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1세기 세계가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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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국 역사침탈과 패권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중심 철학은 ‘단군’

[조명]‘홍익인간’ 21세기 세계가 원한다

이념 대결의 시대가 끝나고 새 천년이 시작된 지 5년이 지난 지금 우리 한민족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닥친 듯하다. 미국의 묵인 하에 재무장을 가속화하는 일본은 역사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을 통해 패권주의적 야욕을 드러냈고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사에 이어 고조선과 발해사까지도 중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역사침탈과 왜곡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길 형편이다. 현재 주변 정세를 살펴보면 대한제국을 놓고 열강이 각축을 벌였던 100여 년 전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100여 년 전 상황 흡사한 요즘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중심가치와 중심철학을 회복하는 일이다. 한민족의 중심가치와 중심철학은 전통문화에서 나온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오랜 외침과 역사왜곡으로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외래사상과 외래문화에 젖어 우리 민족 본래의 정신과 가치를 잃고 만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적 자긍심과 정체성까지도 잃었다. 이제 이를 회복해야 한다. 전통문화가 없는 민족은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발전할 수 없으며, 미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문화의 핵심은 우리 민족이나 국가의 고유한 정신이고 철학이다. 민족의 중심가치, 중심철학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연구·교육하고 알리는 것이 국학이다. 유교나 불교처럼 외국에서 들어와 한국화한 외래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국학이 아닌 한국학이다.

우리 국학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는 천부경과 홍익인간 정신, 국조(國祖) 단군이다. 81자에 우주의 생성·진화·완성의 원리를 담은 천부경은 한민족의 경전이며, 천지인 사상과 홍익인간 정신의 바탕을 이룬다.

국학 연구 발전에 국가가 나서야

친근감을 풍기는 대형 단군상 옆에 서 활짝 웃고 있는 조각가 이홍수씨.

친근감을 풍기는 대형 단군상 옆에 서 활짝 웃고 있는 조각가 이홍수씨.

세계화 시대에 단군과 국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인류가 염원하는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중화사상이나 황국신민사상은 국수주의적이며 패권적이라 당사국에는 이로울지 모르지만 이웃 국가에는 큰 불행을 가져다준다. 평화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사상에서 보듯 한민족의 국학은 평화적이고 보편적이며, 21세기 세계가 요구하는 철학이다. 실제 홍익인간 정신을 접해본 외국인들은 크게 감동하며 그 같은 위대한 철학이 한국 전통문화 속에 있다는 점에 놀란다.

우리에게는 한민족 전통문화와 중심철학을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책무가 있다. 천안 흑성산에 있는 국학원에서는 공무원, 기업체 임원, 직장인,단군은 한국인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한국사에 있어 단군에 관한 논의는 ‘역사적 실체로서 단군에 대한 연구’와 ‘각 시기 단군에 대한 선인들의 단군인식’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지만 양자를 혼동하거나 한 측면만을 중시해 문제가 야기된 사례도 흔했다. 역사적 실체로서 단군은 ‘삼국유사’가 가장 오랜 기록이다. 고려 충렬왕(1274~1308) 때 중 일연은 ‘단군이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다 기자가 조선으로 오자 장당경으로 옮긴 뒤 1908세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고조선 멸망으로부터 1000여 년 이상 지난 13세기 중반에 서술돼 사료적 가치가 퇴색했다.

비슷한 시기인 1287년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도 있다. 전체적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지만 단군의 모계와 개국연대, 기자 계승론 등에서 다소 인식차가 드러난다. 14세기 권근은 ‘응제시’에서 ‘요 원년 단군이 단목 아래 내려와 조선의 왕이 되었고 후손들이 천년 이상 왕위를 이어갔다’고 기록했다. 신비한 출생과정이 생략되고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것으로 기록한 것이 달라진 점이다.

세종대 ‘세종실록’ 지리지에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을 쌓고 태자 부루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에 참석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성종 6년 편찬된 ‘삼국사절요’와 성종 15년의 ‘동국통감’도 단군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와 조선을 개국했으며 기자 도래 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고 기술했다. 동국통감이 본기가 아닌 외기에 기술해 사료적 가치를 떨어뜨린 점은 눈여겨봐야 한다. 성종 17년 ‘동국여지승람’에선 단군릉의 위치까지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16세기 사림세력 등장 이후 사대의식이 팽배해지며 ‘동국지리지’(한백겸)나 ‘동국통감제강’(홍여하) 등에선 민족의 근원을 단군으로 보는 데 의문을 제기한 뒤 후손이 끊어진 동이족 계열 국가 중 한 곳으로 보는 견해가 팽배해졌다. 다행히 이런 견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난을 겪으며 민족의식이 강화된 뒤 극복되는 듯했다. ‘동사’(허목·1667년)와 ‘동사’(이종휘·1780년) 등에선 고조선을 원시시대가 아닌 진일보한 문명을 지닌 국가체로 강조했다. 특히 이종휘는 18세기 실학자들의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고증주의 성향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문헌 고증학은 단군에 대한 기록들을 신빙성이 없다며 신뢰하지 않는 경향을 보여 아쉬움을 주고 있다. 군인, 학생 등을 대상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수련을 하고 있으며 미국 북애리조나 한인회와 함께 전통문화를 해외에 알리기 위한 세도나 한국민속문화촌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 국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 우리의 국학을 더 많은 국민에게 교육해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학문이 되도록 해야 하며, 민족의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해야 한다. 한민족의 새로운 탄생과 지구경영이 필요한 시점이며 그 뿌리가 우리의 국학에 있기 때문이다.

이택휘〈국학원 원장·전 서울교대 총장〉



단군을 전하는 국내 사료들

단군은 한국인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한국사에 있어 단군에 관한 논의는 ‘역사적 실체로서 단군에 대한 연구’와 ‘각 시기 단군에 대한 선인들의 단군인식’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지만 양자를 혼동하거나 한 측면만을 중시해 문제가 야기된 사례도 흔했다. 역사적 실체로서 단군은 ‘삼국유사’가 가장 오랜 기록이다. 고려 충렬왕(1274~1308) 때 중 일연은 ‘단군이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다 기자가 조선으로 오자 장당경으로 옮긴 뒤 1908세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고조선 멸망으로부터 1000여 년 이상 지난 13세기 중반에 서술돼 사료적 가치가 퇴색했다.

비슷한 시기인 1287년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도 있다. 전체적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지만 단군의 모계와 개국연대, 기자 계승론 등에서 다소 인식차가 드러난다. 14세기 권근은 ‘응제시’에서 ‘요 원년 단군이 단목 아래 내려와 조선의 왕이 되었고 후손들이 천년 이상 왕위를 이어갔다’고 기록했다. 신비한 출생과정이 생략되고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것으로 기록한 것이 달라진 점이다.

세종대 ‘세종실록’ 지리지에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을 쌓고 태자 부루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에 참석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성종 6년 편찬된 ‘삼국사절요’와 성종 15년의 ‘동국통감’도 단군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와 조선을 개국했으며 기자 도래 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고 기술했다. 동국통감이 본기가 아닌 외기에 기술해 사료적 가치를 떨어뜨린 점은 눈여겨봐야 한다. 성종 17년 ‘동국여지승람’에선 단군릉의 위치까지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16세기 사림세력 등장 이후 사대의식이 팽배해지며 ‘동국지리지’(한백겸)나 ‘동국통감제강’(홍여하) 등에선 민족의 근원을 단군으로 보는 데 의문을 제기한 뒤 후손이 끊어진 동이족 계열 국가 중 한 곳으로 보는 견해가 팽배해졌다. 다행히 이런 견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난을 겪으며 민족의식이 강화된 뒤 극복되는 듯했다. ‘동사’(허목·1667년)와 ‘동사’(이종휘·1780년) 등에선 고조선을 원시시대가 아닌 진일보한 문명을 지닌 국가체로 강조했다. 특히 이종휘는 18세기 실학자들의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고증주의 성향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문헌 고증학은 단군에 대한 기록들을 신빙성이 없다며 신뢰하지 않는 경향을 보여 아쉬움을 주고 있다.

<오상도 기자 sdoh@kyunghyang.com>

인터뷰/조각가 이홍수씨

“내 손으로 단군상 1만5000여 기 빚어”

이홍수씨가 정성을 들여 대형 단군상을 빚고 있다.

이홍수씨가 정성을 들여 대형 단군상을 빚고 있다.

“숭배 대상보다 역사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우는 존재가 됐으면 합니다.”

‘단군을 빚는 남자’. 조각가 이홍수씨(50)는 남다른 별명을 갖고 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평생 단군상을 만들어야 할 자신의 운명을 깨달아버린 이씨이기에 이상할 것도 없다.

이씨는 지난 10년간 쉼 없이 단군상을 빚어온 전문 조각가다. IMF 환란 직후(1997년) 한 시민단체가 “단군상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을 수락한 뒤 천직이 됐다. 첫 인연을 맺은 뒤 만들어온 단군상만 1만5000여 기. 국민성금과 시민단체 도움으로 각급 학교와 공원에 설치한 369기의 단군상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다. 단순히 원 형태를 만든 뒤 작품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관련사료까지 뒤져 철저하게 고증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인물상이기에 철학·생활방식은 물론 이미지까지 표출되어야 한다.

이씨는 원래 설치미술을 작업하던 중견작가였다. 홍익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조소와 조각을 전공한 뒤 미술계에 발을 들였다. 그러던 이씨가 단군상의 매력에 푹 빠져 남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특이하다. “처음 생활고도 한몫했지만 작업을 반복하며 깨달음이 생겼다. 뭐가 와도 받아들이고 배우며 터득해갔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단군상을 만드는 일이 늘 기쁨만 가져다준 건 아니었다. 각급 학교에 단군상을 설치한 뒤 ‘단군상의 목이 잘렸다’는 비보가 들이닥친 것. “아이들에게 상처입은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 아팠다”는 게 이씨의 전언이다. 이씨는 손수 단군상 보수에 나서며 상처를 씻어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미 애리조나 세도나에 단군상을 설치한 일. “바다 건너에 설치했기도 하지만 단군상 컨테이너를 실은 트레일러가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전했다.

이씨는 최근 단군 표준영정의 날카로운 인상을 놓고 논란이 인 데 대해선 “영정이 날카롭고 일반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친근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며 “(나도) 처음에는 무거운 이미지의 동상을 주조했지만 최근에는 캐릭터상을 만들 만큼 친근감을 강조하고 있다”며 친숙한 단군상 제작을 강조했다.

<오상도 기자 sdo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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