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푸르른 날 그리운 사람’의 봉사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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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운수(주) 정행권 회장, 사업 욕심보다 더 큰 희생정신 실천으로 후회 없는 삶

정행권 회장은 큰 출세를 하진 않았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행복하다고 말했다.

정행권 회장은 큰 출세를 하진 않았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행복하다고 말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거센 바람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인 것처럼, 이 사회를 바꾸는 힘은 권력이 아닌 희생에서 나온다. 여기 한 평생 희생정신을 가지고 사회 봉사자의 길을 걸어와 이제 그 길 끝에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부산의 대표적인 상공인이자 사회 봉사자로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정행권 회장이다.

그의 약력을 적자면 이력서 두 장이 빼곡히 채워진다. 부산가스개발(주) 대표이사, 협성운수(주) 대표이사, 부산시체육회 펜싱협회 회장, 부산시청 자문위원, 고려가스산업(주) 대표이사, 부산시체육회 이사, 부산경영자협회(사) 부회장, 부산컨트리클럽(사) 이사장, 제16대 부산상공회의소 수석 부회장 등.

유년시절 어려움 잊지 못해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부산의 경제를 움직였던 그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여유로운 노년을 맞이하고 있다. 아직도 사업을 하기에 육체적·정신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지만, 새롭게 도전하는 젊은 일꾼들을 위해 한 자리라도 양보해주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다. “부산상공회의소는 부산의 발전과 비전을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일해야 하는 곳인데 늘 같은 사람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이제 아이디어도 바닥났습니다.” 털털한 웃음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서 후배들을 위하는 진심어린 마음이 느껴졌다. “변화가 없으면 발전도 없어요.” 그는 부산의 발전을 위해 변화가 필요하고, 변화를 위해 후배들이 활동할 길을 터주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협성운수를 이끌고 있는 정윤성 사장은 사업의 다각화를 모색하며 기존 사업체들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노력을 다하고 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협성운수를 이끌고 있는 정윤성 사장은 사업의 다각화를 모색하며 기존 사업체들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노력을 다하고 있다.

높은 지위에 여러 번 올랐지만 변치 않는 희생정신으로 사회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남해군 창선면으로, 섬마을 중에서도 깊은 섬마을이었다. “지금 남해에 삼천포와 창선을 잇는 다리가 생겼죠? 그건 정말 천지개벽한 일입니다. 저 어릴 때는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 집에 들어가려면 동력선으로는 한 시간, 노 젓는 배로는 두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르는 듯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다닌 후에 부산 경남 중학교로 오게 되었어요. 부산에 유학을 온 셈이죠. 그땐 그것이 지금 미국 유학 가는 것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가 1950년. 한국전쟁과 함께 학창시절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왔고, 부산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때부터 그는 장사꾼이 되기로 결심한다. 4대 장손 집안 장남으로 태어난 그에겐 짊어져야 할 집안의 빚도 많이 있었다.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지금도 생각나요. 미아리에서 화원을 하던 집이었죠.” 그는 그 집에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있었고, 한 여류시인의 책을 팔아주며 배달을 해주는 일도 6개월 정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을 통해 그는 ‘노력하면 수입이 생긴다’는 장사꾼의 기본 마인드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런 어려움과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가 지금의 정행권 회장을 있게 했다.

“그래도 전 행복합니다”

유년시절뿐 아니라 사업을 시작한 후에도 어려움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고생스럽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그래. 이까짓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지. 더 어려워져라. 누가 이기는지 보자.” 그런 그이기에 젊은 후배들에게 가장 중요한 당부의 말로 강한 정신력을 꼽았다. “예전에 비해 한국 경제가 많이 변했지만 지독한 각오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높은 이상과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해야만 합니다. 제가 활동할 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했죠. 요즘은 세상을 너무 쉽게 살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행을 바라며 높은 위치로 허세나 부리는 젊은 사업가가 많은데, 그건 마치 장님이 낭떠러지 바로 앞에 서있는 것과 같아요. ‘아차’ 하는 순간 바로 떨어지죠.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정행권 회장은 손자·자녀들에게 남겨줄 선물 ‘푸르른 날 그리운 사람’ 이라는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정행권 회장은 손자·자녀들에게 남겨줄 선물 ‘푸르른 날 그리운 사람’ 이라는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장남인 정윤성 사장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했다. “모든 면에서 훌륭하십니다. 어느 하나 흠잡을 부분이 없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대외적으로 많은 봉사를 하고 사회에 큰일을 하셨지만 정작 아버지 자신의 사업은 요령껏 챙기지 못하셨다는 거죠.” 사업가로서 욕심부리지 않고 정도만 걸어왔다는 것이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단점 아닌 단점이라고 한다. 사업가라면 때론 욕심도 내야 하고 자기의 이익도 챙길 줄 알아야 하는데 정 회장은 너무 정직하게만 살아왔단다. 그래서 사회 봉사자로서의 명성에 비해 사업가로서 그가 가지는 이익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전 행복합니다.” 인생의 깊은 골이 패인 얼굴로 그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 해도 될까요. 짧지 않은 제 인생을 돌아보면 ‘이때는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없습니다. 제 주위 사람들이 저를 평가했을 때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식들, 손자·손녀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 주는데,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 행복한 인생 아닙니까?”

인생의 길 끝에서 황혼을 바라보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는 멋진 할아버지로서 손자·손녀들에게 줄 가장 값진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푸르른 날 그리운 사람’이라는 자서전이다. 그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자신이 걸어온 역경의 길, 봉사의 길, 그리고 행복의 길을 모두 남겨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다.

‘그래, 청춘은 다 가고 빈 바구니만 남았더라도 그 또한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으리라. 비록 빈 바구니일망정 할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일경’이 아닌 ‘일구’라도 되어 전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이랴.’ (자서전 ‘푸르른 날 그리운 사람’ 중에서)

<부산·울산·경남본부/조현진 기자 jh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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