날아들지 않았다.

양떼목장. 양들은 침묵하고, 우편함에 새해 연하장은 날아들지 않았다.

그때 그 빈 들판은 이제 눈으로 덮여있다. 이미 떨어질 눈도, 마당도 없는 세상에 오로지 빈 들판에만 눈으로 가득하다. 무슨 용서처럼 내려 덮인 눈 위를 걸을 때, 눈은 이를 갈고, 소리 없이 소리친다. 그 소리는 가슴으로 사무쳐 빈 들판의 존재를 실감케 한다. 비어있으니 그저 길이 필요 없고, 그리움으로 잠시 길을 내보지만 이내 따라온 눈으로 길은 다시 사라진다. 그래,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에 가려진 길들이 흩어지도록 기침을 하자.

대관령 옛길을 갈 때, 내 기억은 눈으로만 가득하다. 한여름 대관령목장의 초지를 넘실거릴 때에도 내 기억은 눈으로만 가득했었다. 그 많은 눈들 덕에 내 기억은 대관령으로 향할 때 시리도록 맑게 깨어나곤 했다. 강릉에 단오장이 열릴 무렵, 이곳 대관령 성황당과 산신각에서는 국사성황제가 열려 단오절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곤 한다. 지금은 한겨울이지만, 산신각 아래 기원굿이 끊이지 않으니 숲은 내내 술렁인다. 그 기원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 가슴 속은 고인 가래로만 가득하다. 그 드글거림을 참지 못해 마침내 가래를 뱉어냈을 때, 숲은 일순 머리에 이고 있던 눈더미들을 털어내며 굉음으로 주저앉는다.

선자령 고비를 넘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풍력발전기의 팔랑개비가 나타난다. 그 날개들은 마치 떨어지는 눈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듯이 둔하고 무기력하다. 그 무위의 바람에 밀려 마침내 고갯마루에 섰을 때, 발 아래 사람의 마을이 아득하고, 그곳은 허균과 허난설헌이, 이이와 신사임당이 발붙이고 살았던 강릉 땅이다. 교산의 패배와 율곡의 승리가 교차하는 그 땅 너머로는 여전히 무위하기 그지없는 푸른 바다다. 그래,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울화를 뱉어내고, 순백으로 텅 빈 기운이라도 받아들이자.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여지껏 살아있다.

대관령 성황당에서는 한겨울에도 기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관령 성황당에서는 한겨울에도 기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평창과 강릉의 경계에 선 선자령은 겨울 눈꽃트레킹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해발 1157m의 고지라고는 하지만 해발 800m쯤에 해당하는 대관령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되니, 왕복 4시간이면 너끈히 눈꽃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선자령 등산로 왼편에는 대관령 양떼목장이 있다. 비록 초지를 노니는 양떼들의 모습은 겨우내 찾아보기 어렵지만, 완만한 능선을 따라 펼쳐진 설원의 풍경은 제법 목가적이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온 가족들은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타고, 쌍쌍이 즐거운 연인들은 눈싸움으로 ‘러브스토리’를 연출한다.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횡계IC -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 - 선자령 - 양떼목장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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