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노동계 숙제 ‘터질 게 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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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건설노조 점거사태 왜?… 비정규직 차별·다단계 하청구조 우발적으로 불거져

포항건설노조 사태에 대해 포항지역 여론은 불리했다. 사진은 점거해제를 촉구하는 집회.

포항건설노조 사태에 대해 포항지역 여론은 불리했다. 사진은 점거해제를 촉구하는 집회.

건물 주변에 어지럽게 나뒹구는 쓰레기, 출입문마다 줄지어 선 무장 전·의경, 그리고 제 책상을 잃어버린 포스코 직원….
이는 우리나라 국가 기간산업의 상징물인 포스코 본사가 포항건설노조에 점거당한 9일간의 현장 상황이다.

다행히 7월 22일 노조원이 자진해산했지만 본사 점거농성은 1968년 포스코 창사 이래 38년 만에 처음이다. 그만큼 노동계는 물론 재계와 정부의 시선이 집중됐다. 포항건설노조가 본사 건물에 진입, 농성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7월 13일. 노조측은 “본사 점거 농성은 어디까지나 ‘우발적 사고’고, 포스코가 원인 제공자”라고 주장했다. 파업기간에 포스코와 하청업체가 노조 조합원의 생계터전인 포항제철소내 설비·공사현장에 대체인력(비조합원)을 투입하고, 이를 감시하는 조합원들에게 공권력을 투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3일 오전 7시, 노조는 평소처럼 포항제철소 7곳의 출입문에 100~150명의 조합원을 배치해 포스코 정규직원으로 위장한 하청업체의 대체인력(건설노조 비조합원) 투입을 감시했다. 사건은 제철소 정문에서 벌어졌다. 노조는 제철소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통근버스를 감시할 수 없어 ‘샘플’로 버스 1대를 잡고 대체인력 승차여부를 점검하려 했으나 포스코측이 묵살했다.

버스 문은 끝내 열리지 않은 채 포스코가 요청한 경찰 500여 명이 버스를 에워싼 조합원 100여 명을 물리치고 통근버스를 제철소 안으로 통과시킨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당시 경찰이 조합원 3명을 연행한 것은 노조를 더욱 자극했다. 연행 조합원은 곧 풀려났지만 격앙된 노조의 다음 행동을 막기는 어려웠다.

창사 38년 만에 처음 있는 사건

다른 출입문에 있던 조합원들이 격앙된 상태로 삽시간에 정문에 몰렸고, 격렬한 토론 끝에 이날 오후 2시 포스코의 사과를 요구하며 간선도로 건너편에 우뚝 선 12층짜리 포스코 본사건물로 진입했다. 포스코 본사 직원 600여 명은 느닷없는 노조의 진입 이후 밤 11시 퇴근이 허용될 때까지 불안과 초조 속에 무려 9시간이나 사무실에 억류됐다.

건물 1~2층을 점거했던 노조원 2000여 명은 경찰이 공권력을 동원, 진압에 나선 7월 15일 새벽 일반 사무실과 임원실이 밀집된 5층 이상 건물로 자리를 옮긴 후 경찰과 20일 현재까지 지루하게 대치했다. 경찰이 강제진압을 시도하면 취사용 LP가스를 이용해 만든 화염방사기를 쏘고, 끓인 물을 퍼붓고,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두르며 격렬히 저항했다.

정부가 7월 18일 노사관계에 대해 ‘합법보장, 불법필벌’의 원칙을 천명한 뒤 포스코 본사 건물의 단전과 음식물 반입까지 중단되는 등 심각한 고립상황에도 노조는 점거농성을 쉽사리 풀지 않았다. 청와대가 20일 불법 엄벌 의지를 밝힌 이후 상당수의 조합원이 건강악화와 개인 사정을 이유로 농성장을 이탈했지만, 본사 건물에는 여전히 최소한 1500명 이상의 조합원이 버텼다.

점거당한 포크소본사 현장. 각종 집기와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다.

점거당한 포크소본사 현장. 각종 집기와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다.

경찰은 각각 건물 중간과 끝에 위치한 2개의 계단을 통해 특공조를 투입하는 것과 건물 벽면 통유리를 깨고 진압하는 것, 옥상에 특공대를 투입하는 방법 등 전방위적으로 검토했다.

진압시기와 방법을 저울질하는 동안 건물내 건설노조를 지원하기 위한 민노총 시위가 수시로 벌어졌다. 7월 16일 포스코로 통하는 관문인 포항 형산로터리에서 열린 ‘노동탄압 규탄 집회’ 때 경찰과 충돌을 빚어 조합원 하모씨(44·제관공)가 머리를 다쳐 ‘준뇌사’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여론은 노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포항지역 30여 개 시민단체 회원 2000여 명이 7월 16일 파업중단, 점거해제를 촉구하는 집회를 가진 데 이어 18일 50개 단체 1만여 명이 ‘범시민경제살리기 결의대회’를 갖고 파업 조기중단을 요구했다.
본사 점거가 ‘우발적 사고’였다는 노조가 이처럼 악화된 여론을 묵살하면서까지 장기 점거농성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조는 포스코가 노사 교섭의 직접 당사자로 나서지 않는 이상 문제의 근본 해결은 없다고 주장한다. 건설노조·건설업체·포스코 또는 포스코건설은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노조·건설업체·포스코건설로 얽혀

포항건설노조는 건설업체에 일용직으로 고용된 3000여 명의 근로자들로, 포항제철소내 파이넥스 설비와 설비첨단화 작업현장에 투입된다. 노조 집행부 산하 전기·기계·토목·제관 등 직종별로 10개의 분회가 있다. 조합원의 근로여건 및 시간과 임금 등은 포스코가 업종별 하청업체에 공사를 발주할 때 계약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사측인 건설업체협의회는 노조의 임·단협 요구사항을 들어줄 있는 여력이 없다.

[사회]노동계 숙제 ‘터질 게 터졌네’

노조는 ▲주5일제 도입 ▲1일 8시간 근무 ▲임금 15% 인상 ▲재하청 금지(시공참여자 금지) ▲외국인 근로자 고용금지 등 7개 핵심사항을 걸고 사측과 교섭을 요구했다. 조합원의 월평균 임금이 180만 원대로 도시근로자 평균치(220만 원대)에 훨씬 못 미친다고도 했다. 또 1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한 주5일 근무도 법제화됐음을 강조했다.

이지경 위원장(41) 은 “해고가 자유로운 일용직인 데다, 1년에 고작 9개월만 일할 수 있고 그나마 임금이 체불돼도 하소연할 길이 없는 비정규직의 처지를 헤아려 달라”고 호소했다. 공사 재하청과 시공참여자(일명 오야지) 제도 때문에 4대 보험혜택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임금이 체불돼도 쉽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민노총 관계자는 “포스코는 대기업 중 가장 먼저 비정규직 근로자 도입을 추진했고 협력, 용역, 일용 등으로 고용형태를 분리한 데다 저임금 정책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사측은 꿈쩍하지 않았다. 유급 토요 휴무에다 15%의 임금인상은 경영난을 부추겨 회사와 근로자의 공멸을 자초한다는 것이다. 박두균 전문건설협회장은 “토요일 무급 휴무는 고려해 볼 수 있으나 유급 휴무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노조 산하 토목 분회는 조합원 명단조차 제출하지 않아 노조 실존여부를 알지 못해 교섭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재하청 금지 요구 등은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교섭을 통해 명문화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포스코도 강경했다. 장성환 섭외부장(51) 은 “건설노조와 직접 대화는 물론 하청업체 지원을 통한 노조요구 수용도 검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노조가 사용자인 건설업체와의 협상이 어렵게 되자 제3자인 포스코 건물까지 점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결국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은 9일 만에 끝났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노·사·정 ‘대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참담한 우리 시대 노동문제의 한 단면이다.

<포항/전국부·백승목 기자 smbae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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