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錄 환경운동25년

물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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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페놀 사건(3)

환공연 김상종 교수의 수돗물 전쟁 10년… 학계와 일부 환경단체로부터도 고립되기도

김상종 서울대 교수(가운데)의 10년에 걸치니 수돗물 바이러스 논쟁은 ‘전문가 환경운동’ 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사진은 1991년 11월 경향신문 환경조사단의 일원으로 금호강 지류의 수질을 조사하는 김 교수와 최열 공추련 의장, 이시재 가톨릭대 교수(오른쪽). <경향신문>

김상종 서울대 교수(가운데)의 10년에 걸치니 수돗물 바이러스 논쟁은 ‘전문가 환경운동’ 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사진은 1991년 11월 경향신문 환경조사단의 일원으로 금호강 지류의 수질을 조사하는 김 교수와 최열 공추련 의장, 이시재 가톨릭대 교수(오른쪽). <경향신문>

‘절대 안 믿어, 물정권의 물공약’

페놀사건 당시 경북 구미 시가지에 걸린 구호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노태우 정권을 전두환 체제의 5공에 빗대 ‘6공’이라고 불렀다. 6공은 가히 물공화국이라고 할 만했다. 해마다 물난리와 수돗물 파동을 연례행사처럼 치렀다. 좀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시중에서 노 대통령에게 ‘물태우’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으니까.

일반적으로 학계와 운동권에서는 페놀사건을 3차 수돗물 파동이라고 일컫는다. 1차 파동은 1989년 8월 8일 경향신문의 특종보도로 표면화된 수돗물 중금속 오염 충격이다. 건설부가 자체적으로 전국 상수도 수질을 표본조사한 결과 중금속과 세균 등이 기준치 이상 검출돼 식수로 부적합한 것으로 나타난 데 따른 파문이었다.

1997년부터 ‘수돗물 바이러스 논쟁’

2차 파동은 감사원이 국회에 보고한 전국 17개 정수장에 대한 감사 내용이 1990년 7월 1일 각 일간지에 보도되면서 시작됐다. 발암물질인 트리할로메탄(THM)이 최고 기준치의 5배가 검출됐다는 보도는 수돗물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폭발 지경에 이르게 했다. 지금까지 ‘국내 최대 환경오염 사고’의 지위를 지키고 있는 페놀사건, 즉 3차 수돗물 파동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수돗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서울대 김상종 교수(생명과학부, 현 환공연 고문)다. 수질문제의 최고 전문가 가운데 한 명으로 1997년부터 시작한 ‘수돗물 바이러스 논쟁’을 10년째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돗물 바이러스 전쟁’으로까지 표현되는 이 논쟁은 지금껏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페놀사건 때 김 교수는 4개 시민단체로 이뤄진 ‘두산그룹 페놀사건 합동조사단’의 일원으로 현지조사를 벌였다. 이 조사단은 그를 비롯해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의 최열 의장과 김성동 지도위원(소설가), 소비자시민모임(이하 소시모) 강광파 이사(현 소시모 상임이사), 한국여성민우회 이금자 부회장 등 5명으로 구성됐다. 김 교수는 환경과공해연구회(이하 환공연)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날 박영숙 부총재(현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이사장)를 단장으로 한 평민당 진상조사단 7명도 이들과 동행했다.

1991년 3월 25일 실시된 이 조사의 소득은 행정 관료의 무책임과 무사안일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이었다. 페놀사건의 1차적 원인은 안전관리에 소홀했던 기업이었지만 그보다 김 교수를 비롯한 조사단을 더욱 절망케 한 것은 공무원들의 태도였다. 당시 김 교수는 “대구시청은 상수원수의 오염이 주된 원인이라고 환경처에 화살을 돌렸고 환경처는 정수처리를 잘못한 대구시에 책임을 전가했다”며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기고 있구나’하는 참담한 절망감이 대구 현지를 방문하고 받은 느낌이었다”고 술회했다(동아일보 1991년 3월 30일자).

수돗물은 안전하다? 페놀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91년 3월 23일 민자당 수질오염진상조사단이 대구지역 상수원인 경북 달성군(현 대구시) 다사정수장을 방문, 정수를 시음하고 있다. <경향신문>

수돗물은 안전하다? 페놀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91년 3월 23일 민자당 수질오염진상조사단이 대구지역 상수원인 경북 달성군(현 대구시) 다사정수장을 방문, 정수를 시음하고 있다. <경향신문>

수돗물 불신은 곧 정권에 대한 불신

조사단은 대구YMCA, 대구시청, 대구지방환경청, 다사정수장, 두산전자 구미공장을 차례로 방문한 뒤 마지막으로 ‘낙동강 식수원 페놀폐수 오염 구미지역 범시민규탄대책위원회’가 주최한 집회에 참석했다. 이날 조사의 압권은 대구시청 방문 때 일이었다. 시청 앞에서 조사단을 처음 맞이한 것은 엉뚱하게도 생수 트럭이었다. 최열 의장은 대구시장을 만나자마자 이것부터 따졌다.

“시청에서는 무슨 물을 먹습니까?”
“수돗물을 먹습니다.”
“그럼 밖에 설악생수를 가득 실은 트럭은 뭡니까?”
“그건… 잘 모르지요.”

수돗물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벌어지는 관제 퍼포먼스(?)가 있다. 고위인사들이 정수장을 방문해 종이컵에 따른 정수를 직접 마시는 것이다. 페놀사건 때도 당시 여당인 민자당 수질오염진상조사단이 다사정수장에서 신문·방송사의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돗물 먹기 시위’를 한 바 있었다.

수돗물이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런 연출 관행이 부른 웃지 못할 코미디가 ‘국회의원 똥물 시음 사건’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김문수 의원(현 경기도지사)은 15대 국회 시절 동료 의원들과 함께 보트를 타고 팔당호 중간까지 가서 비커로 물을 떠 마시곤 했다. 분뇨의 52%만 처리되는 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2001년 국정감사 때 김 의원이 “공무원들이 안전하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알고 해마다 똥물을 마셨다”고 분개하자 환경부는 “의원들에게 시음해도 문제가 없다고 유도한 적은 없었다”고 발뺌했다.

마시는 물의 안전 문제는 국민 대중에게 가장 민감한 사안 가운데 하나다. 수돗물에 대한 불신은 곧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물 먹기 퍼포먼스는 이런 다급한 사정을 반영한 대국민 ‘쇼’라고 할 수 있다. ‘대구시청 생수사건’은 그것이 사기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자 수돗물에 대한 불신감을 스스로 확인해준 것이었다.

뒷날 ‘바이러스 논쟁’으로 수돗물 안전 문제를 끈질기게 제기하게 되는 김상종 교수는 이 점에서 정부에게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다. 실제로 김 교수는 서울시와 환경부의 ‘기피인물 1호’로 불렸다. 서울시가 2000년 5월 그를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가 취하하기도 했다.

‘바이러스 논쟁’의 핵심은 조사 방법론이다. 김 교수는 ‘세포배양법’ 외에 ‘유전자검색법’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서울시·환경부 등은 그 효용성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논쟁이 계속되는 사이에 김 교수는 정부뿐 아니라 학계, 심지어 일부 환경단체로부터까지 고립되는 처지에 빠진다. 그는 최근 집단식중독 사태의 원인인 노로바이러스 검색과 관련해서도 이 문제를 재삼 제기하고 있다.

학자로서 ‘적당히’ 처신해도 그만인 그가 ‘수돗물 투사’가 된 데는 나름대로 배경이 있다. 그것은 그가 몸담은 환공연의 지향처럼 ‘전문가 환경 운동’ 또는 ‘환경 전문가 운동’을 일찍이 결심한 점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0년 서울대 문리대 미생물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미생물학이라는 전공 자체는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문이었다. 그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독일 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전공에 내재된 ‘환경’이라는 코드가 ‘운동’과 접목한 것은 그곳에서였다.

독일의 대학 분위기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석·박사과정 학생과 전문연구원 등이 그린피스나 분트(BUND) 등 환경운동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분위기가 그랬다. 그 역시 일요일이면 바닷가 산책길에 좌판을 놓고 사람들에게 스티커를 나눠주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이해와 설득을 구하는 활동을 벌였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5년간 독일에 머물면서 그는 독일의 환경운동을 배웠다. 당시 가장 큰 이슈는 핵문제였다.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와 미군기지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반핵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북해 오염도 심각한 문제로 부각됐다. 그는 킬대학 해양연구소에서 북해 오염 대책 활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독일에서의 이런 경험이 학문 자체에 대한 그의 시각을 바꿔놓았다. ‘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다’는 학계의 보편적인 정서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 그 첫 번째다. 전문가들이 논문만 내고 끝난다면 그것이 정책에 반영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인데 시행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제몫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학문 연구뿐 아니라 연구 결과가 국민에게 전달되고 정책에 반영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됐다. 미래에 대한 투자도 좋지만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전문가로서 이런 몫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 교수의 최근 회고다. 그는 1984년부터 모교인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독일 구상’을 차근차근 실천하기 시작했다. 수질을 전공한 그로서는 소양·팔당·대청댐과 낙동강 하구 등 담수의 수질 문제가 최우선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회고를 더 들어보면….

환공연이 개설한 제1기 환경학교 수료식(1991년 5월). 김정욱 회장이 교육생에게 수료증을 수여하고 있다.

환공연이 개설한 제1기 환경학교 수료식(1991년 5월). 김정욱 회장이 교육생에게 수료증을 수여하고 있다.

독일에서의 경험 그의 시각 바꿔 놓아

“이미 1980년대 말에 소양호에서 적조가 나타났다. 그래서 굉장히 놀랐다. 4대강 중에 한강, 그 중에서도 북한강, 또 그 중에서도 상류가 가장 깨끗하다고 하는데 그럴 정도였다. 연구한 데이터를 발표하면서 수질 문제가 이슈가 됐고, 그런 것이 알려지면서 조중래 교수 등 관심 있는 분들이 연락을 해와서….”

국내 최초의 반공해서클 ‘공해연구회’의 좌장 격이던 조중래 교수(현 명지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이즈음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조직 재정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와 조홍섭(현 한겨레신문 부국장) 등 핵심 멤버들은 공추련과 같은 활동가 중심이 아닌 전문가 중심의 조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환경운동이 부딪치는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전문성을 챙기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운동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종합하면 강력한 활동가 단체로 공추련이 있는 만큼 다른 방식으로 보완해줄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고, 전문가 조직에서 그 해답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전문가를 조직하는 것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환공연이 조직될 무렵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이는 황순원(현 캐나다 마니토바대 유학)·최영남(현 기독교 전도활동)·이수경(현 환공연 사무처장)·정규정(현 약국 경영) 등 여성 4인방이었다. 이들은 상봉동 진폐증 사건 지원 활동을 펼치면서 전문가 조직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 본격적인 조직 작업에 들어갔다.

네 사람은 매일, 주말에는 1박2일 합숙하면서까지 단체를 조사하고 전문가를 물색했다. 이때 참여한 인사가 장재연 아주대 의대 교수(예방의학교실, 현 시민환경연구소장)와 연세대 환경공해연구소의 연구원들을 비롯한 소장학자 또는 예비학자들이었다.

이들의 애초 구상은 젊은 석·박사 과정의 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다. 기성 학계는 쉽사리 참여하려 들지 않는 사정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석·박사과정 학생이 교수에 비해 덜 바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정반대였다.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교수들보다 더 바빴다.

환공연 조직 작업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중량감 있는 두 전문가가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바로 서울대 김정욱 교수(환경대학원, 현 환공연 고문)와 김상종 교수였다. 김상종 교수는 앞에 언급한 것처럼 독일 유학 시절부터 ‘전문가 환경 운동’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환공연과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김정욱 교수의 참여였다.

김정욱 교수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많은 환경운동가를 길러내고, 기회 있을 때마다 환경운동을 적극 지원한 ‘학계 환경운동의 대부’라고 할 만하다. 부산고 출신으로 서울대 공대 토목공학과 64학번이다. 그는 미국 로드아일랜드대학으로 토목 공부를 하러 갔다가 환경으로 전공을 바꿔 텍사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문가 환경운동을 지향한 환공연의 주요 인사들. 왼쪽부터 김정욱·김상종·장영기·이동수·황순원.

전문가 환경운동을 지향한 환공연의 주요 인사들. 왼쪽부터 김정욱·김상종·장영기·이동수·황순원.

학계 환경운동 대부 김정욱 교수 참여

그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인간환경회의였다. 앞으로 환경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그는 도시계획·조경에서 환경으로 영역을 넓혔다.

1977년 귀국해 전에 다니던 KAIST로 복귀한 그는 당시 공해 1번지였던 울산·온산 조사를 다녔다. 최열·조중래 등보다 먼저 ‘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1982년부터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 등 많은 활동가들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뒷날 환공연에도 잠깐 참여하는 장원(현 녹색세상 대표이사)도 그의 제자다.

그는 1984년 환경청의 용역으로 실시한 온산지역 역학조사의 알려지지 않은 결과를 언론에 공개하면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바른 말을 하면 정부와 학계 양쪽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시절이었다. 학자의 환경운동 참여는 따라서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그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1988년까지는 환경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피해 주민들이 조사하고 싶은 게 많아 전문가의 참여가 절실했지만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참에 조중래·안병덕·조홍섭·장재연·장현식 등 젊은 사람들이 ‘이제는 활동할 수 있으니까 함께 합시다’라고 했다. 초기에는 환경활동가를 교육하는 일을 많이 했다.”

환공연은 1987년부터 사실상 활동을 시작했지만 공식 출범한 때는 김정욱·김상종 교수가 참여한 후인 1989년 6월 17일이다. 초대 회장은 김정욱 교수, 사무국장은 장재연 교수였다. 이들 외에 김환석 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현 시민과학센터 소장), 윤종현 변호사(현 법무법인 두우),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 등이 초기에 참여한 전문가들이다.

수원대 장영기 교수(환경공학, 현 환공연 회장)와 서울대 이동수 교수(환경대학원, 현 환공연 부회장)도 일찍부터 맹활약한 환공연의 주축이다. 서울대 농화학과 76학번인 장 교수는 환경대학원 스승인 김정욱 교수와의 인연으로 참여한 경우이고, 서울대 화학공학과 77학번인 이 교수는 공청협에서도 활동한 반공해운동권 출신이다. 전업 환경운동가가 아닌 전문가로 구성된 환공연의 사업을 뒷받침한 사람은 황순원·이수경 등 활동가들이었다.

환공연은 공추련 등과 달리 ‘조용하게’ 환경운동에 기여한 바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서울시 대기오염 측정자료 분석 및 평가, 물 속에 사는 벌레를 이용해 물의 맑기를 측정하는 법 보급, 보행환경조사 등 각종 방법론 개발, 쓰레기 소각장 문제 대책, 수돗물 바이러스 오염 조사 등이 환공연이 단독으로 추진한 대표적인 사업이고 상봉동 진폐증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사안에서 시민·환경운동단체와 연대활동을 벌였다. 김상종 교수가 참여한 ‘두산그룹 페놀사건 합동조사단’의 활동도 이러한 연대사업의 일환이었다.

다시 페놀사건으로 돌아가면 1991년 4월 22일 낮 12시쯤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또 다시 2t 가량의 페놀 원액이 파이프 이음새를 통해 옥계천에 유출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대구지방환경청은 즉각 두산전자에 대해 조업정지 조치를 내렸고 대구시 수돗물 송수를 중단했다.

두산전자의 2차 페놀방류사건은 환경단체에 다시금 초강경 목소리를 낼 좋은 기회를 제공한 꼴이 됐다. 공추련·부산공추협·광주환경공해연구회·목포녹색연구회·울산공추련 등은 성명을 통해 ▲두산전자 사장 즉각 구속 ▲두산전자 폐쇄 ▲환경처 장·차관과 대구지방환경청장 등의 파면 ▲국회 국정조사권 발동 ▲노태우 공해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고 시한부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두산과 정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판이었다. 두산그룹에서는 4월 24일 박용곤 회장이 사임하고 정부는 이튿날 환경처 허남훈 장관과 한수생 차관을 경질했다. 환경문제로 인해 재벌 총수가 물러나고 장·차관이 동시에 경질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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