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를 삼고초려한 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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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사건(1)

매향리 투사 전만규와 책사 권헌열, 미군 상대 16년 투쟁의 서막 올리다

애지중지하던 고양이가 있었다. 5년 동안 직접 밥을 주어 키운 그 고양이가 귀여운 새끼를 6마리나 낳았다.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의 어촌 총각 전만규(현 매향리평화마을건립추진위원장)는 어미 고양이는 애인인 양, 새끼 고양이는 자식인 양 지극사랑으로 돌보았다.

어느 날 그는 새벽 물때에 바다에 나가 고된 고기잡이를 하고 이른 아침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한 몸을 뉘어 잠시 눈을 붙였다. 새끼에게 먹일 젖이 바닥난 어미 고양이가 밥을 달라고 그의 얼굴을 간질였다. 자꾸만 단잠을 깨우는 고양이를 몇 번 뿌리치던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손에 삽이 들려 있었다. 발밑에는 새끼 고양이 6마리가 죽어 있었다. 잠을 깨운 어미 고양이를 올가미에 씌워 생매장하고 칭얼거리는 새끼들을 하나씩 돌에다 패대기친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달았지만 그 순간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낄 수 없었다.

자살과 엽기적 사건이 잦은 마을

매향리는 미 제7공군 사격장(일명 쿠니 사격장)이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그의 선조들이 뿌리를 내린 곳이었다. 땅이 없어도 바다와 갯벌에서 나는 고기와 조개 등으로 넉넉하게 먹고살 수 있었던 이곳에서 10대째 살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다 일을 하면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그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까닭을 안 것은 고양이를 죽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신문을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항공기 이착륙 지역에 사는 주민이 성격도 포악하고 자살률도 높다’는 미국 어느 대학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 기사였다. 왜 마을 사람들이 걸핏하면 자살하고, 가족끼리 식탁 앞에서 사소한 일로 폭력을 휘두르고, 이웃간 싸움에서 흉기를 드는지 의문이 풀렸다. 내가 왜 고양이를 죽였는지도 비로소 알게 됐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자신의 잔혹성보다 그 잔혹성의 정체가 더 전율스러웠다는 전만규의 최근 회고다. 그가 사는 매향1리에는 170여 가구가 살았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32명이 자살했다. 70대 노인이 장기를 두다가 식칼로 목을 찌르고 어린 중학생이 가방에서 칼을 꺼내 친구를 찔러 죽이는 등 엽기사건이 비일비재했다. 그는 확신했다. 매향리 사람들을 포악하게 만든 원흉이 바로 미군 사격장의 굉음과 폭음이라는 것을.

방위병 복무를 마친 그는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다.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잡이뿐인 그가 지긋지긋한 고향을 벗어날 방법은 그 길밖에 없었다. 그는 3개월 훈련 후 쿠웨이트로 나갔다. 목돈을 마련해 부모님을 모시고 하루라도 빨리 매향리를 떠나기 위해서였다.

1981년 6월 그는 1년 동안의 중동 건설 현장 근무를 마치고 귀향했다. 새로운 삶터를 찾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그는 또 한 번 절망했다. 그 사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뜬 것이다. 그 연유를 안 것은 한참 뒤였다. 주변을 닦달해 알아낸 아버지의 사인, 그것은 끔찍하게도 자살이었다. 아버지 역시 특별한 이유 없이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다. 그는 열사의 땅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벼르고 별렀던 계획을 바꾸었다.

‘내가 여기를 떠나느니 차라리 원수 같은 저걸 없애버리겠다!’

미군 사격장은 마을 주민에게 원수 같은 것이었다. 1951년부터 2005년까지 54년간 폭격 연습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로 사망한 주민만도 12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인명 피해와 경작·어로작업 제한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전투기 소음과 폭발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어디에 호소할 길조차 없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안보문제, 특히 미군기지에 시비를 거는 것은 ‘빨갱이’나 하는 짓이라는 게 마을 사람들의 의식이었다. 그가 주민을 규합해보려고 했지만 아예 씨알도 먹히지 않은 건 당연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1987년 6월항쟁은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그도 느낄 수 있었다. 이듬해 4월 그는 수원 버스터미널에서 신문을 한 장 샀다. 매향리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것을 읽던 그는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김포공항 인근 지역인 부천 고강동 주민의 농성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15일 동안 품을 팔아 번 돈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물어물어 고강동을 찾아가 여관을 잡았다. 항공기 소음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느껴보고 그곳 주민대책위 등을 찾아가 자료를 모았다. 이때 그가 대책위 관계자들에게 한 얘기는 유명하다.

“이게 무슨 소음입니까? 이 정도면 자장가지….”

매향리 소음이 민간 항공기의 그것과 다른 것은 그 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투기의 비행음만도 ‘창자가 흔들릴 지경’이지만 그것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갑자기 엄습한다는 점에서 더 가공스럽다. 특히 갓난아이는 이럴 때 자지러진다.

매향리 투쟁은 주도한 주민대책위원장 전만규, 주민지원 사업을 벌인 공추련 권헌열, 첫 역학조사를 실시한 인의협 임현술, 주민 집단소송 대리인으로 나섰던 이석태(왼쪽부터).

매향리 투쟁은 주도한 주민대책위원장 전만규, 주민지원 사업을 벌인 공추련 권헌열, 첫 역학조사를 실시한 인의협 임현술, 주민 집단소송 대리인으로 나섰던 이석태(왼쪽부터).

그런 건 ‘빨갱이’나 하는 짓

우선 그는 친구·선후배와 술자리를 하면서 젊은층부터 규합해나갔다. 청년들이 먼저 의기투합해 어른들을 설득, 이 문제를 정부 당국에 호소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면….

“마을 어른들에게 얘기하니까 굉장히 놀라면서 대뜸 ‘너희들 빨갱이냐?’고 했다. 아예 말을 못 꺼내게 거두절미했다. 그래서 내가 만든 ‘주민들에게 드리는 글’을 집집마다 배포해버렸다. 직접 주민들을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동안 자기들이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사에서 최장기 투쟁이자 군, 특히 미군을 대상으로 한 투쟁에서 승리의 금자탑을 쌓은 매향리 주민대책위의 출범 과정은 이렇듯 험난했다. 최초의 대책위가 결성된 것은 1988년 6월 14일이었다. 대책위의 이름은 그 후 여러 번 바뀌는데 그 명칭 변화만 봐도 ‘매향리 투쟁’의 경과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매향리 미군 사격장 소음공해 대책위’ ‘매향리 오폭과 폭음 피해 해소대책위’ ‘미 공군 국제포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로 점차 투쟁 대상이 분명해지고 수위가 높아졌다가 사격장이 완전 폐쇄된 후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추진위’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대책위의 활동은 1988년 7월 4일 사격장 부근 7개 마을(매향1·2·3리, 석천3·4리, 이화1·3리) 612명이 서명날인한 진정서를 경기도청·국방부 민원실에 접수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대책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해 12월 12일 결행된 이른바 ‘1차 투쟁’이 언론에 보도되면서였다.

주민 1000여 명이 시위에 나선 1차 투쟁은 사격장 안의 폐자동차 등 포격 목표물과 대형 원형표적을 주민들이 점거한 것이었다. 즉 인간방패를 만들어 포격을 방해한다는 작전이었다. 주민의 요구는 매우 단순하고 현실적이었다. 사격장을 이전하든가 집단 이주시켜주든가 안전 대책을 마련하고 피해 보상을 해주든가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고,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사격 연습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이날 시위는 최초로 미군 시설이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사건으로 기록됐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환경운동권에서 ‘매향리의 전설’로 불리는 권헌열(현 환경운동연합 미군기지환경특별위원)이다. 매향리 주민의 움직임이 알려졌을 때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데가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이었던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주민들이 소음공해에 시달리고 있고 그 원인이 군 사격장이라는 점은 공추련이 지향하는 ‘공해추방 반핵평화’와 딱 맞아떨어지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최열 공추련 의장(현 환경재단 대표)은 권헌열과 황상규(현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 전문위원)를 현지에 파견했다. 두 사람은 장유식(현 변호사)·김창수(현 국가안전보장회의 행정관) 등 평화연구소(소장 조성우) 팀과 함께 매향리로 갔으나 뜻밖에도 문전박대를 당했다. 전만규 대책위원장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외부세력의 개입이 싫다는 것이었다.

매향리 미 제7공군 사격장(일명 쿠니 사격장) 정문.

매향리 미 제7공군 사격장(일명 쿠니 사격장) 정문.

0% 가능성을 100% 승리로

주민들은 완강했다. 2주일 뒤 이들이 매향리를 다시 찾았을 때 전 위원장은 바다에 고기잡이 나가 있었다. 마을 초소 앞 다방에서 3시간을 기다려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답은 똑 같았다.

“당신네가 끼어들면 우리가 오해를 받습니다. 우리는 좌경이나 반미가 아닙니다. 생존권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세요.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권헌열이 전 위원장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한 때는 1989년 2월 하순이었다. ‘매향리 삼고초려’를 삼국지와 대비하면 제갈량이 거꾸로 유비를 찾아간 역(逆)삼고초려인 셈이다. 권헌열은 세 번째 매향리를 찾아가서야 비로소 전 위원장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공추련)는 다른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매향리가 공해문제로 고통받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우리는 이런 걸 해결하는 것이 본업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일이니까 우리가 해야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반드시 법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문적인 법률 지원이 필요합니다. 주민들이 입은 건강 피해를 입증하려면 의사들이 있어야 합니다. 또 현행 법으로 안 되는 것도 많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법을 고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법을 만들거나 고치려면 국회의원을 움직여야 하고….”

“하지만 그들이 우리 편이 돼주겠습니까?”

“공해문제에 관심 있는 변호사들이 있습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라는 의사 단체도 있습니다. 재야 출신 정치인들이 지난번에 국회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언론도 있습니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의로운 사람들이 매향리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

현재 미국 조지메이슨대에서 박사과정(환경정책 전공)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 중인 권헌열은 엉뚱한 인연으로 공추련 활동가가 됐다. 강원도 강릉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그는 서라벌고와 광운대 전자통신학과를 나왔다. 학생운동이나 주민운동과는 인연이 먼 환경이었다. 안면도 반핵항쟁의 문승식(현 친환경상품진흥원 구매진흥국장), 화성산업폐기물 사건의 여진구(현 생태보전시민모임 위임대표)와 함께 그가 공추련의 3대 주민운동 지원 성공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매향리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래서 특이하다.

그가 공추련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고교 동기인 최예용(현 시민환경연구소 기획실장)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그는 초동교회 대학생부에 적을 두고 교회연합 운동권 조직에서 활동했다. 2학년 때인 1985년 민정당 연수원 점거 사건으로 선배들이 대거 구속되는 바람에 이 조직은 깨지고 만다. 조직의 ‘명령’으로 교련 수강을 거부했던 그도 학적변경으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1988년 3월 제대한 그는 운동에 복귀할 데가 마땅찮았다. 이때 그의 손을 잡아끈 사람이 바로 최예용이었다. 이미 공장은 ‘운동 인재’가 넘쳐 다 못 받을 지경인 데다 이공계 출신으로서 가장 만만한(?) 분야가 과학기술운동, 그 중에서도 반공해운동이라는 분위기가 제법 조성돼 있던 시기였다. 그는 그해 4월부터 ‘친구 따라’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이하 공청협)에 가게 됐다.

공청협·공추련에서 그는 재주꾼으로 통했다. 이를테면 행사 때 전기·방송시설은 그의 몫이었다. 컴퓨터 사용에 익숙했고 운전 면허를 갖고 있었으며 매향리 지원사업에 차출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영어회화에도 능했다. 그래서 별명이 ‘권가이버’였다.

삼고초려 끝에 만난 매향리 투사 전만규와 책사 권헌열의 활약은 유비-제갈량의 이야기보다 더 기막히다. 군사시설, 그것도 미군시설을 대상으로 한 싸움은 ‘가능성 0%’라고 할 정도로 무모한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16년 후 그것이 ‘사격장 완전 폐쇄’라는 100% 승리로 귀결됐으니….

매향리 투쟁의 승리는 대책위의 다이내믹한 전술·전략이 주효한 데다 시운(時運)까지 가세한 결과로 풀이된다. 전만규 위원장과 최희일(현 대책위 고문)·이정원(현 매향2리 이장) 등 주민들의 끈질긴 시위투쟁, 이석태 변호사(현 법무법인덕수 변호사)가 주도한 집단소송, 폭발적으로 일어난 반미운동의 지원 등이 불가능의 벽을 무너뜨린 주요 동력이라는 얘기다.

해상 사격장인 농섬 포격 장면. 포격으로 원래 크기의 3분의 1만 남았다.

해상 사격장인 농섬 포격 장면. 포격으로 원래 크기의 3분의 1만 남았다.

주민에 쫓겨 벙커로 도망간 미군

대책위의 2차투쟁은 1989년 3월 팀스피리트 훈련 기간에 사격 연습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3주간에 걸쳐 포격장을 점거함으로써 사격장을 마비시켰다. 이 시위는 3월 6일 주민 1000여 명이 경찰 저지망을 뚫고 사격장에 진입하면서 시작됐다. 이때 사격장 내 관제탑이 처음으로 주민들에게 점거됐다. 시위대가 농섬까지 건너가 표적지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지르고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경찰은 시위대보다 많은 1200명의 인원을 투입해 이 시위를 진압했다.

하지만 연일 시위가 계속되자 경찰은 3월 13일 새벽 전경대원과 형사들을 마을에 투입, 전만규 위원장을 비롯한 주민 대표 10여 명을 연행했다. 당시 대책위가 발간한 ‘투쟁속보’ 제1호(1989년 3월 15일자)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굳게 단결한 화성군 주민들은 최루탄 연기 속에 14일 새벽 3시까지 주민 대표 구출투쟁을 전개했으며, 14일 오전부터 다시 시위를 전개하여 기어코 대표들을 구출하였다.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 학생들의 지원투쟁, 각 민주단체의 지원투쟁에 기겁한 폭력경찰들은 결국 14일 오후 6시께 주민 대표들을 석방한 것이다.”

팀스피리트 훈련 저지투쟁을 마친 대책위는 회의를 열어 농번기인 4월부터 6월 10일까지 활동을 중단하고 농사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그때까지 미군 측이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 또 다시 사격 훈련을 막겠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 ‘휴전협정’을 깬 것은 미군 측이었다. 5월 29일 사격장 안 1000여 평의 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던 전만규 위원장을 영외로 쫓아낸 뒤 그의 논에 흙과 자갈 4트럭분을 쏟아부은 사건이 일어났다. 위원장의 부대 출입을 금지하고 영농행위까지 방해한 데 분개한 백동현(당시 대책위 부위원장) 등 주민들이 강력히 항의하자 미군들은 되레 욕설과 조롱으로 응답했다. 흥분한 백씨가 철조망을 넘어 부대로 들어가자 미군들은 야구방망이 등으로 그를 집단폭행했다.

심한 부상을 입고 부대를 나온 그는 마을에 설치된 종을 쳐 비상을 걸었고, 분노한 주민들은 부대로 쳐들어가 차량과 집기를 부수고 기지를 완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미군들은 지하 벙크로 도망가 오산 기지에 구조를 요청했다.

이날 마을은 초토화됐다. 미군측에서 헬기로 완전무장한 기동타격대가 출동, 주민들을 향해 엎드려쏴 자세를 취했다. 주민들은 혼비백산해 마을로 도망쳤고, 뒤늦게 출동한 경찰이 마을을 샅샅이 뒤져 주민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권헌열에 따르면 마을의 남자는 다 연행했고, 그 숫자가 200명을 넘었다. 이 사건으로 전만규 위원장과 백동현 부위원장은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군사시설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권헌열과 공추련은 매향리에서 일어난 일을 외부에 알려 여론화하는 등 기초적인 지원사업을 펼친다. 4월 인의협 임현술·조성일 팀이 매향리 미군 사격장 지역주민의 건강 피해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한 것이라든가 6월 22일 공추련이 전국 22개 단체 60여명의 매향리 답사를 추진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원격 지원을 주도한 최열 공추련 의장은 매향리 문제는 환경문제라는 단선적인 접근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사회단체 공동답사를 기획했다. 답사팀 중에는 민청련 사건으로 복역하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근태 전민련 정책기획실장(현 열린우리당 의장)도 있었다. 다음은 최열의 매향리 최초 답사 소감.

“돌아오면서 느낀점이 매향리 문제는 환경·소음·오염피해 등과 같이 두부모 자르듯이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모든 모순이 환경문제로 집약돼 있었다. 미군의 포격에 농사짓던 부인을 잃은 주민이 사격장 경비원으로 취직해 있었다. 바로 그곳에 우리가 그런 문제를 조사하러 간 것을 아이러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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