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용의 위험한 ‘금붕어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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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페놀 사건(1)

전문성에 대한 공추련의 고민… 박사급 전업활동가와 환경연구소 필요성 대두

페놀사건이 터졌을 때 공추련은 페놀의 독성을 폭로하기 위해 ‘금붕어 실험’ 을 실시했다. 최예용이 공장 배출 허용기준치인 5ppm의 페놀용액에 넣은 금붕어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경향신문>

페놀사건이 터졌을 때 공추련은 페놀의 독성을 폭로하기 위해 ‘금붕어 실험’ 을 실시했다. 최예용이 공장 배출 허용기준치인 5ppm의 페놀용액에 넣은 금붕어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경향신문>

최예용(현 시민환경연구소 기획실장)은 떨리는 손으로 금붕어를 놓았다. 그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 비커에 빨려 들어가 유영하기 시작했다. 호기심 가득한 수십 개의 눈이 숨을 죽인 채 이 장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물을 만난 금붕어는 미친 듯이 비커 안에서 좌충우돌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1분, 2분, 3분…. 차츰 움직임이 둔해졌다. 5분쯤 지났을 때는 수면으로 떠올라 거의 정지한 채 아가미만 뻐끔거렸다. 최예용이 플라스틱 자로 비커를 두드려도, 자를 물에 넣어 눈앞에 가까이 가져가도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를 저어 금붕어를 건져 올리자 카메라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졌다.

‘유치한’ 실험에 움직인 여론

1991년 3월 21일 밤 서울 종로구 충신동 보덕빌딩 4층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사무실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최열 의장(현 환경재단 대표)과 황상규 사무국장(현 지속가능발전위 전문위원) 등 공추련 활동가와 언론사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무차장인 최예용이 페놀 독성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5ppm 농도의 페놀 용액(당시 환경처가 정한 페놀폐수 배출 허용기준치)에 금붕어 2마리를 넣어 반응을 관찰한 이 실험은 다음날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3월 22일자 석간 국민일보는 ‘페놀, 치명적 독성 확인’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두산전자가 낙동강에 불법 방류, 영남권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발암성 유기물질인 ‘페놀’이 생명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실이 실험 결과 드러났다. 공해추방운동연합(공동의장 최열)이 21일 밤 실시한 페놀 독성반응실험 결과 공장배출 허용기준치인 5ppm의 페놀이 함유된 물에서 금붕어는 3시간 40분 만에 죽었으며….”

‘사상 최대의 환경사고’로 불리는 낙동강 페놀방류 사건(이하 페놀사건)은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나라 환경운동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전 국민을 분노케 한 초대형사건이라는 성격에 걸맞게 국민·기업의 환경의식과 정부의 환경정책에 미친 파급효과도 메가톤급이었다. 환경운동의 측면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페놀사건을 ‘환경운동의 수준을 10년 앞당긴 사건’으로 보는 데는 이 사건이 운동의 양적 팽창뿐 아니라 질적 변화를 가능케 했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페놀사건 전까지 공추련 주도의 반공해운동은 단기간에 괄목할 만하게 성장했으나 부문운동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공해로 피해를 본 주민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 즉 ‘운동성’에 무게중심을 둔 것이었다. 운동권과 피해 주민뿐 아니라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대중성’, 그리고 환경문제가 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한 ‘전문성’을 갖추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페놀사건은 환경운동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대사건이었다. 페놀사건 때 맹활약한 공추련 최열 의장과 황상규 사무국장, 최예용 사무차장, 전문성 확보차 독일에 유학 파견된 안병옥(왼쪽부터).

페놀사건은 환경운동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대사건이었다. 페놀사건 때 맹활약한 공추련 최열 의장과 황상규 사무국장, 최예용 사무차장, 전문성 확보차 독일에 유학 파견된 안병옥(왼쪽부터).

이 가운데 전문성은 공추련 활동가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의학·공학·화학·법학 등 여러 분야에 관련한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 환경운동인데 활동가에게는 그것이 없었고,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들지 않았다. 페놀사건 때도 공추련이 처음 맞닥뜨린 벽이 바로 이것이었다.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페놀 원액 약 30t이 낙동강 지천인 옥계천에 유출되기 시작한 때는 3월 14일 저녁 10시께였다. 이것이 다사수원지에서 정수처리제인 염소와 반응, 심한 악취를 풍기는 클로로페놀로 변한 때가 3월 16일 오후 2시쯤이었다. 이날 저녁 클로로페놀에 오염된 수돗물이 대구시 일부 가정에 공급돼 항의가 잇따르자 다사수원지에서는 더 많은 염소를 투여, 악취를 더욱 가중시켰다. 대구시 상수도본부 측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이산화염소로 소독약품을 대체하는 등 긴급 대책에 나섰다. 페놀이 유출된 지 약 48시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대구 수돗물 악취 소동이 언론을 통해 일반에 알려진 것은 3월 18일 아침이었다. 이 날자 조간신문이 일제히 이를 보도하면서였다. 이 사실을 접한 공추련 활동가들의 첫 반응은 “페놀이 뭐지?”였다. 당시 전문성에 대한 환경운동 진영의 목마름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최열 의장의 코멘트가 있다. “독성학 사전 같은 게 우리에게 필요하다.”

사고가 터지면 공추련이 할 수 있는 조치는 사태 파악이었다. 최 의장은 곧바로 현장으로 내려갔다. 일단 대구의 공추련 회원과 시민을 만나 현지 사정을 들었다. 그는 피해 주민으로부터 “아침에 밥을 짓는데 이상한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아기에게 우유를 타줬더니 먹지 않고 토했다” “조개탕을 끓였는데 남편이 조개가 썩었다고 해서 부부싸움을 했다” 등의 말을 들었다.

현장 확인 다음에 할 일은 페놀의 실체를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방향족 화합물의 일종으로 분자식이 C6H5OH이며, 염소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페놀의 500~600배 악취를 풍기는 클로로페놀로 변한다”는 식의 백과사전적 설명은 의미가 없었다. 사람에게 해로운 정도를 실감하게 해야 했다. 집회에서 독극물이니 발암물질이니 하며 ‘주장’만 하는 것도 설득력이 약했다. 금붕어 실험 아이디어는 그래서 나왔다. 최열의 최근 회고에 따르면.

“페놀은 이미 강물에 흘러가 버렸기 때문에 유해성을 입증하려면 상황을 재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금붕어 실험을 생각했는데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했다. 명색이 환경운동한다는 사람이 실험을 한답시고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여서 되겠느냐…. 그렇지만 해야 했다. 실험을 하라고 최예용에게 지시했다.”

최예용은 장래가 촉망되던 활동가로 당시 사무차장을 맡고 있었다. 사무국장인 황상규보다 학번으로는 두 해 아래(85학번)지만 3수를 했기 때문에 동기급이었다. 서울대 공대 금속공학과 출신으로 황상규와 학생운동을 함께 한 배경도 있었다.
그가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이하 공청협) 창립 멤버가 된 것은 황상규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 늘 학생운동 일선에 있었지만 특정한 ‘셀’이나 ‘하우스’(당시 조직을 그렇게 불렀다)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황상규의 권유로 공청협에 참여하면서 반공해운동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그때 그는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퇴근하면 방위복을 입은 채 곧바로 공청협 사무실에 출근했다.

마치 타고난 듯한 열정과 기획력·추진력이 그가 최열 의장이나 동료 활동가들의 신임을 받게 된 요소였다. 환경운동에 대한 그의 열정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군 출신인 그의 부친은 맏아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딴짓’을 계속하는 게 영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공추련에 쳐들어가 “최열 어딨어!”라고 고함을 쳤다. 마침 최 의장과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이 자리를 비운 터라 애꿎게도 상근하고 있던 박상철(공인회계사, 현 환경운동연합 감사)이 호되게 당했다.

전천후 활동가에게 떨어진 명령

최예용은 집에다 애지중지 모아놓은 환경 관련 서적과 자료를 아버지가 두 차례나 불태우는 시련을 열정으로 극복했다. 결국 그의 부친도 1990년 ‘지구의 날’ 행사에 참여하는 등 환경운동의 원군이 됐다. 오늘의 매향리를 있게 한 권헌열(현 환경운동연합 미군기지환경특별위원) 등 인자가 절대 부족하던 시절 많은 친구를 환경운동에 끌어들인 공로(?)도 있다.

공추련의 ‘금붕어 실험’ 은 국회에도 전수(?)됐다. 1991년 3월 28일 열린 국회 보사위에서 평민당 이철용 의원이 페놀의 유독성 실험을 연출했다. <경향신문>

공추련의 ‘금붕어 실험’ 은 국회에도 전수(?)됐다. 1991년 3월 28일 열린 국회 보사위에서 평민당 이철용 의원이 페놀의 유독성 실험을 연출했다. <경향신문>

이처럼 열정과 기획·추진력 3박자를 갖춘 그는 전천후 활동가로 성장하게 된다. 재정 확보를 위해 장사꾼이 되는가 하면 지역단체에 해결사로 파견 근무 명령을 받기도 한다. 그린피스 인턴십 참여라든가 고래 보호 운동 등 국제적인 연대활동도 그의 몫이었다.

페놀 사건 당시 최열 의장으로부터 “금붕어 실험을 하라”는 임무를 받은 그는 가운과 마스크, 실험기구를 준비하고 종로5가 화공약품상에 가서 페놀을 구했다. 금붕어는 최 의장과 황상규가 사왔다.

사실 이 실험은 엉터리였다. 어류 독성 실험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실시해야 하는 것이었다. 실험 조건을 갖추는 일과 실험용 어종의 선택도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이었다. 최예용조차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실험이었다”고 최근 회고할 정도로 허술하고 비전문적이었으며, 그래서 위험하기까기 했다.

공장 배출 기준치인 5ppm에 금붕어를 실험한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페놀의 음용수 수질기준치는 0.005ppm이고, 당시 취수장에서 채취한 물의 페놀 농도는 최고 0.188ppm이었다. 자연계에서 채취한 물이 아닌데다가 실험 농도도 너무 과도하게 설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언론이 환경학 관계자의 말을 빌려 “페놀이 유독성 물질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수돗물에 바로 넣어도 살지 못하는 금붕어를 새삼 최대 허용치인 5ppm 농도의 페놀 용액에 넣어 실험할 필요까지 있느냐”고 꼬집기도 했다. 이런 지적은 물론 들끓는 여론에 파묻혀 그다지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최예용과 함께 페놀사건을 담당했던 황상규의 최근 회고에 따르면….

“미리 실험을 해보니까 금붕어가 금방 죽었다. 그래서 그림이 된다고 생각했다. 기자들도 와서 그걸 보고는 놀라서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다. 실험을 비전문적으로 하기는 했지만 페놀의 위험성을 알리는 데는 적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는 실험이었다.”

환경운동이 전문성을 갖추는 문제는 공추련 활동가들의 ‘숙원사업’ 중의 하나였다. 공추련 내부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환경운동은 운동성·대중성·전문성이 삼위일체가 돼야 성공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돼 있었고, 이 가운데 가장 난제인 전문성 확보를 위해 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덕희(현 영화과학 대표이사)가 제기한 안은 20억 원 정도의 기금으로 연구 인력과 실험 장비 등을 갖춰 자체적으로 연구소를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이덕희는 공청협 회장, 공추련 공동의장을 지낸 고참 환경운동가(77학번)로 당시에는 공추련 자료정보실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돈도 돈이지만 참여할 전문가를 찾는 것이 더 문제였다.

‘금의환향’ 약속지킨 안병옥

이 장면에 등장하는 상징적 인물이 안병옥이다. 학생운동권 출신 전업활동가 1세대인 그에게 공추련이 그토록 목말라 하던 전문성 확보의 짐이 지워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페놀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그는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1991년 3월 23일 서한태 박사, 박용일 변호사, 최재현 교수 등 공추련 지도위원들이 서울 논현동 두산전자 본사를 항의방문했다. 최예용(오른쪽 두번째)도 동행했다. <경향신문>

1991년 3월 23일 서한태 박사, 박용일 변호사, 최재현 교수 등 공추련 지도위원들이 서울 논현동 두산전자 본사를 항의방문했다. 최예용(오른쪽 두번째)도 동행했다. <경향신문>

공청협·공추련의 창설을 주도한 서울대 이공계 80학번 3인방 중에서 그는 유일하게 전업활동가로 남아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학계로 가면서 점차 환경운동과 관계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김근배(현 전북대 교수·과학사)는 미생물생태학에서 과학사로 전공을 바꾸면서 환경운동을 접겠다고 미리 양심선언(?)을 하고, 윤제용(서울대 교수·화학생물공학부)은 풍부한 데이터를 가질 수 있는 학계에서 한몫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안병옥은 대학원에서 해양생태학을 전공했지만 전업운동가의 길을 가기 위해 공부의 꿈을 접은 바 있었다. 그런데 묘한 선택이 그의 앞에 떨어졌다. 공추련 내부에서 전문성을 키우는 문제가 절실한 과제로 대두한 참에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가 날아든 것이다. 지난 8월 17일 타계한 강원룡 목사가 운영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가 독일 유학 티켓 한 장을 공추련 몫으로 배려했기 때문이다.

독일 기독교재단의 제3세계 지원 프로그램 중 하나인 이 장학금으로 유학한 국내 인사는 김세균(현 서울대 교수)·정현백(현 여성단체연합 공동의장)·이삼열(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 매력적인 티켓이 공추련 내부 추천에 의해 그에게 주어졌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를 고사했다.

그가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의 사연은 환경운동권에서 지금도 미담거리로 회자된다. 그는 이 티켓을 동료 활동가 박상철에게 양보했다. 공청협 시절부터 상근한 박상철은 정신적으로 가장 소진된 상태였고 누구보다 절실하게 유학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추련은 결국 박상철을 추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국내 심사 과정에서 석사학위 소지자를 요구하는 바람에 티켓이 다시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91년 유학길에 오른 안병옥은 독일 에센대학에서 하천생태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고 2002년 귀국했다. 그는 “반드시 환경운동으로 돌아오겠다”는 떠날 때의 약속을 지켜 시민환경연구소로 복귀했다. 최열 의장은 “개인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데 그렇게 한 것이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고 최근 회고했다.

비커에 담긴 페놀 용액은 어디로?

현재 환경운동권은 안병옥을 필두로 박사급 전업활동가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이를테면 최예용도 2001년 영국 런던대에서 석·박사 통합과정을 이수한 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환경보건학을 전공, 박사과정을 마친 상태다.

페놀 원액 약 30t이 유출돼 낙동강 식수원을 오염시킨 두산전자 구미공장 전경. <경향신문>

페놀 원액 약 30t이 유출돼 낙동강 식수원을 오염시킨 두산전자 구미공장 전경. <경향신문>

이렇듯 페놀사건 당시 공추련을 비롯한 주류 환경운동권에는 전문성 확보가 시급하고 절실한 과제로 대두해 있었다. 금붕어 실험은 전문성에 목마른 공추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비록 비전문적인 운동 차원의 이벤트에 불과했고 그것이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실험에 참가했던 당사자들조차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로 ‘어설픈 실험’이었던 것이다.

기자들이 올 때마다 가운을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금붕어 실험에 신바람을 내던 최예용은 상황이 끝나자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대한민국 수질 개선을 위해 비커 속에서 장렬히 죽은 금붕어들을 바라보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이걸 어떡하나….”

실험에만 급급한 나머지 미처 사후 처리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 그가 당황한 이유였다. 실제로 그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는 죽은 금붕어를 끄집어 낸 뒤 페놀 용액이 든 비커를 화장실로 가져갔다. 그러나 차마 그대로 변기에 쏟아버릴 수는 없었다.

최예용이 화장실에서 나온 것은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난 뒤였다.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어떻든 생명을 죽인 데다 오염 물질을 무단방류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15년이 지난 뒤 그는 실토했다. 그걸 하수구에 그대로 버리지는 못하고 변기에 물을 내리면서 조금씩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실험하는 것보다 그것을 버리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금붕어 실험과 성명서 발표는 페놀사건이 터졌을 때 공추련이 맨 처음 한 공식 활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최열 의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페놀사건이 가진 폭발력은 그 어떤 사건보다 클 것이라는 점을,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운동의 지형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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