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했지만 할 일이 아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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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사건(2)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장재연의 의도된 감정… 반미의 중심에서 평화의 성지로

2000년 매향리 6·6시위. A-10기의 농섬 실폭탄 투하 사건을 계기로 반미운동 세력이 매향리로 총집결했다.

2000년 매향리 6·6시위. A-10기의 농섬 실폭탄 투하 사건을 계기로 반미운동 세력이 매향리로 총집결했다.

‘동남풍’은 반드시 분다.

매향리 책사 권헌열(현 환경운동연합 미군기지환경특별위원)은 확신했다. 다만 그것을 불러올 시기를 재고 있었다. 1996년 여름 그는 아끼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소송이었고, 승리를 안겨줄 ‘동남풍’은 일본 요코다(橫田) 미 공군기지 주변 주민들이 1989년 도쿄 지방법원 하치오지(八王子) 지부에서 받아낸 승소 판결이었다.

소음피해 소송에 관한 한 매향리는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민간항공기 소음 규제 수준을 훨씬 초과할 뿐 아니라 미군기지를 대상으로 한 ‘하치오지 판례’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이 카드를 빼들지 않았다. 이유는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이 기본적으로 지향한 전술·전략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미군과 결부된 민원이 합법적으로 해결되기는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매향리 주민들의 끈질긴 진정에 대한 국방부의 반복된 답변의 요지는 이랬다. “피해는 인정하지만 국방·안보상 어쩔 수 없다.” “피해보상은 법이 없어 불가하고 사격장 이전은 미군 측과 협의 중이다.”

합법이 통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비(非)합법·반(半)합법 투쟁’이다. 운동 자체가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일 수 있다. 권헌열은 매향리 문제는 비합법·반합법 운동을 통한 해결 방식이 먼저라고 믿었다.

전만규 대책위원장(현 매향리평화마을건립추진위원장)과 주민들의 생각도 같았다.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1989년 3월 팀스피리트 훈련 기간의 사격연습 저지투쟁과 5·29 기지점거 사건 등이었다. 실제로 성과도 있었다. 정치권·언론·사회단체 등의 시선을 끌고 여론화하는 데 성공했다. 권헌열은 이런 정세 판단을 근거로 전 위원장에게 전략·전술을 진언했다.

“주민들에겐 싸울 힘이 있습니다”

“재판으로 가면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집니다. 구경꾼이 돼버립니다. 아직 주민들에게 싸울 동력이 있고 국민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싸우다가 안 되면 그때 가서 법에 의지해도 늦지 않습니다.”

공추련은 매향리 문제가 주민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주민 스스로 공해 피해를 인식하고 자력으로 권익을 찾는 것이 바로 공해추방운동을 확산시키는 길이었다. 따라서 공추련 활동가로서 권헌열의 임무는 주민들이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전술·전략에 변화가 생기기까지 과정을 보면, 먼저 1989년 5·29사건으로 전만규 위원장이 구속돼 이듬해 2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석방된 것이 그 첫 번째였다. 전 위원장은 복역 중 얻은 디스크 때문에 출소 후에도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다. 1994년 12월 불발탄 제거작업 중 폭발 사고로 주민 10여 명이 다치고 198채의 가옥에 균열이 생기는 피해가 난 것을 계기로 주민들이 미군기지 앞에서 3개월 간 천막농성을 벌인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큰 시련은 ‘시간’이었다.

싸움이 장기화되면 불리한 것은 약자 쪽이다. 불발탄 사고 후 매향리는 차츰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주민들은 자신감을 잃고 분열 조짐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이럴 때 권헌열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민들이 의로운 일을 하고 있고, 고립돼 있지 않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유력인사들의 매향리 방문은 전 위원장을 비롯한 주민들에게 작지만 큰 위안이 될 수 있었다.

권헌열이 소송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생각한 때는 내부는 물론 외부 동력까지 모두 소진된 시점이었다. 또 다른 변화도 있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 사법부가 전향적인 판결을 많이 내놓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는 바야흐로 모든 조건이 ‘동남풍’을 불러올 적기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위기가 닥치면 그것을 활용하라! 거기에 기회가 있다!

1998년 2월 27일 시작된 매향리 재판은 여러 점에서 ‘역사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 재판에서 승소함으로써 그 뒤 이뤄지는 매향리 사격장 폐쇄, 2차 집단소송, 다른 지역의 소음피해 소송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집단소송을 주도한 이석태 변호사, 소음 측정을 통해 소송을 뒷받침한 김선태·장재연 고수, 매향리 주민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원한 권헌열 활동가(왼쪽부터).

집단소송을 주도한 이석태 변호사, 소음 측정을 통해 소송을 뒷받침한 김선태·장재연 고수, 매향리 주민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원한 권헌열 활동가(왼쪽부터).

보수적 판결 피하려 청구액 줄여

소송은 전만규 위원장과 권헌열이 비장의 카드로 갖고 있던 것이긴 하지만 막상 실행하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소송대리인을 구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군을 상대로 하는 데다 군 비행기 소음에 대한 법규정이 미비하고 당연히 국내 판례도 없었다. 집단소송이 갖는 정치적 부담도 컸다. 승산이 희박할 뿐 아니라 매우 피곤한 게임이 될 게 뻔했다.

권헌열은 환경소송에 관심이 많은 이석태 변호사(현 법무법인덕수)가 매향리 문제에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변호사가 그를 불러 미국의 관련 자료를 요청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공추련의 후신인 환경운동연합 상임집행위원이던 이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을 자청하고 나섬으로써 매향리 재판은 본궤도에 진입했다.

이석태 변호사는 소송의 성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전술도 갖고 있었다. 먼저 손해배상 청구 액수가 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1억 원이 넘으면 합의부로 배당되고, 그렇게 되면 나이가 많은 합의부 판사에 의해 보수적인 판결이 내려지기 쉽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즉 액수를 1억 원 이하로 줄여 단독심으로 가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채택한 것이 소음피해 지역 10개 마을 주민 대표자 15명만으로 소송을 제기하되 청구액도 각 100만 원씩 총 1500만 원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해 소를 확장해 나중에는 각 2000만 원씩으로 올렸다. 주민 전체를 원고로 한 집단소송은 재판부로서도 부담이 큰 만큼 뒤로 미뤘다.

소를 제기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근거자료다. 주민들이 구체적 피해를 본 증거가 있어야 했다. 소음으로 인한 건강 피해를 제시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것은 입증하기가 매우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들게 마련이었다. 그보다는 소음 그 자체를 측정하는 것이 수월했다.

소송 근거 마련을 위한 간이조사는 김선태 교수(대전대 환경공학과)가 맡았다. 그의 대학원 은사인 김정욱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의 추천으로 이 변호사가 개인적으로 의뢰한 것이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조사하러 갈 때마다 비행기가 뜨지 않는 바람에 10여 번 헛걸음 끝에 간신히 한 차례 측정에 성공했다. 환경운동연합 부설 시민환경연구소의 명의로 보고한 이 조사의 측정치는 94~133.7㏈이었다. 김 교수는 “순간 소음도라 학술적 가치는 없지만 134㏈이라는 데이터는 이것 말고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고 최근 말했다.

김 교수의 자료를 토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 변호사는 이 재판을 ‘조용히 시작해서 조용히 끝낸다’는 방침이었다. 미군기지 문제고 많은 주민이 관련돼 있으며 매향리 말고도 유사한 분쟁지역이 많은 등의 정치적 부담이 재판부에 영향을 줄까 우려해서였다. 이런 전술은 재판 과정에서 주효했다. 권헌열의 말을 들어보자.

“몇 명 안 되는 인원이 100만 원씩 달라고 하니까 국방부가 별로 긴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쪽은 경험이 일천한 법무관이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고 나온 반면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건 감정인으로 우리가 추천한 장재연 교수가….”

장재연 교수(현 아주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시민환경연구소장)는 환경운동권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전문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이 소송에서 무리 없이 감정인으로 채택돼 중요한 역할을 하기까지에는 절묘한 복선이 있었다.

중립적이지 않은 감정, 공정한 결과

장 교수는 공해연구회가 1987년 환경과공해연구회(이하 환공연)로 확대되던 시기에 전문가 운동을 지향하며 환공연에 참여했다. 하지만 페놀사건과 공추련·환공연 통합 논의 과정에서 환경운동연합의 노선을 지지했다. 아주대 교수로 들어간 뒤에는 환경운동연합에 느슨하게 발을 걸치고 노동환경 문제에 집중했다. 다시 말하면 소음 측정 경험이 많고 ‘환경운동권 학자’로 노출이 안 돼 있어 감정인으로 적격이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감정 때문에 패소한 것을 잘 아는 이 변호사는 이 부분에 많은 공을 들였다. 권헌열도 감정에 대비해 장 교수와 미리 말을 맞춰놓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피고측도 장 교수를 감정인으로 선정하는 데 별 이의를 달지 않았던 것이다.

법원의 감정 명령으로 1998년 8월부터 매향리 조사에 나선 장 교수는 한 달 정도면 모든 작업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무려 8개월이 걸렸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비행훈련이 취소돼 헛걸음을 하기 일쑤였고, 훈련이 있는 날도 비행고도를 높여 ‘제대로 된’ 수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정인은 중립적인 인사가 맡아야 하고, 감정 역시 중립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장 교수는 평균 소음도가 일반환경소음기준치인 70㏈을 초과한 1999년 3월에야 측정을 마무리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감정이었던 셈이다. 그의 최근 회고에 따르면….

“솔직히 말해서 소송에서 이기기 위한 감정을 했다. 운동하는 기분으로 감정한 것이다. 상대가 미군이고 흠 잡히면 안 되기 때문에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내가 감정을 할 때는 그 전보다 소음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45년 동안 주민들이 그런 소음에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단기간 측정한 수치를 곧이곧대로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공평하지 못했다. 과연 이 지역이 주민이 살 만한 곳인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했는가… 이런 식으로 관점을 조정했다.”

장 교수의 감정은 비록 의도는 중립적이지 않았지만 결과는 공정했다. 사격장에 인접한 7개 지점에서 측정한 평균 소음도가 기준치를 간신히 넘긴 70.2㏈을 기록한 것은 원고 측에서도 불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장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감정의 목적이 높은 측정치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면….

“측정치가 아주 높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측정치가 높으면 입증하기가 더 어려워 재판에서 오히려 불리할 수 있었다. 옛날보다 낮고 평상시 훈련 때보다 낮다는 주민들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환경기준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수치가 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재판 과정에 국방부 관계자가 ‘어디서 측정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자기들이 측정해보니 그보다 더 높게 나와서였을 것이다. 내 수치가 그보다 높았다면 재판이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장 교수의 감정 결과를 인용해 “원고들을 포함한 매향리 사격장 인근 주민들은 주말이나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평균 70㏈ 정도의 소음에 노출되었고, 매일 10회 이상 실제 비행기가 매향리 상공에 나타나 훈련을 끝마칠 때까지의 동안인 매회 20분 정도는 90㏈, 실제 사격이 행하여지는 시간 동안에는 순간적으로 최대 130㏈을 전후한 소음에 수십년간 지속적으로 노출돼 왔다고 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재판부는 2001년 4월 11일 국가는 원고 14명(15명 중 1명은 재판 중에 사망)에게 1억32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민사특별법 등에 의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판결이었다. 이 역사적 판결은 얄궂게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2004년 3월 12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1심 판결 후인 2001년 8월 이석태 변호사는 다시 나머지 주민 1899명을 대리해 380억 원의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에서도 주민들은 81억5000만 원의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한편 매향리 주민들이 소송으로 투쟁방향을 전환한 뒤 사격장 문제는 다시 한 번 전국적 이슈로 떠오른다. 2000년 5월 8일 훈련 중이던 A-10기가 엔진 고장을 일으켜 농섬 해상에 500파운드짜리 포탄 6발을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하면서다. 이 때문에 주민 6명이 부상하고 가옥 700여 채가 파손되는 피해가 발생, 매향리 문제가 또 다시 전국적 관심사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사고는 노근리 사건과 SOFA 개정 문제 등으로 운동권은 물론 국민 일반에까지 퍼져 있던 반미 열기에 퍼부어진 기름이 됐다. 한미행정협정개정국민행동·민주노총·한총련 등 운동권이 총동원돼 주민대책위를 지원하면서 매향리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6월 1일 국방부가 5·8사건에 대한 한·미합동조사 결과 “폭탄 투하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없다”고 결론을 내리자 주민들은 시민·노동·학생세력과 연대해 전면적인 사격장 폐쇄 투쟁에 돌입했다.

2000년 6월 결행된 세 차례 대규모 투쟁은 매향리를 ‘반미운동의 성지’로 만들었다. 6월 2일에는 전만규 위원장이 포격을 알리는 사격장의 주황색 깃발을 찢어 군사시설보호법 위반 및 기물손괴 혐의로 2차 구속됐다. 6월 6일에는 3000여 명이 사격장의 철책을 뜯어내는 등의 시위를 벌였고, 17일에는 시위대가 사격장 출입문을 부수고 영내로 진입하기까지 했다.

매향리 투쟁을 이끈 주민대책위 전만규 위원장과 추영배 고문, 김영철·이정원 총무(왼쪽부터).

매향리 투쟁을 이끈 주민대책위 전만규 위원장과 추영배 고문, 김영철·이정원 총무(왼쪽부터).

“대통령도 못하는 일을 했다”

8월 18일 국방부가 ‘매향리 주민 불편 해소를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한 것은 시위가 격화되고 소송에 패색이 짙어지는 시점이었다. 8·18종합대책의 요지는 육상 사격장 폐쇄, 농섬 실탄사격 중지, 비상시 실무장 투하지역 서쪽으로 700m 이격 등이었다.

국방부는 2004년 4월 1차 소송 배상금 1억9400만 원(이자 포함)을 주민들에게 지급하면서 2005년 8월 31일까지 사격장 전체를 완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54년 동안 매향리 주민들을 괴롭혔던 쿠니 사격장(매향리의 옛 지명을 딴 고온리 사격장을 ‘KO-ON-NI’가 아닌 ‘KOON-NI’로 표기한 데서 유래)은 2005년 8월 12일 완전 폐쇄되고 그해 9월 1일부터 한국군에게 관리권이 이전됐다.

매향리 사건은 한·미관계, 민·군관계, 환경문제 등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무거운 사안들이 복잡하게 한꺼번에 뒤엉킨 ‘현재진행형’ 문제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대체사격장 마련,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환기지 환경오염 처리, 한·미 FTA 체결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로까지 불리던 매향리 사건을 승리로 이끈 동력은 무엇일까. 많은 관계자들은 주민대책위의 전만규 위원장을 비롯해 추영배 고문(현 대책위 고문), 이정원 전 총무(현 매화2리 이장), 김영철 현 총무(이화1리 이장) 등 집행진의 끈질기고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는 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들 뒤에 숨은 충성스런 책사 권헌열과 함께….

“권 박사가 없었다면 이 일을 지금까지 해올 수도 없었고, 이런 성과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괴롭거나 답답할 때 수시로 전화해 그의 말을 들었다. 신혼에 새벽에 전화를 해도 짜증 한 번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중간에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지만 이런 사람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전만규)

“전 위원장이 나 때문에 저렇게 망가진 게 아니냐는 생각에서 발을 뺄 수 없었다. 연애할 때 데이트도 매향리에 가서 했다. 생어부가 피치 못해 민족모순에 부닥쳐서 반미투사가 된 것, 그것이 안타까우면서도 경외감이 들었다. 주민운동가가 저렇게 걸출한 운동가로 성장한 예가 없을 것이다. 그가 불가능한 일을 이룬 것보다 불가능한 삶을 산 것이 더 놀랍다.”(권헌열)

매향리 주민들은 지금 미군이 남기고 간 포흔 위에 친환경적인 평화마을을 건설하려는 꿈에 부풀어 있다. 반세기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른 상처를 묻고 ‘평화의 성지’로 거듭나기 위해서.

웨클과 데시벨

웨클(WECPNL)은 직역하면 가중등가평균총소음량(Weighted Equivalent Continuous Perceived Noise Level)이 되는데,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서 채택하고 있는 항공기 소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다. 항공기 이착륙시 발생하는 소음도에다 운항 횟수와 시간대, 소음의 최대치 등 변수를 감안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소리 크기만을 나타내는 데시벨과 다르다.

데시벨(㏈)은 민간항공기 소음이 아닌 일반적인 환경소음을 나타내는 단위로 쓰인다. 조용한 주택가의 낮에는 보통 50㏈ 정도이고, 환경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수치는 70㏈이다. 70㏈은 50㏈의 1.4배가 아니다. 3㏈이 높으면 2배 강한 소음이 되기 때문에 약 120배라고 보면 된다. 현재 환경분쟁에서 데시벨에 대한 인플레이션 심리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80㏈만도 모든 주민이 소음성 난청을 앓는 등 거주 자체가 불가능한 수치라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매향리 소음 데이터가 처음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88년 7월 전만규 위원장 등 주민들이 국방부·경기도 등에 민원을 제기한 직후 미 공군측이 측정한 수치였다. 당시 발표된 소음도는 90~110WECPNL이었다. 1989년 3월에는 경기도가 사격장 주변 4㎞ 이내 8개 마을에서 80~150㏈에 이르는 소음이 측정됐다고 밝혔다. 1990년 3월 국회 국방위원회는 매향리 사격장 일대 소음이 평균 90㏈ 이상, 1997년 1월 국방부는 90~120㏈이라고 각각 보고한 바 있었다.



[반론보도문]

제686호 본 시리즈 “안면도 반핵항쟁(3) ‘신화’ 완성한 최후의 양심선언” 기사에 대해 김남영씨(현 안면고남농산 대표)가 반론을 제기해왔습니다.

먼저 기사 내용 중 ‘안면도에 2차 핵풍을 부른 장본인’ ‘핵폐기장 유치에 앞장서서 투쟁위·주민과 가장 큰 갈등을 일으킨 당사자’ ‘찬핵 원흉에서 반핵 영웅으로’ 등의 표현이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습니다. 김씨와 강준길씨는 핵폐기장 유치에 앞장선 것이 아니라 안면도 유지급 및 많은 주민이 유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찬성 입장을 가졌을 뿐 ‘찬핵’이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김씨가 양심선언을 하게 된 배경이 투쟁위와 원자력연구소 사이에서 내면적 갈등을 일으켜서가 아니라 당시 강모 이장 등이 핵폐기장 유치 찬성 쪽으로 기울면서 주민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자 찬성측 주민에게 하지 말 것을 권유하다 듣지 않아 이런 갈등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이 양심선언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고 합니다.

1993년 3월 25일 열린 ‘안면도 핵폐기장 백지화 승리 기념 주민화합 큰잔치’에서 감사패를 받았다는 기사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습니다. 감사패를 받을 이유도 없고, 받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당사자와 주변 증언으로 확인됐으므로 제686호 본 시리즈 기사에 김씨의 위 반론 내용을 반영하고 이 부분을 정정합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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