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당하는 생명계를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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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캠프의 열정을 담은 야심작 ‘한살림 선언’… 지구환경에서 우주질서까지 거대담론 집대성

생명운동을 제창한 한살림모임 인사들이 1990년 5월 해월 선생 묘비 제막식에 참서한 후 기념촬영했다.

생명운동을 제창한 한살림모임 인사들이 1990년 5월 해월 선생 묘비 제막식에 참서한 후 기념촬영했다.

"인류가 자유, 평등, 진보의 깃발 아래 피와 땀을 흘리면서 이룩해온 오늘날의 문명 세계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 반면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고 나아가서 인류의 생존 기반이 되는 지구의 생태적 질서를 훼손시키고 파괴하고 있다….”

‘한살림 선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약 5만 자(소책자로 80쪽)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의 이 선언은 ‘원주 캠프’의 세계관과 가치관, 사회 개혁에 대한 열정을 담은 야심작이었다. 12년의 모색, 1년 4개월의 준비, 11차례의 모임, 4차례의 토론을 거쳐 장일순(재야 서예가, 1994년 작고)·박재일(현 한살림 회장)·최혜성(전 통일원 상임연구원)·김지하(시인,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등이 정리하고 최혜성이 대표 집필해 완성했고, 이를 1박2일의 합숙 연수를 통해 채택한 것이었다.

1989년 10월 29일 대전 신협연수원에서 열린 ‘한살림모임’ 창립총회에서 발표된 이 선언은 그 형식부터가 거창했다. 한살림모임의 활동가였던 윤형근(현 모심과살림연구소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공산당 선언’보다 꼭 1쪽이 더 많은 분량이다. 그는 “어른들이 ‘공산당 선언’보다 1쪽 더 많게 하자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최근 회고했다.

인간과 사회의 전면적 변화 지향

20세기를 풍미했던 ‘공산당 선언’을 극복하자는 뜻이었을까. ‘한살림 선언’은 21세기의 중요 화두가 된 지구환경 문제에서 산업문명, 나아가 우주질서에까지 이르는 거대 담론을 집약했다. 그 핵심 주제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소외·분열시키고 억압·파괴하는 ‘죽임의 질서’인 산업문명 전반에 대항하여 생명을 총체적으로 살리는 사회운동, 즉 인간과 자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의 전면적 변화를 지향하는 생명운동”이었다.

한살림이란 ‘하나’ ‘전체’ ‘함께’라는 뜻의 ‘한’과 ‘살려낸다’ ‘산다’라는 뜻의 ‘살림’의 합성어라는 게 이들의 작명 취지였다. 풀어서 말하면 ‘모든 생명을 함께 살려낸다’ ‘생명의 가치관·세계관으로 온 생명이 한집살림 살듯 더불어 살자’라는 의미였다(한살림, 한살림 10년을 돌아보며, 1996년).

이런 내용을 담은 ‘한살림 선언’은 좁게는 서울 제기동 쌀가게의 개업 취지문이자 ‘원주공화국’의 헌법과 같은 것이며, 넓게는 이들이 추구하는 생명운동의 강령이자 생명사상의 교리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듯 박재일이 서울 제기동에 개업한 ‘한살림농산’은 단순한 쌀가게가 아니었다. 농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혁명’의 전위나 다름 없었다. 농민운동을 하다가 농촌이 해체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민주화보다는 가치관, 생활양식, 문명의 문제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한 것이었다. 박재일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물질의 자연순환 전통은 비료·농약이 들어오면서 다 깨졌다. 메뚜기·거미가 없어지고 잠자리도 숫자가 주는 등 생태계 파괴가 이미 깊숙이 진행됐는데 (농약공해로) 사람들이 쓰러지고 나서야 깨닫게 됐다. 이걸 해결하지 않고서는 농민이 제대로 살기 어렵고 지속적인 생산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민주화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환경운동사에서 한살림의 위치는 독특하다. 환경운동연합(당시 공해추방운동연합)·녹색연합(당시 푸른 한반도 되찾기 시민의 모임)·환경정의(당시 경실련 환경개발센터) 등 주류 환경운동 조직은 주로 개발사업을 저지하고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 행동이나 압력을 행사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제도의 변화를 통해 사회체계를 바꾸려는 것이었다.

반면 한살림은 좀 더 근본주의적이고 생태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즉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통해 사회의 문화체계와 가치체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구도완, 환경운동: 반공해운동에서 생명운동까지, 한국시민사회운동 15년사, 시민의신문). 따라서 ‘이슈 파이팅’이나 ‘캠페인’과 같은 방식보다는 생활실천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활동가에 대한 호칭부터 달랐다. 일반 활동가는 ‘살림꾼’, 대표인 박재일은 ‘큰 살림꾼’이라고 불렀다.

초기 한살림 운동가들. 왼쪽부터 이순로·김영원·이상국·조희부·윤형근.

초기 한살림 운동가들. 왼쪽부터 이순로·김영원·이상국·조희부·윤형근.

생활실천운동과 생명문화운동 병행

한살림의 운동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하나는 생명을 중시하는 삶을 직접 실천하는 ‘생활실천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가치와 이념을 전파하는 ‘생명문화운동’이었다. 한살림 운동은 이러한 실천운동과 이념운동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가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게 ‘원주 캠프’의 생각이었다.

운동이란 같은 생각과 목표를 가진 지도부 조직을 구성한 연후에 실천 조직인 집행기구를 두는 게 일반적이다. 한살림 운동은 그 반대였다. 실천 조직이 먼저 가동됐다.

생명의 뿌리인 땅을 되살리기 위한 첫 걸음은 비료·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 것, 즉 유기농업이다. 그러나 유기농으로 지은 농산물은 소출이 적고 비쌀 수밖에 없다. 사줄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가운데 하나가 도·농 직거래였다.

‘원주 캠프’가 도·농 직거래를 시작한 것은 1985년 6월 24일 원주소비자협동조합(초대 이사장 박재일, 현 원주한살림소비자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다. 박재일이 ‘총대’를 메고 이 일을 추진했고, 이것이 서울 제기동 한살림농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살림이 초기에 공급한 품목은 충북 음성 성미마을의 쌀, 강원 횡성 공근마을의 유정란과 원주의 참기름 등이었다.
원주소협과 한살림농산의 성과가 1988년 4월 21일 창립된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초대 이사장 이순로)이었다.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한살림에 물품을 공급하던 생산자들의 모임인 한살림공동체생산자협의회(초대 회장 김영원)가 조직됐다.

당시 ‘무공해’를 표방하고 직거래 형태로 농산물을 취급하던 업체나 단체는 한살림 외에도 여럿 있었다. 국민건강연구회, 좋은쌀집, 풀무원식품, 두레유통, 향촌원, 한국유기자연농업연구회, 정농회, 신안회,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 국민건강관리연구지도회, 자연식동호회, 한국유기농업생산·소비자연합회 등이었다(월간경향 1987년 4월호, 새밥상 운동 ‘한살림’ 가족).
이 가운데 사업과 운동이라는 두 측면에서 모두 성공한 곳으로는 한살림이 대표적이다. 한살림은 현재 13만 가구가 가입하고 있으며 연간 약 1000억 원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사업과 운동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잘 조화시킨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업에 너무 치중하면 운동이 죽고, 운동을 강조하다 보면 사업이 죽는 게 보통이다. 한살림은 소비자 조직인 소협, 생산자 조직인 생협, 유통조직인 한살림농산 등 사업조직의 틀을 갖춘 뒤에야 본격적인 ‘운동’에 들어갔다. 한살림의 이념을 확립하고 전파하는 운동조직이 바로 1989년 10월 ‘한살림 선언’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한살림모임이다.

한살림모임의 시작은 1988년 6월 25일 발족한 한살림연구회 준비모임이다. 이 모임이 5차례 사전 모임 끝에 1989년 1월 한살림모임 창립준비위원회로 발전했고, 11차례의 공부모임과 4차례의 자체토론회를 거쳐 그해 10월 28일부터 대전 신협연수원에서 1박2일 동안 창립대회를 가지면서 ‘한살림모임’으로 정식 출범했다.

생명사상을 꽃피운 ‘원주 캠프’ 는 주류 환경운동권의 최열과도 깊이 교감했다. 1989년 여름 김지하·최열·이부영·장일순(왼쪽부터)의 치악산 산중대담.

생명사상을 꽃피운 ‘원주 캠프’ 는 주류 환경운동권의 최열과도 깊이 교감했다. 1989년 여름 김지하·최열·이부영·장일순(왼쪽부터)의 치악산 산중대담.

서울 서소문 대한일보 빌딩 7층에 위치한 한살림모임 사무실에 출입한 주요 멤버는 장일순 선생을 비롯해 김지하·박재일·최혜성·김영주(전 신협연수원장) 등 ‘원주 캠프’의 핵심들이었다. 여기에 김민기(현 극단 학전 대표)·김상종(현 서울대 생명공학부 교수)이 참여했고, 공추련 의장이던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도 자주 들락거렸다.

‘한살림선언’을 대표 집필한 최혜성은 박재일과 함께 2차 민비연 사건(일명 몰로토프 칵테일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바 있는 서울대 문리대 6·3세대의 핵심 중 한 명이다. ‘아침이슬’ 작곡자이며 19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이던 김민기는 장일순·김지하의 서울대 미학과 후배라는 인연으로 ‘원주 캠프’와 결합했다. 한살림모임은 박재일 의장, 김지하 연구위원장, 최혜성 사업위원장, 김민기 사무국장 체제로 출발하게 된다. 장일순 선생은 고문으로 참여했다.

한살림 운동의 현장 활동가로는 소협과 생협의 주축인 이순로·김영원 외에 이상국(현 한살림사업연합 대표)·조희부(현 한살림서울 감사) 등을 빼놓을 수 없다. 가톨릭농민회 홍보부장을 맡고 있던 이상국은 귀농하려다 박재일의 강권으로 한살림에 참여, 생산 부문과 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정작 자신은 대구가 직장인 부인과 ‘딴살림’을 하면서까지 한살림 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희부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YMCA 농촌부 간사를 하다가 귀농, 농민운동에 투신한 경우다. 그는 한살림에 유정란을 공급한 눈비산마을의 개척자이자 한살림 운동과 생명사상의 전도사 역할을 했다.

한살림모임 멤버 중에 이색적인 인물은 윤형근이다. 연세대 국문과 82학번으로 당시 반공해운동권의 주축과 비슷한 세대인 그는 서소문 사무실에 제발로 찾아가 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동년배 운동권이 거의 택하지 않던 생명운동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이채롭다. 다음은 한살림모임 준비 과정부터 참여해 실무를 담당했던 그의 생명운동 입문 동기.

“김지하 선생을 좋아했다. ‘밥’ 등이 책으로 나오기 전에 구해서 보았고, 그 내용에 매료됐다. 그런 인연으로 대한일보 빌딩에 박재일 회장을 찾아가 ‘방위 가기 전에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여기 일이나 시켜주세요’라고….”

한살림모임이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국내 운동권은 사회 변화에 낙관적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의 성공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던 시기였다. 어떤 변화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운동권 내부에 퍼져 있었다. ‘원주 캠프’는 이런 ‘혁명적’ 열기 속에서 이미 그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운동을 모색한 셈이다.

새로운 생태주의 세계관 주창

이들은 자본주의는 물론 공산주의도 ‘미래가 없는 낡은 세계관’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살림 선언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도 강하게 담겨 있다. 이들이 주창한 새로운 세계관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생태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근저에는 동학의 시천(侍天) 사상을 현대화한 장일순 선생의 ‘모심(侍) 철학’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 김지하가 동학·증산교·정역 등을 토대로 한국 민중종교 전통 속에 담긴 생명사상을 재해석한 ‘후천개벽’ 사상이 녹아들어 있었다.

생활실천운동을 보완하는 생명문화운동의 주체로 등장한 한살림모임은 출범 후 기존 환경운동이 한 것과 비슷한 활동을 전개한다. 생명사상을 전파하고 생활협동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한살림 강좌’를 개설하고 무크지 ‘한살림’을 발행했다. 1990년 4월 22일 ‘지구의 날’ 행사를 공추련·YMCA 등과 함께 주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살림모임이 추진한 생명문화운동은 겉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 장일순 선생이라는 강력한 구심점과 김지하의 명성, 박재일의 실천력 등 어느 운동체도 갖추기 어려운 역량을 보유하고서도 4년이 안 돼 1993년 문을 닫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흙으로 돌아가고 김지하는 생명살림운동, 김민기는 학전, 윤형근은 크리스챤아카데미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한살림모임은 공중분해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한살림 운동은 박재일이 담당한 생활협동운동체만 남게 되는데, 1994년 6월 사단법인화한 한살림이 생명문화운동의 기능을 흡수하게 된다. 이 기능은 다시 2002년 한살림 산하에 설립된 모심과살림연구소가 이어받는다.

거창하게 시작한 한살림모임이 좌초한 것은 무엇보다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재일은 “운영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이 가중돼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최근 회고했다. 깊이 있고 앞선 혜안으로 출발한 생명문화운동의 실패는 환경운동 진영에 좋은 귀감이 될 법하다. 환경운동권의 생명운동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던 최열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분석했다.

“한살림은 사업을 통해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운동이 사업의 성격을 띠면 운동 자체는 죽는다고 생각했다. 신협도 좋은 운동이었는데 금융사업을 하면서 운동이 죽는 결과를 가져왔다. 운동은 어디까지나 운동이 중심이 돼야 한다.”

두 번째는 운동의 구체성과 현장성이다. 아무리 좋은 이념도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현장에 파고들 실천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열의 얘기를 더 들어보면…

“한살림모임의 주축이 선배그룹이었다. 선배그룹은 머리는 많은데 발이 없었다. 우리는 생각이 달랐다. 현장 중심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야 지역 주민도 참여하고 시민도 관심을 보이고 이슈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한살림모임은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문명을 바꾸자’고 했다.”

한살림모임 의장 박재일, 연구위원장 김지하, 사업위원장 최혜성, 사무국장 김민기(왼쪽부터).

한살림모임 의장 박재일, 연구위원장 김지하, 사업위원장 최혜성, 사무국장 김민기(왼쪽부터).

최열, 이부영의 ‘원주캠프’ 방문

‘원주 캠프’는 최열과 간단치 않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같은 강원도인 데다가 정성헌(현 남북강원도협력협회 이사장)을 고리로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시절 가톨릭농민회와 농촌공해 조사를 함께 한 전력이 있었다. 1976년 최열이 안양교도소에서 공해추방운동을 결심했을 때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지한 인사가 이부영(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김지하였다. 그 뒤에는 장일순 선생이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1989년 여름 최열은 이부영과 함께 원주 캠프를 찾았다. 두 사람은 장일순·김지하와 함께 치악산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토론을 하기도 했다. 최열은 공추련을 이끌며 본격적인 반공해운동을 펼칠 때였고, ‘원주 캠프’는 생명운동을 위한 한살림모임을 한창 준비하던 시기였다. 다음은 최열이 기억하는 ‘원주 캠프’와의 산중대담 장면.

“장일순 선생은 1979년 징역 살고 나와서부터 자주 뵈었다. 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들고 나서도 그분의 생각이 우리하고 제일 잘 맞았다. 항상 하는 말이 ‘열이가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다는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것 중요하니까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그림)도 보내주고 많이 도와줬다. 항상 웃는 표정이었고 화를 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앞선 생각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생명운동을 지향했던 한살림모임은 일시 좌초하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중단이 아니었다. 지역한살림모임으로 확산되면서 생태환경운동에 불을 붙였다. 1991년 대구한살림 기관지를 자처하며 창간된 ‘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주류 환경운동에 미친 영향이었다. 생명운동의 ‘교주’ 격인 김지하가 환경단체의 통합에 관여하면서 리우회의 이후 급변한 국내 환경운동의 패러다임을 또 한 번 뒤집는 결과를 낳는다. 최열과 김지하의 담판이 시작될 무렵 한국 환경운동은 가위 ‘혁명적’ 상황에 돌입하게 된다.

<신동호 NIE연구소장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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