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타 없어질 뻔한 ‘안면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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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반핵항쟁(2)

자생적 반핵운동가의 운명적 등장과 거세게 몰아친 11·8항쟁의 후폭풍

안면도 시위사태가 진정된 11월 10일 그동안 수업을 거부했던 학생들이 눈바람을 맞으며 경운기를 타고 등교하고 있다.

안면도 시위사태가 진정된 11월 10일 그동안 수업을 거부했던 학생들이 눈바람을 맞으며 경운기를 타고 등교하고 있다.

최규만(현 고남수산냉동 대표)이 안면도로 낙향한 것은 25세 되던 해였다. 중학교 때부터 가수가 된답시고 헌 기타를 메고 다니던 그가 고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난 것은 그리 이상할 게 없었다. 별스러운 점은 한창 나이에 다시 낙향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그는 밤무대에 출연하면서 연예계 진출을 노렸다. 이런 생활을 하면 대개 낮에는 백수 아니면 건달이 된다. 그는 영등포 시장통에서 반건달 노릇을 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그는 계속 서울에 살았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면 태진아·현철처럼 늦깎이 가수가 됐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의 성격이나 기질로 보아 서울에서 자수성가했을 것이다. 신군부가 자연인 최규만의 이런 개인사를 바꿔놓았고, 그것이 안면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건달 세계에 있던 그는 신군부의 숙정 리스트에 올랐다. 객지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자 비로소 고향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그에게 안면도는 ‘불량배’든 ‘사회악’이든 상관하지 않고 받아주는 마지막 도피처였다.

고향에서 피신 생활을 하며 시작한 것이 건재상이었다. 형이 운영하다 말아먹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단계에 차고 들어간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쓰러져가는 가게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한술 더 떠 크게 성공시켰다. 안면도에서 가장 큰 종합건재상을 운영하는 ‘청년 유지’ 대열에 올랐다. 이때가 1990년 11월 안면도에 ‘핵풍(核風)’이 몰아칠 무렵이었고, 그의 나이 고작 35세였다.

주민의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

안면도 고남면 오점마을 출신 최일권(현 농·어업 종사)의 운명도 범상찮다. 그의 부모는 딸만 내리 넷을 낳은 뒤 그를 얻었다. 안면중을 거쳐 서울 삼육고를 졸업한 그는 군복무를 마친 뒤 25세 되던 해에 속세를 등졌다. 남에게 말하지 못할 개인적 아픔과 방황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절에 가서 공부를 실컷 해보고 싶었다.

부산 승학산 덕명사 토굴 암자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빠르게 법문에 들었다. 6개월 만에 승주 송광사로 거처를 옮겼다. 법명은 설진(設眞), 당호는 자운영(紫雲英). 안면도에 핵풍이 상륙하기 전까지 그는 신심이 깊고 모범적인 ‘FM 스님’으로 불렸다.

속세의 인연은 끊을 수 있지만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법인가. 29세 되던 1990년 10월 말 설진 스님은 잠시 하산했다. 맏아들이 출가한 줄을 꿈에도 모르던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큰누나가 매형과 함께 배 사고로 죽은 뒤 처음 맞은 추석에 그는 고향에 성묘를 하러 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그가 중이 된 사실을 알았고 그 충격과 상심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큰스님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고 아버지 상을 치르고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출가한 지 4년 만에 승복을 입고 귀향했다.

2003년 엄홍길 대장이 이끄는 히말라야 로체샤르(8400m) 원정대의 정상 공격조로 나섰다가 정상 정복을 150m 앞두고 눈사태에 휩쓸려 실종된 산악인 박주훈은 1967년 안면도 고남면 장곡리에서 태어났다. 고남초·안남중을 졸업한 그는 천안북일고를 다니던 중에 결혼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저지른 ‘사고’로 인해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1988년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 과정을 마쳤다.

안면도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그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핵풍의 반경에서 벗어나 있던 그에게 뻗친 운명의 손길은 묘했다. 1990년 11월 초 그는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프라이드 승용차를 몰고 귀향길에 올랐다.

전두환 신군부가 불량배들을 잡아 삼청교육대에 보내지 않았다면, 설진 스님의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박주훈의 예비군 훈련 날짜가 며칠만 일렀다면… 그랬다면 안면도 사태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안면도의 승리는 1990년 11·8시위로 표출된 주민 항쟁의 규모나 격렬함에 있었던 게 아니다. 최규만·최일권·박주훈 등과 같은 자생적 반핵운동가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핵폐기장 후보지인 고남면 반핵투사 3인방. 왼쪽부터 최규만, 최일권(설진 스님), 박주훈.

핵폐기장 후보지인 고남면 반핵투사 3인방. 왼쪽부터 최규만, 최일권(설진 스님), 박주훈.

외견상 11·8항쟁은 안면도민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이날 시위의 1차적 목표는 다음날 열릴 원자력위원회의 안면도 핵폐기장 부지 결정을 막는 일이었고, 최종 목표는 핵폐기장 건설 계획의 완전 백지화였다. 일단 정부는 안면도민의 이런 요구를 수용하는 차원을 넘어 그 이상의 조치를 취했다.

정부는 11월 8일 저녁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강행 방침을 철회했다. 다음날에는 과기처 장관을 경질하고 충남도경국장을 직위해제했다. 지서·승용차·현장사무소·굴삭장비(포크레인)를 방화한 폭동 수준의 시위사태에 대해서도 김상희·김홍복·노정오·최규현 등 4명을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이 밖에 11·8사태와 관련해 사법처리한 주민은 8명이었다. 최석칠·명제관·김한중·원유현·김명천·강광석 등 6명이 불구속기소, 임남순·신형철이 지명수배됐다. 구속자들도 그해 12월 27일 금보석으로 석방된다. 나중에 사법처리되는 최규만·박주훈까지 포함한 이들 안면도 반핵항쟁 관련자들은 1993년 3월 전원 사면된다.

“그때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안면도 사태에 개입했던 정치인들의 그 후 행보도 흥미롭다. 안면도민의 공적(公敵)이었던 심대평 충남지사(현 국민중심당 대표)는 뒷날 민선도지사를 지내면서 안면도를 각별히 배려하는 도정을 편다. 11·8사태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노무현 변호사(현 대통령)와 그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심대평 지사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이해찬 의원(전 국무총리)은 대통령과 총리로서 부안사태를 겪고 경주에 방폐장을 ‘유치’함으로써 역대 어느 정부도 못하던 원자력정책의 개가를 울린다.
안면도민이 11·8항쟁을 승리로 평가하는 까닭은 시위 규모나 양상, 장관 경질, 핵폐기장 유보조치 등 가시적인 성과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폭력으로 발전할 뻔한 사태를 절묘하게 피한 데 있다는 게 항쟁 주역들의 후일담이다. 이 부분은 당시 정부가 11·8사태를 정치적으로 서둘러 봉합하는 바람에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당시 투쟁위 집행부, 특히 청년 중심의 특공대원(당시 공식적인 이름은 질서요원)의 작전은 무장봉기 수준이었다. 안면연륙교 폭파가 준비돼 있었고, 독극물 살포를 위한 소방차도 접수한 상태였다. 특공대를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했던 김상희는 “그때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고, 말 그대로 전쟁 상황이었다”고 최근 회고했다.

안면도는 ‘안면송’으로 유명한 소나무 숲과 해안의 백사장 등 수려한 자연경관뿐 아니라 쌀과 어족자원이 풍부해 자급자족이 가능한 섬이었다. ‘안면공화국 만세’라는 구호를 쓴 마대자루 옷이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외부 불순세력 개입 의혹을 받은 이 구호를 생각해낸 이는 박주훈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연륙교 폭파계획에 많은 주민이 동조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핵폐기장을 받느니 차라리 육지와 단절하고 ‘우리끼리’ 살자는 뜻이었다.

특공대의 작전 중 또 하나는 소나무 숲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모기향을 이용해 시한장치를 만들어 주민들이 패배할 경우 발화한다는 계획이었다. 소나무 숲은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안면도의 명물이었다.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안면도가 죽는데 송림을 다 태우고 같이 죽자”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담은 작전이었다. 최일권에 따르면 실제로 시험에 성공했고, 실전에 사용할 모기향까지 준비해놓았다.

그런데 11·8항쟁 때는 이런 작전계획이 하나도 실행되지 않았다. 저지선의 ‘인간 바리케이드’라든가 지서 방화 등 외부에 알려진 사태는 오히려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그렇게 된 요인은 두 가지로 분석된다. 당시 작전의 일선에 있었던 김상희의 최근 회고.

“그때 연륙교가 보수 중이었는데 난간 도면까지 입수한 상태였다. 고남에서 휘발유 섞은 모래를 드럼통에 담아 가지고 갔는데 전경들이 선수를 친 것이다. 연륙교 건너편에 있던 전경대가 아침을 먹고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미 일부가 넘어와 창기리 참새골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굉장히 애석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이었다. 전경들이 일찍 들어오지 않았으면 큰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안면도가 다 불탈 뻔했다.”

경찰이 발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연륙교 점거에 실패한 특공대는 8㎞ 후방에 있는 시위군중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였다. 따라서 후속 작전도 무용지물이 됐다. 특공대는 퇴각에 퇴각을 거듭, 안면읍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한전 안면출장소 앞 언덕에 겨우 바리케이드를 칠 수 있었다.

대형 참화를 막은 1차적 요인이 초동단계에서 기선을 잡은 경찰에 있었다면 2차적 요인은 주민들 몫이었다. 주민의 자율통제 기능이 기막히게 작동한 것이다. 즉 시위 효과는 극대화하면서 피해는 최소화하는 결과를 얻었다.

안면지서는 낡은 목조건물이었다. 곧 허물고 다시 지을 계획이었다. 주민들이 방화할 당시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와 지서 안의 서류는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 건물이 불탈 무렵 남쪽의 고남면 상황도 험악했다. 지서와 면사무소를 주민들이 접수한 상태였다. 뒤늦게 그 현장으로 달려갔던 최규만의 기억에 따르면….

“안면지서가 불타는 것을 보고 고남 쪽으로 긴급히 갔는데 주민들이 면사무소와 지서에 휘발유를 다 뿌려놓고 있었다. ‘이건 남겨두자’고 했다. 한꺼번에 다 써먹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설득했다. 그래서 고남에서는 면사무소와 지서가 살았다.”

불타는 안면지서.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와 지서 서류 등을 대피시킨 상태에서 주민들이 방화했다.

불타는 안면지서.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와 지서 서류 등을 대피시킨 상태에서 주민들이 방화했다.

‘외부세력’ 문승식의 대탈주

당시 후방에 있던 설진 스님은 전경의 진압작전이 시작된 뒤 군중의 혼란 상황을 목격했다. 1만 명이 넘는 군중이 협소한 읍내에 밀집한 것은 그 자체가 위험요소였다. 게다가 그와 박주훈·문승식(현 친환경상품진흥원 구매진흥구장) 등 후방 담당조가 고남면으로 가는 비석골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군중이 빠져나가 안면읍이 전경에게 점거돼 초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남고생은 전방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며 전경과 싸우도록 했고, 여고생과 중학생은 후방에 배치했다. 도망가려던 주민들은 비석골에서 스크럼을 짠 어린 학생들에게 막혔다. 학생들이 울면서 ‘엄마·아빠, 고향을 살려주세요’라고 외쳤다. 이렇게 퇴로가 막힌 읍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이런 혼란 중에도 사망자는 물론 큰 부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고, 약탈·절도 등이 한 건도 없었던 건 놀라웠다.”

유일한 ‘외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문승식이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11·8사태가 일어나던 날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에서 최열 의장(현 환경재단 대표)이 처음으로 현지에 내려왔다. 이날 그는 서산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후 안면도로 들어갔는데, 경찰이 외부인의 입도(入島)를 전면 통제하는 와중에도 무사통과했다. 이 즈음 경찰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위상이 높았던 셈이다.

안면도로 들어간 그는 청년그룹을 만났지만 문승식과는 소통하지 않았다. 문승식이 노출되면 주민들의 반핵항쟁에 대한 당국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공추련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공추련의 역할은 절묘했다. 핵 관련 정보, 정치권·정부의 동향, 운동 방법과 전략·전술, 언론플레이 등 모든 외곽 지원을 문승식을 통해 보이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우선 최열의 서산집회 연설 내용을 보면 안면도 주민 의식을 반핵으로 무장시킨 공추련의 논리를 엿볼 수 있다. 그의 기억을 빌리면….

“핵폐기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 중 가장 무서운 것이다.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느낄 수 없다. 특히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플루토늄 239는 1g만으로도 인간 100만명이 폐암에 걸릴 수 있는 물질이다. 그리고 그 독성이 절반으로 주는 데 걸리는 기간이 2만4000년으로, 이론상으로 100만 년이 지나야 청산가리 정도로 독성이 줄어든다. 홍성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인데 여기에 주민 몰래 이렇게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걸 원래는 영덕에 추진하다가 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니까… 5000명이 모인 데서 이런 연설을 했다.”

안면도민에게 이런 논리가 그대로 이식돼 핵폐기장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불어넣은 것은 11·8사태의 전개 과정이 잘 말해준다. 뒷날 소설 형식으로 11·8항쟁의 전말을 정리한 ‘핵풍’(문승식, 참빛출판사, 1994년)에도 문승식을 고리로 한 공추련과 투쟁위의 커넥션이 잘 기술돼 있다. 주민과 투쟁위의 향방을 결정지은 11·6집회 상황을 인용하면….

“상황실에 있던 진수(문승식을 지칭-필자 주)는 10시 30분 쯤에 공추련 최열 의장의 연락을 받았다. 오후 2시에 과기처 장관이 핵폐기장 설치문제와 관련된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인데, 잘 되어야 건설 계획을 유보한다는 조치를 내릴 것으로 보이니까 그 말에 주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당부의 얘기였다.”

최열 의장의 예견은 적중했다. 당국의 교란작전에 투쟁위가 강·온파로 양분될 수 있는 상황이 되고 이날 집회·시위가 강경파인 문승식과 청년그룹의 주도로 강행됨으로써 대세가 갈리게 된다.

최대의 효과 거둔 최소 실력행사

경찰에 압수된 시위용품. 11·8시위는 투쟁위 집행부가 세운 작전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경찰에 압수된 시위용품. 11·8시위는 투쟁위 집행부가 세운 작전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다시 11·8시위 후 문승식의 행적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날 상황 종료 후 그에게 닥친 시급한 과제는 무사히 안면도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쉽지 않았다. 연륙교가 봉쇄된 이상 그는 독안에 든 쥐였다. 유일한 도주로는 배를 띄우는 것인데 그것 역시 경찰에게 ‘나 잡아 가슈’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에는 경찰이 연행자를 조사하면 그의 존재가 드러날 것이고, 날이 새면 전경대와 형사들이 재진입해 섬 안을 이 잡듯이 뒤질 게 뻔했다. 그는 일단 고남으로 철수해 기회를 엿보았다. 그의 탈출을 책임지기로 한 이는 설진 스님과 박주훈이었다. 이들은 일단 고남면 소재지에 있는 조종오(작고)의 집에 그를 숨겼다.

안면도 반핵항쟁을 이끈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인 조종오는 다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 몸이었지만 최규만과 설진 스님, 박주훈 등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투쟁을 뒷받침했다. 괄괄한 성격의 최규만과 정반대로 차분하고 온화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후배들을 다독거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그의 다방에서 동원된 ‘현금’은 재정 면에서 윤활유가 됐다.

문승식은 조종오의 집에서 1박한 뒤 노출되기 쉬운 소재지에서 벗어나 장곡리 박주훈의 집에 은신하면서 배가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3일 후 그는 설진 스님이 마련한 배로 영목항을 떠나 홍성군 천북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일설에 따르면 최규만 등이 고남지서의 방화를 막아준 보답으로 지서에서 눈감아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대학생 200여 명이 주민으로 위장해 폭력시위를 일으켰다”며 외부세력 색출에 나섰던 경찰은 대학생은커녕 안면도 주민이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잡지 못했다.

11·8 안면도항쟁은 민민운동 진영에서 반핵운동의 승리이자 주민운동의 모범적 사례로 회자됐다. 이 무렵 활기를 띠기 시작한 골프장 반대운동 등 주민운동 현장에 이런 플래카드가 나붙곤 했다. ‘안면도도 이겼다! 우리도 이기자!’

시위는 상대를 굴복시킬 정도의 실력행사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일 터이다. 너무 얌전하게 해서는 상대를 움직일 수 없고, 너무 무리하게 해서는 되레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이 점에서 11·8시위는 ‘적정선’을 지켰다. 못 쓰는 지서 건물을 태우는 등 최소한(?)의 실력행사로 주무장관을 경질시키는 등의 최대한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다만 주민들에게 아쉬운 것은 바리케이드를 불태울 때 당제를 지내던 소나무 고목도 함께 산화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안면도의 상징인 그 소나무가 자신을 불태워 안면도를 지켰다고 자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최규만은 10년 동안 고향에서 땀 흘려 이룩한 부와 명예를 모두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다. 부친의 상을 치르러 잠시 속세로 나왔던 설진 스님은 산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환속한다.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고향에 왔던 박주훈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조종오는 병마를 얻어 가장 먼저 이들 곁을 떠나게 된다. 안면도를 탈출해 무사히 공추련에 복귀한 문승식도 결국에는 공추련을 정리하고 안면도로 ‘하방’한다.

이들의 인생을 바꿀 11·8항쟁의 후폭풍이 안면도를 엄습했다. 그것은 더 강력하고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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