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가 처용리에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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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페놀 사건(4)

대구로 낙향한 이재용의 선택… 대구공추협 조직, 페놀 피해자 ‘끝까지’ 지원

대구공추협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울산 남구 황성동 개운포 해중의 처용암. 건너편이 온산읍 처용리로 온산공단이 들어서 있다. <경향신문>

대구공추협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울산 남구 황성동 개운포 해중의 처용암. 건너편이 온산읍 처용리로 온산공단이 들어서 있다. <경향신문>

지금은 울산광역시에 편입된 옛 경남 울주군 온산면에 처용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동해와 접한 외황강 하구의 낮은 평지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신라 때 처용이 처음 나타났다는 처용암이 있던 곳이다.

처용이 간 지 100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이곳에 찾아왔다. 주말이면 나타나 처용리 일대를 배회하는 그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마을 주위를 서성이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아니,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한참 뒤였다. 1981년 대구에 ‘처용’이라는 극단이 창단됐다. 극단 대표는 치과의사 이재용(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었고, 그가 바로 처용리를 구름처럼 떠돌던 그 의문의 청년이었다.

1991년 노래극 ‘뜨거운 땅’으로 한국연극예술인상을 받게 되는 그의 개인사는 처용만큼이나 기구하다. 환경부 장관을 지낸 뒤 지난 5·31지방선거 때 여당 후보로 대구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 건보공단 이사장에 임명된 것이 최근 세상에 알려진 그의 근황이다(이 인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잇따라 단행한 ‘보은인사의 결정판’으로 언론에 회자됐다).

‘서울의 봄’ 치대 학생운동의 축

그가 처용리를 자주 찾은 까닭이 처용에 심취한 한 연극쟁이의 개인적 취향 때문만은 아니었을 듯하다. 그랬다면 이재용이라는 이름이 환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처용과 영적 교감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다른 데 있었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한 그는 경북고를 졸업한 해인 1973년 서울대 치대에 입학했다. 치의학과 처용과 연극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여기에 환경운동이라는 또 하나의 별난 조합이 이뤄질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할 터. 그런데 그것을 가능케 한 시대 상황과 복선이 있었다.

고교 시절 그는 시와 문학에 심취했고 사회의식에도 일찍 눈을 떴다. 경북고 내 지하서클인 ‘청심회’에 가담해 문학과 사회문제에 대해 학습하고 토론하며 사춘기를 보냈다. 치과대학을 선택한 것은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공무원 집안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적어도 번듯하고 안정된 직업쯤은 가져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해는 10월유신 바로 다음해였다. 치대생도 예과 과정은 동숭동 문리대에서 보내게 돼 있었다. 그는 경북고 출신 운동권 선배에 의해 후진국사회연구회(약칭 후사연)에 ‘스카우트’됐다. 후사연은 1969년 태동해 서울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1971년 10·15위수령과 함께 강제 해산됐으나 당시 한국문화연구회(약칭 한문연)라는 이름으로 위장해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1974년 민청학련 사건 후에는 완전 지하화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치과대학은 학생운동의 무풍지대였다. 이 점에서 그는 1970년대 치대 운동권의 대표주자였다. 공교롭게 연세대 치대 운동권이던 김영환(전 과학기술부 장관)도 그와 같은 73학번이다. 두 사람은 1980년 ‘서울의 봄’ 때 치대 학생운동의 양축으로 불렸다.

1973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일어난 10·2데모는 유신 철폐를 요구한 첫 대학생 시위였다. 그 배후에 후사연이 있었고, 이재용은 이 시위에 가담했다가 연행돼 구속된다. 구류 처분을 받았다가 ‘성명 미상 수배자’라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해 12월 구속자 전원 석방과 학사징계 철회라는 정부의 ‘백기항복’에 가까운 조치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유명세를 얻은 것은 1975년 4월이었다. 서울대 농대 김상진 할복 사건을 전후해 대학가 시위가 극에 이르렀을 때인 4월 9일 그는 시위 주동자로 지목돼 또 다시 징계를 받게 된다. 당시 언론에는 무기정학을 받은 것으로 보도됐으나 그는 “1975년 잘리면서는 이제 대학 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했다”고 최근 회고했다.

대구로 낙향한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기관’에서 밀착 감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예 활동 가이드라인까지 설정돼 있었다. 그의 행동반경은 예술·체육 분야에 국한됐다. 그래서 택한 것이 연극이었다. 아라비아 상인 처용이 신라에 온 사연처럼 그가 처용리를 찾게 된 내력은 이렇듯 길고 복잡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복귀한 그는 치대 연극회에서 활동했다. 극단 처용은 1981년 졸업한 후 고향에서 공중보건의로 복무하면서 창단한 것이었다. 바로 이 극단이 대구의 환경운동을 잉태시킨 자궁 격이다.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처용에 심취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자주 처용리를 찾은 그의 행동이 또 하나의 ‘역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구공추협 창립을 주도한 정학·이재용·최병두·송필경(왼쪽부터).

대구공추협 창립을 주도한 정학·이재용·최병두·송필경(왼쪽부터).

“이제는 감방에 가더라도 해야겠다”

처용리는 온산공단이 있는 울주군 온산면의 한 마을이다. 그가 처용리에 드나든 10여 년은 온산공단이 들어서고 그곳의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된 시기였다. 그는 온산의 변화와 그것이 가져온 문제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구는 어떤가. 그의 뇌리에 있던 처용의 자리를 ‘대구’가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대구에 와보니 편서풍 지역인데 공단이 전부 서쪽에 있었다. 금단공단에서 성서공단까지…. 공단에서 뿜어낸 연기가 시내로 들어와 앞산 등에서 푄현상을 일으켰다. 물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영천댐이 생기고 금호강 하류로 흐르는 수량이 10분의 1로 줄었다. 유지수가 줄어드니까 자연히 자정기능을 잃어갔다. 환경이 악화되는 상황을 10년 동안 봐온 셈이다.”

공중보건의 복무를 마치고 1983년 치과병원을 개업한 그는 대구의 환경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할 기회를 노렸다. 1985년 온산병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질 계기가 생겼다고 판단한 그는 사람을 모으는 일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가 1986년에 마련한 사무실은 3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환경운동은 뜻있는 지역인사들에게는 생소한 분야였고, 정부 기관이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는 ‘사회악’으로 취급받았다. 환경문제에 정통한 학자들마저 이와 관련한 대중운동은 부담스럽게 여겼다. 그의 기억을 더듬어보자.

“집사람 모르게 몇백 만 원 꼬불쳐 환경운동을 하려다가 접고 그 돈으로 문화장터 처용소극장을 운영했다. 당시 대구에서는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을 ‘빨갱이’라고 했다.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안 돼 못 하고 있다가 1989년 들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작심하고 연극을 후배한테 물려줬다. ‘이제는 감방에 가더라도 (환경운동을) 해야겠다’고…. 사람들을 규합해 염색공단 폐수 불법방류 사실을 조사해 터뜨리면서 조직을 사회에 드러내려고 준비하고 있던 중에 페놀사건이 터졌다. 페놀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면 아마 감방에 갔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구의 환경운동은 페놀사건의 산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페놀사건은 촉매제에 그쳤음을 그 뒤 역사가 말해준다. 1991년 3월 21일 첫 회합을 가진 ‘대구시수돗물사태시민단체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는 대구경실련·대구YMCA·함께하는주부모임 등 9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기구였다. 이를 주도한 세력은 이재용(당시 집행위원장)을 주축으로 한 대구공해추방운동협의회(이하 대구공추협) 준비모임이었다.

페놀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이미 조직의 틀을 갖추고 있던 이 준비모임은 10여 명의 핵심 인사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재용과 대구대 최병두 교수(지리교육, 현 대구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송필경 연세치과 원장(현 대구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 경북대 임재열, 영남대 이태진·조무환 교수 등이 그들이었고 지역사회운동계의 어른 격인 정학씨(현 참길회 회장)가 이들의 좌장이었다.

이들과 대책회의의 다른 인사들은 페놀사건을 대하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대구공추협 준비모임은 ‘환경운동을 통해 사회를 바꾼다’는 뚜렷한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 페놀사건은 환경문제를 제기할 절호의 기회였다. 따라서 페놀사건 대책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반면 대책회의 안의 다른 그룹은 이런 의도에 강력히 반발했다. 페놀사건 대책 활동은 순수하게 악덕 기업 고발과 피해 보상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게 반대 측의 주장이었다. 즉 페놀사건을 다른 목적에 이용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견해가 현격히 다른 세력으로 구성된 대책회의는 4월 25일 환경처 장·차관이 경질된 후 활동이 급격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대구공추협이 첫 준비위원회를 연 것은 대책회의가 동력을 잃은 5월 9일이었다. 대구공추협은 그로부터 4개월 뒤인 9월 14일 신천 둔치에서 창립식을 가짐으로써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

대구 환경운동의 ‘이판사판’

1991년 3월 25일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페놀사건 규탄 대구시민 궐기대회. 환경처 장·차관 경질 후 대구 시민단체 대책회의는 급격히 활동이 위축됐다. <경향신문>

1991년 3월 25일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페놀사건 규탄 대구시민 궐기대회. 환경처 장·차관 경질 후 대구 시민단체 대책회의는 급격히 활동이 위축됐다. <경향신문>

시민·사회운동의 불모지로 꼽히던 대구에서 목포·부산·울산·광주에 이어 5번째로 강력한 환경운동체가 출현한 것은 놀라웠다. 페놀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되긴 했지만 이재용을 비롯한 초기 환경운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구공추협 원년 멤버 송필경은 대구의 초창기 환경운동을 ‘이판사판’으로 표현했다. 이(理)는 최병두 정책위원장, 사(事)는 이재용 집행위원장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론과 실천에서 두 사람이 환상적인 콤비플레이를 펼친 덕에 대구의 환경운동이 단기간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송필경은 경북고 출신으로 연세대 치대(75학번)를 나와 당시 대구에서 개업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최 교수가 이론을 제공하고 이 원장이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원장이 팔공산 계곡에서 등이 휜 피라미를 잡아왔다. 그걸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사진 찍고 기자 부르고 성명서 내서 여론화시켰다. 한 마디로 이슈 파이팅의 귀재였다. 그렇게 한 건씩 할 때마다 회원이 기하급수로 늘었다.”

대구환경운동연합으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 2년 남짓 존속한 대구공추협은 팔공산의 등 굽은 물고기에 대한 조사, 금호강변 산업폐기물 불법 매립 폭로, 비산염색공단 폐수 방류 사건 대책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팔공골프장이 있는 공산댐 상류의 기형 물고기 조사 활동은 대구 시민에게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경종이 됐다.

이재용 집행위원장과 멋진 콤비를 이뤘던 최병두 정책위원장은 원래 대구 사람이 아니었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부산고, 서울대 지리학과(72학번)를 나와 1989년 대구대 교수로 부임했다. 서울대 학생운동의 ‘전설’로 통하는 김병곤(작고, 민청련 부의장 역임)의 중·고교 동기인 그는 대학 시절 한문연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대구공추협에 관계하기 전에 이미 그는 서울의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과 연결돼 있었다. ‘공간환경’ 전문가(당시 한국공간환경연구회 회장)로서 공추련 강사로 참여한 바 있었다. 뒷날 대구경북환경연구소를 창립하는 등 대구 환경운동에 크게 기여하는 그의 최근 회고.

“대구에 온 지 2년도 안 됐을 때 이재용 원장이 찾아왔다. ‘환경문제를 갖고 뭔가를 같이 해보자’고 했다. 대구공추협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아마 김형기 교수나 최열 의장이 소개했을 것이다. 내가 공추련과 연결돼 있었으니까… 그래서 연구 차원에서 시작했다.”

페놀사건과 대구공추협의 탄생은 환경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현실 속에 보여준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페놀사건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언론도 이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환경운동이 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회 각 분야에서 자발적인 참여가 이뤄졌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분노를 충동하고 거기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다. 실제로 ‘페놀 쇼크’는 2개월이 못돼 잦아들었다. 5월 들어 페놀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시들해지자 서울·대구의 시민대책회의도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이럴 때 가장 답답한 측은 피해자들일 수밖에 없다. 페놀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대구의 임산부들이었다. 페놀사건이 터졌을 당시 4월 말까지 접수된 피해 신고는 총 1만3455건으로 이 중에는 오염된 수돗물을 먹은 뒤 자연유산했거나 기형아 출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공유산을 한 임산부 131명이 포함돼 있었다(대구환경운동연합, 대구환경운동 10년, 2001년). 대책회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이들이 고립되고 만 것이다.

대구공추협이 본격적으로 조직 작업에 들어간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임산부들은 대책회의 등 시민단체의 지원이 끊기자 7월 4일 ‘페놀피해 임산부 모임’(대표 김성분, 이하 임산부 모임)을 결성,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시위, 불매운동, 사례발표회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피해 배상 활동을 벌였다.

페놀피해임산부모임의 대구시청 앞 시위. 페놀사건 후 출범한 대구공추협이 이들의 가장 강력한 지원 세력이었다. <경향신문>

페놀피해임산부모임의 대구시청 앞 시위. 페놀사건 후 출범한 대구공추협이 이들의 가장 강력한 지원 세력이었다. <경향신문>

분노 관리에 실패한 ‘페놀 쇼크’

애초 대구시 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피해 배상을 신청한 임산부는 800여 명이었다(환경분쟁조정은 집단소송을 낳을 중대한 사건을 행정적으로 조정함으로써 갈등을 사전에 중재하는 제도임). 1991년 11월 16일 내려진 조정안(유산·사산에 대해 50만 원 실비 변상)에 불복해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재정신청할 때는 그 숫자가 60여 명으로 줄었다. 그리고 이 조정안 역시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자 결국 16명만 남아 1992년 10월 28일 민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송은 2년여의 지루한 공방 끝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1995년 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의 조정판정으로 종결됐다. 사건 당시 수돗물의 페놀 및 클로로페놀의 농도를 정확히 알 수 없고 이것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온산병에 이어 또 다시 환경문제로 인한 건강 피해 사건이 영구미제로 남게 된 것이다.

임산부들의 이러한 눈물겨운 투쟁을 조직적으로 지원한 단체가 바로 대구공추협이었다. 페놀피해임산부대책위원회(위원장 서홍길 대구공추협 의장)를 구성, 소송 지원 활동을 벌인 것이다. 이재용은 이 대책위에서도 집행위원장을 맡았는데, 그의 치과병원은 이들의 소송본부나 마찬가지가 됐다. 소송대리인은 김준곤 변호사(전 청와대 사회조정1비서관) 등이 맡았다.

소송까지 간 임산부 모임 회원은 인공유산자 5명, 자연유산자 5명, 기형아 출산자 4명이었다. 나머지 2명은 정상아를 분만하고 정신적 피해 배상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들 16명의 소송은 ‘페놀 투쟁’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분노할 줄만 알았지 정작 중요한 ‘분노의 관리’에는 인색했다. 사회는 이들을 외면했고 심지어 비난까지 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재용의 최근 회고.

“소송까지 간 임산부들은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저런다’는 오해를 받았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그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 때문에 이혼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사회적 압력, 가정의 압력을 극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소송에 임했다.”

페놀사건 이후 최근까지도 ‘제2, 제3의 페놀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1994년 낙동강 악취사건에서 2004년 1,4-다이옥산, 최근의 퍼클로레이트 검출 사태에 이르기까지…. 생수·정수기 시장의 성장은 가장 기본적인 물 문제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환경운동의 실패’를 비춰주는 거울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환경운동을 10년 앞당겼다고 하는 페놀사건의 또 다른 얼굴이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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