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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명품족 ‘짝퉁’에 낚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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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황실 명품’소문에 톱스타 몰려… 알고 보니 20만 원짜리 ‘메이드 인 시흥’

[사회]연예인 명품족 ‘짝퉁’에 낚였다

지난 6월 1일, 서울 청담동의 한 클럽. 탤런트, 배우, 개그맨 등이 참석한 화려한 파티가 열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듯한 `‘럭셔리족’들이 1000명 정도 모여 열기가 뜨거웠던 이 행사는 스위스에서 만든 세계적인 명품 시계라는 `‘빈센트’의 론칭 파티.

청담동 패션 피플들 사이에서 `‘영국 황실의 특별 주문을 받아 제작·납품하다가 최근에야 민간인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소문난 이 시계는 국내 톱스타들이 행사장에 차고 나타나거나 방송 등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황실 전용 명품답게 가격도 고가여서 평범한(?) 제품이 개당 5000만 원. 하지만 그런 제품은 물론 1억2000만 원짜리 제품도 불티나게 팔렸다. 최근에는 보급형으로 500만 원대 제품도 나왔다.

그 날은 본격적인 한국 시장 판매를 앞두고 연예인은 물론 업계 관계자들과 국내 판매를 희망하는 이들까지 참석해 붐볐다. 다들 유난히 커다란 빈센트 시계를 손목에서 번쩍이며 자신의 재력과 감각을 자랑했다.

얼마 전 스위스 본사측과 한국 판매 계약을 체결한 김민수씨(가명)는 이날 부푼 마음으로 지인들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다. 이렇게 명품족들의 관심이 큰 걸 보면 판매도 장밋빛일 것 같아 흐뭇했다. 머릿속에선 벌써 다양한 판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함께 참석했던 지인이 천진한 눈빛으로 이렇게 물었다.

“이 회사, 스위스가 본사라면서 왜 스위스 사람은 한 명도 눈에 안 띄죠? 프랑스 제품 론칭 때는 프랑스 본사 간부들도 많이 왔던데…”

해외 명품이 국내 론칭이나 특별한 행사를 할 경우 본사 간부들은 물론 그 나라 대사나 상무관들도 참석할 만큼 한국 시장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한국인의 명품 사랑이 워낙 뜨겁기 때문이다. 그 여성의 말을 듣고 유심히 둘러보니 스위스 간부는 물론 다른 외국인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김씨도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한국 행사여서 굳이 초대하지 않았나보다’라고 생각했을 뿐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너무 유명한 스타들이 `‘마니아’로 알려졌고 너도나도 이 시계를 갖고 싶어하는데 스위스 본사 직원의 참석 여부가 무슨 문제랴.

그러나 그 지인은 달랐다. 팸플릿에 적힌 스위스 본사 주소를 자신이 아는 스위스 교포에게 보내 어떤 곳인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그 주소지에 `‘빈센트’ 회사 사무실이나 간판은 없었다. 그곳은 특허나 상품명을 등록해주는 공증사무실이었다. 바로 이모씨가 2000년에 ‘빈센트’란 회사명을 상표 등록한 곳이다.
서류상에는 존재하지만 빈센트는 영국 황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Made in Swiss는커녕 서울도 아닌 경기도 시흥의 허름한 공장에서 만드는 싸구려 시계였다. 그런데도 ‘`세계적 명품’으로 둔갑해 유명스타들이 기꺼이 자기 돈을 내고 사는가 하면 굴지의 백화점은 물론 청담동, 압구정동 등 3개 매장에서 팔렸다. 수사진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5000만 원짜리 시계의 원가는 20만 원이다.

‘빈센트’란 명품 브랜드를 창조한(?) 이씨는 6년 전부터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해왔다.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해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는 시계의 본고장 스위스에 가서 상표 등록을 했다. 그리고 2004년에도 빈센트란 브랜드로 시계를 만들어 소규모로 팔았다. 대만 등지를 다니며 ‘진짜 명품보다 더 그럴 듯해 보이는 `짝퉁’ 기술을 익힌 것 같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한다. 검찰에 따르면 그는 이미 사기 횡령 등의 유사 전과가 있다.

그리고 2005년부터 본격적인 럭셔리 VIP 마케팅에 들어갔다. 서울 청담동과 압구정동의 패션 피플, 즉 명품 관련 홍보대행사나 문화계 사람, 고급미용실, 연예기획사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며 `‘신화’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등 영국과 유럽 황실 가족들이 직접 주문 제작한 제품만 만들어왔다. 그래서 브랜드 인지도는 낮지만 이 시계를 찬 것만으로도 왕실 가족은 유대감을 느낀다. 그러다 최근에 일반인에게도 판매를 하기로 정책을 바꾼 것이다.”

이렇게 브랜드를 소개하면서 몇몇 스타에게는 `‘우리 제품을 착용해 주시면 그 자체가 홍보고 우리에겐 영광’이라며 선물로 주기도 했다. 영화 한 편에 수억 원 이상을 받지만 파티용 드레스는 물론 선글래스까지 협찬에 익숙한 스타들은 `‘영국 황실 가족이 차던 시계’란 말에 황송해하며 부지런히 차고 다녔고 몇몇 통이 큰 스타는 선물용으로 직접 사기도 했다. 명품쇼핑 중독증이란 ㄱ, 한류열풍의 스타인 ㅊ, 최근 재기에 성공한 ㄱ, 유명개그맨 ㄱ, ㅇ씨 등이 유난히 커다란 이 시계를 차고 다니자 다른 연예인들도 덩달아 샀고 부유층들도 사들였다. 빈센트측의 거래자료에 따르면 국내 정상급 연예인들은 대부분 선물받았거나 직접 구매했다.

연예인을 동원한 스타마케팅에 성공한 이씨는 강남 모 백화점에서 특별행사도 했고 본격적으로 국내 판매를 담당할 딜러를 모집해 계약금조로 각각 10억 원 정도의 돈을 받았다.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시계를 샀다는 한 연예인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선배가 차고 있는 걸 봤는데 너무 예쁘더라구요. 그래서 호기심을 보였더니 그 사장을 소개해줬어요.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박스에 담긴데다 황실 운운하는데 가짜란 생각을 할 수가 있나요? 물론 들어보지 못한 브랜드였지만, 명품 브랜드가 워낙 많은 데다 그동안 민간인들에겐 판매를 안 하던 거라는데 누가 의심하겠어요?”

스위스엔 스위스 시계가 없다 최근까지도 가짜 명품시계 사건은 수두룩했다. 국내에서 만든 가짜 롤렉스, 카르티에 등은 물론 홍콩과 대만 등 외국에서 밀수한 제품들이 압수되는 장면이 각종 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하지만 새로운 명품 브랜드를 창조해 톱클래스의 스타들과 저명인사들을 농락한 사건은 드물다. 게다가 화려한 론칭파티까지 열고 딜러들을 모집해 수십억 원의 계약금까지 받은 대범함도 놀랍다. 이런 대범함이 가능한 이유는 대한민국에 몰아닥친 명품중독증과 일부 연예인들의 천박한 선물 밝힘증 덕분이다.

요즘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소품이 아니다.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와 재력을 보여주는 도구다. 휴대전화나 곳곳에 걸린 벽시계로도 얼마든지 시간을 알 수 있지만 고가의 시계는 또 다른 액세서리 구실을 한다. 그래서 파텍 필립, 브레게, 바쉐론 콘스탄틴, 피아제, 프랭크 뮐러, 쇼파드, 보메 메르시에, 코럼 등 한국인은 발음도 제대로 하기 어렵고 개당 수백만 원에서 수십억 원에 달하는 시계를 손목에 얹고 다니는 이가 많다. 쇼메, 불가리, 카르티에 등 보석전문업체들도 시계를 만들어 명품 바람을 자극한다. 최근에는 시계에 다이아몬드를 장식하는 것이 유행이어서 가격대는 더욱 높아졌다. 물론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원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싸지만 `브랜드 명성이 높은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시계업체들은 전속 모델이나 홍보대사란 이름으로 유명스타들을 동원한 마케팅을 한다. 고가의 시계를 선물하고 드라마나 영화, 시상식장 등의 행사에 협찬도 한다. 명품중독증으로 알려진 청춘스타 ㄱ양은 테크노마린이란 독특한 시계가 국내에서 판매되었을 때 선물받은 것은 물론, 직접 사들인 것까지 같은 제품을 색색가지로 갖고 있어 부러움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그런 스타를 선망하는 이들이 카드빚을 내가면서 스타가 착용한 시계를 사들인다.

명품제품을 홍보하던 회사에 근무하던 30세의 여직원이 “유명 스타가 잡지 촬영에 사용할 것”이라며 6000만 원어치의 카르티에 시계와 에르메스 핸드백을 빌려가 돌려주지 않아 구속된 일도 있다. 매일 명품을 보고 만지는데 정작 자신의 경제형편이 허락하지 않으니 거짓말에 도둑질까지 한 것이다. 그 여직원은 명품을 전당포에 저당잡힌 돈으로 또 다른 명품을 사들였다. 명품시계를 사주면 성관계도 괜찮다고 원조교제 사이트에 글을 올린 여고생도 있다.

신경정신과 김병후 박사는 “외모지상주의와 더불어 이런 명품 열풍은 한 사람을 판단할 때 시간을 들여 성격, 능력, 다른 재능 등을 파악하기보다는 몇 초 동안에 얼굴과 시계 등의 액세서리로 판단하려는 현대인들의 경망한 조급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명품에 현혹되는 이들은 스타나 젊은 여성들만이 아니다. 중국 상하이에는 가짜 명품을 파는 짝퉁전문시장이 음성적으로 운영된다. 조선족 가이드는 “한국 국회의원들도 짝퉁 시계를 수십 개씩 사갖고 갔다”고 전했다. 고관들이 즐겨 받는 뇌물 명단에도 명품 시계는 빠지지 않는다.

이번 사건은 영국 황실과 스위스명품 시계 회사 등의 화려한 시나리오가 등장했지만 정작 스위스에는 진정한 스위스제 시계가 사라지고 있다. 스위스 연방 정부 규정은 시계 하나를 만들 때 수입 부품의 가치비율이 전체의 50%를 넘지 않으면 스위스산 시계로 인정한다. 외국의 값싼 시계부품을 구입해 스위스 내에서 조립만 해도 메이드 인 스위스가 되는 셈이다. 물론 `‘빈센트’는 메이드 인 스위스의 규정조차 안 지킨 `‘메이드 인 시흥’이긴 했다.

희대의 사기극을 기획 연출한 피의자 이씨는 현재 구속 수감 중이며 검찰은 이 사건의 진상과 피해자들이 얼마나 더 나올지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빈센트’를 자랑스럽게 착용했던 연예인들은 요즘 검찰의 ‘참고인 수사’요청에 시달리고 있다.

< 유인경 편집위원 al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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