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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병제 담론 물꼬 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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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군복무 단축’ 발언이 또 한번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각국의 선례에 비추어 복무기간 단축이 모병제로 가는 중간단계임을 고려하면, 그간 우리사회의 금기로 여겨왔던 모병제 논의를 수면 위로 끄집어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커버스토리]모병제 담론 물꼬 트이나

노무현 대통령은 프랑스식 군개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프랑스군 시스템에 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은 2004년 12월 그의 방불(訪佛)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미셸 알리오-마리 프랑스 국방장관과 장시간 요담을 갖고 프랑스의 혁명적인 군개혁의 로드맵을 경청한 바 있다.

프랑스 군 개혁의 핵심도 모병제

노 대통령은 당시 여성 국방장관 미셸 알리오-마리의 탁월한 군개혁 드라이브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후 노 대통령은 “프랑스의 군개혁에 공감하는 바가 있었고 시라크 대통령보다 국방장관과 더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국방개혁이라는 테마가 프랑스 방문의 핵심 의제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랑스는 1996년 군과 정부관료, 민간전문가로 이뤄진 ‘전략위원회’가 군 개혁의 토대가 된 ‘국방계획법’을 만들었다.(상자기사 참조) 귀국 직후 노 대통령은 당시 윤광웅 국방장관에게 프랑스식 국방개혁방안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2005년 3월14일에는 프랑스 ‘전략위원회’를 모방해서 대통령 직속 ‘국방발전자문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했다. 최근 ‘2020국방개혁기본법’을 통과시킨 것도 1996년 프랑스의 ‘국방계획법’ 제정과 너무도 흡사하다.

2005년 7월에는 자크 루디에르 프랑스 국방부 사무총국장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국방부 대회의실에 국방부 합참의 고위 관계자 200여 명을 모아놓고 프랑스 군개혁의 전개과정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모병제로의 전환이 프랑스 군개혁의 핵심”임을 밝혀 주목을 끌었다.

프랑스는 모병제를 실시하면서 57만 명에 달하던 병력을 44만 명으로 줄였고 2015년까지 15만 명을 더 줄이는 것을 목표로 국방개혁을 추진 중이다. 매년 40조 원에 달하는 국방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제대군인을 위한 획기적인 지원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프랑스 군 개혁을 목도하면서 모병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에 버금가는 대대적인 군 복무 시스템 개혁을 구상하게 됐을 것”으로 단정했다. 실제로 징집제 폐지 전 프랑스 현역병의 복무기간은 육해공군 모두 10개월에 불과했다.

징집제가 사회경제적으로 손실

노 대통령의 군복무기간 단축 발언이 모병제로의 전환을 암시했다는 해석은 지나친 억측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당수 군 전문가들은 각국의 선례에 비추어 복무기간 단축이 모병제로 가는 중간 단계임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특히 2008년부터 유급지원병제를 시범 실시, 2020년까지 2만 명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국방부 구상이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남북관계의 진전, 한반도 평화 정착의 수준에 따라 모병제로의 전환은 정치적 역학관계와 상관없이 대세로 흐를 가능성이 충분하다.

모병제는 그간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금기 담론으로 치부돼왔다. 안보상황론, 전력약화론, 재정부담론에 빈민복무론까지 더해져 논의 자체가 봉쇄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이상목 국방대학교 교수를 중심으로 한 ‘모병제에 관한 실증적 연구’의 흐름은 이번 복무기간 단축론의 대두로 더욱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상목 교수의 연구 결과는 충격적인 수치로 제시되고 있다.

“사병의 수와 학력별 연간급여를 고려해 연간 및 전체 복무 기간의 연간 사회적 비용은 7조3730억 원에 달한다.”
이 교수의 계산에 의하면 현역병의 경우 월 120만 원의 노동력을 제공하며 군복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현역병의 월 평균 보수는 평균 4만~5만 원에 불과하다. 사회경제적 기회비용을 따져보면 징집제는 결코 ‘싼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징집 인원을 경제활동에 전념케 하고 군을 모병제로 운영하면 오히려 사회경제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논리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징집제 아래 사병들의 복무 여건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2005년 한 교수는 대만을 방문, 그들의 대체복무제를 참관했다. 한 교수는 대만의 사병들이 한 달 40만 원의 봉급을 받는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대만은 220만의 중국 대군에 맞서면서도 66만의 병력을 30만 명으로 줄였다. 이제는 우리도 모병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징모혼합’의 절충형도 제시되고 있다. 국방부가 고려하고 있는 유급병사제를 대폭 확장한 개념으로 군사전문가 김창주 박사의 주장이다. “원하는 사람에겐 유급병사제도의 기회를 주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귀향해 향토방위 업무를 담당케 한다”는 것이다.

모병제는 그러나 아직 완강한 반대에 직면해 있다. 모병제의 전제가 되는 군 전력 강화 계획이 전무하고 무엇보다 천문학적인 재정 마련이 아직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송영선 의원은 모병제를 도입하면 현재보다 연간 6조 원의 인건비가 더 소요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재원 마련 계획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모병제 실시는 아직 불가능한 담론이라는 것이다.

‘빈민의 직업군대’ 신랄한 반론

모병제에 대한 더 근본적이고도 신랄한 반론은 ‘빈민의 직업군대론’이다. 육체 노동자 계급의 탈출구로 전락한 미국의 모병제가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미군은 미국의 엘리트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건국 초기의 미덕이 사라졌다. 미국 군대에는 시민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정치·문화적 태도가 죽어버리고 대신 하나의 거대한 군사 이익 집단이 들어서고 있다. 모병제가 실시되는 순간 대한민국 사회의 양극화는 절정에 이른다. 빈민의 자제들만이 전장의 죽음을 담보로 총을 잡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모병제는 이처럼 다양한 사회심리학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뜨거운 감자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첨단, 정예군’을 육성할 수 있느냐다. 정창인 재향군인회 안보연구소 연구위원은 ‘군 전력 증강 차원’에서 인력 충원제도가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첨단 무기체계를 검토해 미국의 스트라이크 부대와 같은 전문적 직업군을 양성하고 6·25 때와 다름없는 보병사단은 점차 줄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흥미로운 역설은 ‘모병제’를 가장 지지하는 집단의 성격이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징집대상자, 그리고 그들의 부모와 가족이 대체로 모병제를 지지한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모병제가 철저한 연구와 준비 없이 시행됐다가는 국가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상호 배제와 양극화의 싸움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모병제는 그래서 당분간은 건드릴 수 없는 대한민국의 ‘급소’로 남아 있다.



징병제 폐지 “프랑스 국민 59%가 불만”

2001년 6월 27일 프랑스 대통령궁과 총리실은 역사적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징병제 폐지와 100% 모병제의 전격 실시가 발표된 것이다. 1793년 근대적 징병제를 처음 실시한 국가가 바로 프랑스였다는 점에서 이날 발표는 더욱 의미심장했다.
1700년대 말 대혁명 후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와 전쟁을 치러야 했던 프랑스는 18~25세에 달하는 모든 미혼 남성을 징집해 전쟁터로 몰고 갔다. 당시 프랑스 국민군이 연전연승했던 비결이 바로 징집제였다는 분석도 있다. 국민군의 전투력과 규모가 용병과 소규모 직업군에 의존했던 다른 왕조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징병제 폐지를 처음 결정한 것은 1996년 군사개혁법이 발효되면서부터다. 징병제 폐지 전 프랑스군 사병의 복무 기간은 10개월, 그것도 다양한 대체 복무제도가 존재해 실제 군에 입대하는 사병들의 숫자는 전체 징집 대상자의 3분의1에 불과했다. 당초 2002년 2월까지 징병제를 폐지하려 했지만 모병제 전환이 순조롭게 이뤄져 18개월이나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

프랑스가 징병제를 폐지한 가장 큰 이유는 구소련의 붕괴로 주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 첨단 무기체계의 도입, 의무병 제도에 대한 국민적 동의가 사라진 것도 폐지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프랑스군의 징병제 폐지가 전 국민의 동의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사회의 일각에서는 “징병제 폐지로 국민 통합의 중요한 보루가 사라졌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05년 11월 무슬림들의 인종 폭동 역시 이와 같은 국민 통합의 메커니즘이 사라진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올해 프랑스의 한 언론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국민의 59%가 징병제 폐지에 아쉬움을 나타냈고 이미 복무를 마친 35세 이상의 남성들이 특히 징병제 폐지에 불만을 표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무 기간 단축이나 모병제 실시 공약이 선거에 반드시 유리하게만 작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모병제를 근간으로 하는 프랑스 군 개혁이 성공적이었느냐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천문학적인 인건비 부담으로 국방개혁의 핵심인 신형장비 획득이 어려워졌다는 분석도 있다. 민간은행의 자금까지 동원해 군 개혁을 추진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무리한 병력 감축으로 전투력이 약화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2005년 방한했던 자크 루디에르 프랑스 국방부 사무총국장의 자신감은 대단하다. 1996~2015년 3단계 프랑스 국방개혁 과정의 핵심인물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병력감축과 모병제 전환이 변화된 안보환경에 적응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기홍〈객원기자〉 glutton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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