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 반핵항쟁(1) 11·8대첩, 7일간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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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에 ‘침투’한 공추련 간사 문승식과 주민투쟁 이끈 ‘건달’들의 활약상

문승식(현 친환경상품진흥원 구매진흥국장)은 흥분을 억누르며 5일 간의 여정을 복기하고 있었다. 안면도와 태안반도를 이어주는 유일한 육로는 안면교였다. 이 다리를 끊으면 안면도는 육지와는 고립된, 말 그대로 ‘섬’이 된다.

날이 밝으면 대규모 경찰 병력이 이 연륙교를 통과해 안면도를 유린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깨질 것이냐, 저항할 것이냐. 깨지면 주민 조직은 와해되고 핵폐기장을 건설하려는 저들의 목적도 결국 달성될 것이다. 저항하면?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안면도에서의 5일은 그에게 안면(安眠)이 아닌 불면(不眠)의 나날이었다. ‘주민조직 사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예까지 왔다. 주민들은 저항을 선택했다. 서울·대전으로 출장나간 지도부는 ‘빈손’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방금 상황실에서는 충남지사 면담을 끝낸 이들로부터 ‘예정대로 집회 강행’이라는 지침을 하달받았다.

이제는 싸움이다. 그것도 무조건 이겨야 하는 싸움이다. 패배는 파멸이고 죽음일 뿐이다. 어설픈 싸움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확실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경찰의 연륙교 진입을 막는 것일 터이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연륙교를 끊어버리고 안면도가 다시 고립된 섬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주민들이 무장하는 것…. 비밀 아지트에 모인 청년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아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연륙교를 폭파합시다.”

1990년 11월 7일 늦은 밤 안면도핵폐기장건설결사반대투쟁위원회(이하 투위) 비밀집행부는 전대미문의 항전 계획을 수립했다. 연륙교 폭파, 자살조 투입, 도로 절단, 소방차 접수, 독극물 살포…. ‘제2의 광주항쟁’ ‘사노맹이 극찬한 민중봉기’ ‘80년 광주, 90년 안면도’ 등의 수사(修辭)와 함께 반핵운동사에 굵은 획을 그은 11·8 안면도 반핵항쟁의 막은 이렇게 올랐다.
광주항쟁 이후 ‘최악’의 주민시위 사태로 꼽히는 안면도항쟁(반핵운동 진영은 ‘안면도사태’ ‘안면도사건’ 대신 이 표현을 즐겨 쓴다)은 양극단의 비화를 전하고 있다. 읍사무소가 주민에게 접수되고 공무원이 납치·감금·억류되며 지서가 방화로 전소된 것 등은 드러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엄청난 사태로 발전할 뻔했으며 주민들 스스로 그런 사태를 자제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노맹도 극찬한 ‘제2의 광주항쟁’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조직국 간사 문승식이 안면도에 ‘침투’한 것은 문제가 불거진 당일인 11월 3일이었다. 안면도사태의 시작은 이 날자 ‘한겨레신문’ 보도였다. ‘안면도에 핵폐기물 영구처분장’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전날 과학기술처(이하 과기처)가 ‘원자력 제2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중·저준위 핵폐기물 영구처분장을 안면도에 건설하기로 했으며 9일께 열릴 제227차 원자력위원회(위원장 이승윤 부총리)에서 최종 확정하는 행정절차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날 공추련은 즉각 대응에 착수, 석간신문 마감시간 전에 반대성명을 내고 보도자료를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최열 의장(현 환경재단 대표)과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박상철(현 환경운동연합 감사)·문승식 등 조직국 간사들이 이 숨가쁜 작업을 마친 때가 오전 11시쯤이었다.

이들은 이른 점심을 먹으면서 한숨을 돌린 뒤 현지에 파견할 간사로 문승식을 지목했다. 고향이 안면도와 인접한 태안군 남면 몽산포인데다 주민조직사업이 본업인 조직국 소속이니 그것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안면도 반핵항쟁을 이끈 투위 지도부 최규만, 공추련에서 파견된 문승식, 청년조직인 특공대의 김상희(왼쪽부터).

안면도 반핵항쟁을 이끈 투위 지도부 최규만, 공추련에서 파견된 문승식, 청년조직인 특공대의 김상희(왼쪽부터).

성균관대 산업심리학과 85학번인 그는 PD계열 학생운동권 출신이었다. 한창 ‘노동해방’을 꿈꾸며 의식을 갈고닦던 그를 변화시킨 것은 학내에 나붙은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의 대자보였다. 그것은 온산공해병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는 “노동운동·학생운동도 있지만 그 대자보가 가슴에 와 닿았다”고 최근 회고했다. 그런 참에 고향에 대산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문연을 찾아가 최열을 만난 것이 반공해운동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였다.

간단히 자료를 챙겨 귀향길에 오른 그가 안면도로 가는 길목인 서산에 도착한 것은 그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그가 곧장 안면도로 가지 않고 서산을 경유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모교인 서령고가 있는 서산에는 지인이 많았다. 안면도에 가기 전에 우선 거기서 ‘작업’할 게 많았던 것이다.

주민 지원 사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주민과 정서적 일체감을 갖기 어려워 겉돌기 일쑤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외부세력’으로 배척되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안면도는 그의 고향인 남면과 같은 태안군이긴 하지만 정서적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고, 미리 서산·태안·홍성 등 인근 지역의 지원체제를 갖춰둘 필요가 있었다.

뒷날 공추련이 낸 ‘안면도 반핵항쟁자료집’에 따르면 문승식이 서산에 내려간 그날 저녁 서산·태안공해추방운동협의회(회장 김기중, 이하 서태공추협)가 떴다. 이 조직은 이 지역 농민회·전교조·참일꾼청년회 등 운동권 성향의 단체로 이뤄진 만큼 상황 인식이나 대처 방향에 대한 의견 통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음날 이들은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낸 뒤 안면도로 향했다. 안면도는 중앙의 정보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운동성을 띤 단체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역 유력인사들을 중심으로 핵폐기장 소식이 전해져 반감이 조성돼 있긴 했지만 조직화된 상태는 아니었다.

안면도에서 주민을 규합할 수 있는 세력은 JC·로타리·라이온스·반도청년회 등 민간조직이었다. 이들이 주축이 돼 자발적으로 11월 4일 구성한 조직이 안면도핵폐기장반대추진위원회(위원장 정충)였다. 보도에 의하면 안면도 핵폐기장은 9일 열리는 원자력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결정하게끔 돼 있었다. 불과 5일밖에 남지 않은 긴박한 상황에 ‘추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띄울 정도로 긴장감이 약했던 것이다.

문승식과 서태공추협 인사들은 이들을 만나 “안면도뿐 아니라 서산·태안, 그리고 홍성군까지 합심해서 싸워도 될까 말까한 일”이라고 경각심을 불어넣었다. 특히 문승식은 자신이 서울의 공추련에서 파견됐음을 분명히 밝히고 중앙의 모든 반핵세력의 지원까지 받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벌금 5만 원에 끓어오른 불길

조직이 결성된 뒤 주민들의 반대운동은 일단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제3일인 11월 5일 주민 100여 명이 승언리에서 조계산까지 3㎞ 거리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조계산에서는 휴양림 조성 공사를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를 핵폐기장 위장시설로 오해하고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날 안면읍 이장 28명이 집단사표를 냈고 추진위는 투위로 확대개편됐다.

투위는 다음날 승언리 버스터미널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회에 참여시키기로 했고, 각 가구에서 한 명 이상은 꼭 나와야 하며, 불참 가구는 나중에 5만 원씩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하루 사이에 주민들은 눈에 띄게 격앙돼 있었다. 이제는 저절로 반핵의 불길이 타오르는 듯했다.

문승식은 차분하게 주민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는 서울의 공추련 상황실 및 서산의 서태공추협 사무실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상황을 보고하고 자료를 제공받았다. 공추련에는 김혜정 총무부장(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등이 24시간 상황을 서고 있었고, 최열 의장도 수시로 정보와 지침을 내려주었다. 이처럼 안면도의 동향과 외부의 상황을 종합, 정확한 방향으로 싸움을 유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가 볼 때는 투위는 부족한 구석이 있었다. 주민들은 핵폐기장에 대한 반감으로 들끓고 있었지만 지역유지들로 이뤄진 투위의 지도부가 투쟁을 주도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즉 견고한 투쟁주체가 있어야 했다. 이 외진 섬에서 그런 세력이 있을 리 없고 단기간에 조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묵고 있는 여관방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일단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안면읍에서 힘깨나 쓰는 주먹들인 이들의 등장으로 안면도 반핵항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당시 안면도에는 양대 라이벌 건달조직이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두 세력이 힘을 합치고 상당수가 그 후 건달 세계에서 손을 씻고 새 삶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1·8항쟁의 ‘영웅’ 가운데 한 명인 김상희가 그런 경우다. 안면읍 승언리가 고향인 그는 어릴 때부터 불량기가 있었다. 중학교 때 이미 술과 담배를 배웠다. 그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배운 것도 담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가게의 담배를 훔치다 발각돼 실컷 얻어맞고 악이 받쳐 태권도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그는 ‘태백’이라는 서클을 만들었다. 나라의 등줄기인 태백산맥처럼 사회에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하자는 뜻이었지만 사실은 불량서클이었다. 기수마다 싸움 잘 하는 십수명씩으로 이뤄진 이 조직이 학교를 석권하자 반대파가 만들어졌다. 우정다방을 중심으로 모인 ‘우정회’였다. 그는 이 조직과 대판 싸움을 벌여 무기정학을 당했다.

그 뒤 그는 인천체대에 다니며 태권도 4단까지 오르는 등 뛰어난 기량을 보였으나 국가대표에는 이르지 못했다. 졸업 후 군복무를 위해 안면도로 귀향한 그는 태안읍을 근거지로 한 건달 조직에 몸담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그 동안 품어온 소박한 꿈을 실행했다. 체육관을 차려 후배를 키우는 것이었다. 안면읍에는 이미 체육관이 있었기 때문에 아래쪽 고남면으로 갔다. 그는 그 지역의 청년회장이자 실력자인 최규만(현 고남면 의용소방대장)을 관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사범으로서 체육관을 운영했다.

학생들 동원해 전경과 한판 붙고…

건달 청년들의 방문에 문승식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는 생각했다. 이기기가 매우 어려운 싸움, 그렇지만 무조건 이겨야 하는 싸움인데 건달이면 어떻고 폭력배면 어떤가. 이들은 의지가 분명했다. 그를 찾아온 것도 “지금의 투위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점에서 그와 뜻이 일치했다. 잠시 문승식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다음날 집회를 끌고 갈 전략을 짰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집회에는 벌금 5만 원 때문에 나온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런 군중으로는 안 된다. 결사대를 조직해야 한다. 전경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학생들을 동원해서 전경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 한판 붙고… 그리고 깨진다. 이것이 그날 세운 작전이었다.”

아무리 건달이지만 오히려 이런 것이 그들에게는 더 겁나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들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경과 직접 붙어보고 선두에서 자녀들이 당하는 것을 보아야만 순박한 주민들도 안이한 생각에서 벗어나 비로소 적개심과 전의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승식은 말했다.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우리 서로 믿읍시다. 당신네들은 고향을 지켜야 하고 나는 이걸 막아야 합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제4일인 11월 6일. 문승식의 예견은 적중했다. 학생들이 전과 다름없이 등교하고 있었다. 등교 대열에는 등교거부를 주도한 이장단의 자녀들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교문 앞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김상희가 동원한 서클 후배들이 미리 교문 앞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선생들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의 교문 진입을 막다가 300명쯤 모이자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김상희는 서클 회장과 3학년 반장을 앞세우고 ‘결사반대’라는 구호를 선창하며 운동장을 돌았다. 자연히 나머지도 그 뒤를 따랐고 그 후에 도착한 학생들까지 후미에 붙었다. 학생들이 모두 등교할 무렵 그는 선두를 집회장으로 이끌었다.

승언리 버스터미널 광장에는 20여 명의 건장한 학생들이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연단 앞에 도열해 있었다. 이들이 맨 앞에서 전경대와 싸울 결사대였다. 이날 집회장에는 각 학교에서 끌고나온 인원과 안면읍내, 북부의 창기리, 남부의 고남면 주민까지 6000여 명이 운집했다.

이날 집회는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지만 곳곳에 함정이 있었다. 투위 위원장은 ‘질서’를 강조하며 창기리 삼거리까지만 가두행진을 계획했고, 이 지역 국회의원인 박태권 의원(민자당)은 과기처가 말한대로 ‘서해과학연구단지’라고 주장했다. 정부와 충남도의 입장도 모호하게 전해져 주민들을 현혹시켰다.

안면도 반핵항쟁의 분수령이 된 이날 집회는 박 의원의 연설을 중단시키고 지도부의 ‘창기리 회군’을 저지한 문승식과 청년그룹의 뜻대로 진행됐다. 주민들은 연륙교에서 ‘피’를 보고 분노했으며, 최루탄 맛을 보면서 공권력 앞에 군중의 의지가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똑똑히 보았다.

제5일인 11월 7일. 안면도 핵폐기장에 대한 ‘유보설’과 ‘강행설’이 나도는 가운데 주민들은 우왕좌왕했고, 투위도 양분되는 듯했다. 전날 박 의원의 연설을 중단시킨 문승식은 일부 주민으로부터 ‘외부세력’ ‘운동권’으로 공격받아 투위 상황실에서 철수, 청년그룹이 안전한 곳으로 빼돌렸다. 그곳이 투위와는 별도로 비밀 집행부 구실을 하게 됐다.

결국 과기처 장관과 충남지사 면담을 위해 떠난 최석칠 JC회장(현 안면도발전협의회장)과 최규만 고남청년회장 등 투위 지도부의 전갈을 통해 주민들은 미몽에서 깨어나 항전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날 안면읍사무소는 주민들에 의해 접수됐고, 투위 위원장도 그 자리에 없던 최석칠 회장으로 교체됐다.

이날 비밀집행부가 안면도의 남부·북부 건달조직과 손잡고 조직한 특공대의 작전계획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모래와 휘발유를 이용해 연륙교를 폭파하고 4명의 자살조가 분신한 상태에서 다리 아래로 투신한다는 것이 그 첫째였다. 자살조는 김상희 등 스턴트맨 경력이 있는 4명으로 구성됐다. 비록 방수복이나 구명조끼로 몸을 보호한 상태에서 뛰어내리는 속임수였지만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계획이었다.

이런 특공작전은 새벽녘에 귀향한 투위 지도부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그들을 설득하다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모든 준비는 완료됐지만 승언리가 분담한 굴삭기 동원에는 끝내 실패했기 때문이다.

연륙교 폭파, 자살특공대 분신

[秘錄환경운동25년]안면도 반핵항쟁(1) 11·8대첩, 7일간의 드라마

D데이인 11월 8일. 특공작전의 핵심인 연륙교 폭파가 무산된 가운데 집회장인 승언리 버스터미널 광장에는 약 1만5000명의 주민이 모여들었다. 당시 안면도 인구가 약 1만7000명인 것을 감안하면 주민 전원이 나온 셈이다. 약국·주유소·병원·LPG가게 등 4개 업종 외에는 모든 상가가 문을 닫았다.

이날 벌어진 상황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핵폭발’이었다. 연륙교 차단 시기를 놓친 특공대원들은 읍내 한전지사 앞 좁은 길목에 휘발유를 담은 드럼통, LPG가스통, 폐타이어 등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쳤다. 또 대형 배수관 여러 개를 언덕 위에 설치, 여차하면 버팀목을 빼 아래로 굴릴 수 있게 했다. 이 바리케이드 앞에서 특공대원 300여 명과 연륙교를 통과한 전경 8개 중대가 대치한 때가 11시 30분쯤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 직후였다. 안면지서로 막 부임한 지서장 차량이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고 집회 동향을 감시하던 태안군 공보실장, 서산경찰서 정보과 형사 등 공무원 8명이 발각돼 특공대에 ‘체포’된 것이다. 특공대는 이들을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긴 뒤 휘발유를 뿌린 바리케이드의 드럼통 위에 굴비처럼 묶어 일렬로 세워놓았다.

경찰은 지서장의 차가 불타는 광경을 눈 뜨고 지켜보았다. 이런 상황에 격앙된 주민을 자극했다가는 그야말로 큰일이 날 판이었다. 이렇게 안전(?)을 확보한 군중들은 안면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여를 앞세우고 조계산 공사장까지 행진, 현장사무실과 장비를 불태우고 집회장으로 돌아오는 등 예정된 시위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경찰의 진압 작전은 병원으로 옮긴 바리케이드 위의 공무원들이 헬기를 이용해 섬 밖으로 빠져나간 직후인 오후 5시 55분께 시작됐다. 다연발탄이 발사되면서 바리케이드는 화염에 휩싸였고 5분 만에 저지선이 무너졌다. 경찰 진입 후 안면읍내는 전쟁터가 돼 버렸다. 군중은 전경대와 곳곳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경찰이 퇴각한 것은 오후 7시 50분경. ‘전투’는 계속됐지만 암흑 속에서는 지형지물에 밝은 시위대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예비군 중대본부 무기고가 있는 안면지서에 화염이 치솟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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