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추련(1) 영광 핵발전소 ‘가짜 학생’ 농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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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패배’ 후 움튼 환경운동권 통합 움직임… 공민협·공청협 대중성 확보 ‘동감’

전남 영광군 흥농읍 계마리에 위치한 영광 핵발전소 1·2호기. 1988년 여름 공민협·공청협이 이 부근에서 합동 반핵농활을 했다.

전남 영광군 흥농읍 계마리에 위치한 영광 핵발전소 1·2호기. 1988년 여름 공민협·공청협이 이 부근에서 합동 반핵농활을 했다.

서울올림픽을 코앞에 둔 1988년 7월 27일 밤 전남 영광군 홍농읍 불암사 경내의 한 암자에는 밤이 이슥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섬돌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신발 수효를 세어보면 20명이 족히 넘는 인원이 안에 있는 듯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간간이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보아 젊은이들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다. 무슨 대화인지 얼른 파악이 되지 않지만 야밤에 이런 외딴 곳에 모여서 하는 얘기라면 ‘음모’일 개연성이 다분했다. 절에 와서 가톨릭 의식을 얘기하는 것도 이상했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환한 불빛이 밖으로 쏟아지면서 안에 있는 몇몇 사람의 얼굴이 노출됐다. 곧 문이 닫히면서 사위는 다시 어둠에 묻혔지만 낯익은 한 사람의 잔영이 보였다. 반공해운동가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이었다.

반공해운동권의 불암사 회동

그렇다면 이 모임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이하 공청협)와 관련된 모임일 것이다. 이 즈음 안병옥은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에 사표를 내고 공청협에 복귀해 있었다. 하지만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승리한 뒤 공청협은 이렇다 할 만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선 패배’의 충격이 큰 데다 운동권 전체가 사분오열된 탓이다. 이런 상황에 안병옥을 비롯한 반공해운동권 청년 수십 명이 비밀리에 한 자리에 모였다면 뭔가 특별한 일이 있어서일 것이다.

검은 그림자가 디딤돌 위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소피를 보고 들어가면서 경계하듯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창호지로 스며나온 불빛이 잠깐 그의 얼굴을 비췄다. 얼굴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유수훈(현 노래나무 기획실장)이었다.

지금은 가수 백창우의 매니저로 더 유명한 유수훈은 반공해운동권에서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다. 재치가 풍부하고 임기응변에 능한 것은 특별한 재능에 속한다. 그는 이런 재능을 타고났다. 환경운동권의 명사회자로는 흔히 그와 김혜정(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이 손꼽힌다. ‘김혜정은 1부 사회, 유수훈은 2부 사회’라는 말이 있다. 즉 집회 사회는 김혜정, ‘노는 사회’는 유수훈이 잘 봤다는 얘기다.

공청협 회장 이덕희와 영광 반핵농활대장 김근배, 공민협 소속 유수훈(왼쪽부터).

공청협 회장 이덕희와 영광 반핵농활대장 김근배, 공민협 소속 유수훈(왼쪽부터).

그는 반공해운동권의 결혼식 피로연의 단골 사회자이기도 했다. 어떤 동료 운동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였다. 당시 피로연 때 유행한 것 중에 ‘전화번호 게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신부의 몸에 숫자들을 붙여놓고 신랑이 신혼여행지에서 집으로 전화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이걸 하려는데 느닷없이 신부측 우인이 일어나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성을 상품화하는 데 반대합니다.”

유쾌하던 피로연장이 갑자기 썰렁해졌다. 이럴 때 사회자는 난감하다. 신랑 우인 측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일이 점점 꼬여서 피로연을 망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문제를 제기한 신부측 우인을 향해 말했다.
“그럼 남성을 상품화하면 되겠네요.”

유수훈의 특별한 점은 또 있다. 반공해운동가가 된 경로다. 그는 연세대 신학과 83학번이다. 즉 이공계생들이 과학기술운동의 한 방편으로 반공해운동을 택한 것과는 전혀 다른 동기로 ‘환경’과 인연을 맺었다. 신학과를 지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어릴 적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중·고교 시절부터 교회의 중등부·고등부 회장을 지냈고, 대학에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모임을 가지는 등 착실하게 목회자의 길을 닦아나갔다.

그의 인생의 방향타를 돌린 인연은 얄궂게도 바로 그 안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만났던 한 살 연상의 방선민(현 구몬학습지 교사)과 깊이 사귀는 사이였는데, 1986년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이하 공민협)가 창립되면서 그녀가 교육간사로 그곳에 상근하게 된 것이다. 주부·여성이 중심인 단체에는 남자가 할 일이 많게 마련이다. 그는 교회 모임 동료인 백성범(현 필리핀 거주, 목사)과 함께 공민협의 남성 자원봉사 회원이 됐다.

졸업할 무렵 그는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가 보기에는 주변에 목사를 할 사람은 많고 반공해운동을 할 사람은 드물었다. 이럴 때 선택의 기준은 두 가지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가 택한 것은 후자였다.

이런 그가 불암사 비밀회합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병옥은 공청협, 그는 공민협 소속이다. 즉 공청협과 공민협이 공동으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얘기다. 그가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그것은 사실로 드러난다. 안병옥·김근배(현 전북대 교수)·최예용(현 시민환경연구소 기획실장) 등 공청협과 유수훈·방선민·손미경(현 서울환경운동연합 여성위원) 등 공민협 멤버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공청협·공민협이 합동으로 전남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죽동마을을 찾아 1988년 7월 27일부터 8박9일 동안 실시한 ‘반핵농활’은 한국 환경운동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할 만하다. 이 활동이 대중환경운동의 본격적인 시작과 더불어 반핵(反核)을 운동의 중심에 두게 되는 선언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죽동마을은 영광핵발전소 1·2호기 인근 마을이다.

이 시기의 환경운동은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대선 패배’의 충격이 컸고, 그 과정에 운동권이 지리멸렬한 점이었다. 변화에 적응하기는커녕 조직을 추스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사회주의권 몰락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환경운동이라고 해서 별다른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선거 후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에게 가 있었다. 거기서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통일운동가가 되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딱하고 고통스러웠다.

팔자에 없는 통일운동가 시늉

“통일문제연구소에 있으면 글도 써야 했다. 그럴 때마다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고…. 체질에도 안 맞고, 할 수도 없었다. 도저히 안 돼 백 선생한테 얘기했더니 ‘연구소 안에 공해분과를 만들어 활동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것도 안 되는 일이었다. 6개월 정도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최열의 최근 회고다. 그는 다시 환경운동으로 복귀할 길을 모색했다. 그는 공문연 연구실장직은 떠났지만 정문화(1998년 작고, ‘함께 사는 길’ 편집장 역임)와 함께 이사로 위촉돼 있었다. 공민협에는 처음부터 이사로 관계하고 있었다. 공청협과는 조직적 관련은 없지만 함께 활동한 인연이 두터웠다. 그는 생각했다. 양김이 분열돼 정권이 넘어가고 운동권도 쪼개졌다. 그 상처가 크고 갈등의 골마저 깊은데 환경운동만이라도 통합해보자….

환경운동단체의 대통합이라면 당시 ‘빅4’로 불리던 공문연·공청협·공민협·공해연구회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단체의 통합은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점이 있다. 특히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조직은 나름의 특성과 역사, 인지도 등을 축적하고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것들이 통합을 저해하는 크고 작은 기득권이 될 수 있다.

먼저 공문연과의 통합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공문연은 1988년 5월 20일 이후 6개월 동안 이사회를 갖지 못했다. 통합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돼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이 출범한 시기와 일치한다. 긴 공백기간 뒤 11월 24일 열린 공문연 이사회 회의록에는 공추련 출범 과정에서 공문연과 최열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엿보인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최열은 “연구소와 얘기가 있었으나 반응이 없었다”며 공문연이 통합에 적극적이지 않은 점을 아쉬워했다. 반면 최완택 공문연 이사장(현 민들레교회 목사)은 “연구소의 책임질 만한 사람과 상의 한 번 없었다”며 그 책임을 최열에게 돌렸다. 안병옥이 6월에 사직하고 공문연 이사 중 일부가 공추련 지도위원으로 참여한 것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공추련 출범 후 공문연은 큰 변화를 겪는다. 1989년 4월 한국반핵반공해평화연구소로 이름이 바뀌고 가톨릭 쪽 인사들이 철수하면서 개신교 조직이 된다. 이 조직은 1992년 1월 한국교회환경연구소로 다시 문패를 바꿔달았다가 1997년 5월 기독교환경운동연대로 확대개편, ‘창조보전’을 기치로 내건 교회환경운동 영역의 중심 조직이 된다.

1988년 9월 10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열린 공해추방운동연합 창립대회. ‘공해추방’ 과 함께 ‘반핵평화’ 를 기치로 내걸었다.

1988년 9월 10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열린 공해추방운동연합 창립대회. ‘공해추방’ 과 함께 ‘반핵평화’ 를 기치로 내걸었다.

조중래(현 명지대 교통공학과 교수)·안병덕(현 에코생협 이사장)·조홍섭(현 한겨레신문 환경전문기자) 등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시니어 그룹인 공해연구회도 통합에 소극적이었다. 이들의 통합 거부 명분은 운동을 뒷받침해줄 전문가 그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공해연구회는 김정욱(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김상종(현 서울대 생명공학부 교수) 등 전문가 그룹을 조직해 1989년 환경과공해연구회로 확대개편된다.

이 두 단체에 비해 오히려 더 어려울 것 같은 공청협과 공민협의 통합이 가능했던 것은 미스터리다. 이들은 앞의 두 단체와는 다소 무게가 떨어지는 아마추어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통합을 가능케 한 결정적 요소라고도 볼 수도 있지만 그리 호락호락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줌마와 청년들의 ‘합방’ 결의

공청협과 공민협은 구성원의 면면과 지향점, 코드가 다 달랐다. 공청협은 학생운동가, 공민협은 주부 중심으로 구성돼 있었다. 공청협은 투쟁, 공민협은 작은 실천을 지향했다. 쓰는 용어부터 논의하고 행동하는 방식, 라이프사이클이 서로 달랐다. 특히 주부들 입장에서는 청년들과 결합하는 것이 두려웠다. 공민협 상근 교육부장이었던 이상영(현 친환경상품진흥원장)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합치면 남자들에게 주도권 뺏기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분명히 남녀, 기·미혼, 세대 간의 문화 차이가 있었고, 그 때문에 실제로 합친 뒤에 어려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회장인 서진옥 선생이 통합에 적극적이었고, 과감히 발전적으로 힘을 합하는 것이 좋겠다는 쪽이 대세였다. 다들 걱정은 했지만 확실한 반대는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걱정스럽지만 통합을 반대할 수 없었던 까닭 가운데 하나는 조직적 한계였다. 공민협은 주민들의 고발을 접수하는 ‘공해전화’를 개설했다. 이런 활동은 취지는 좋지만 무모한 측면이 있다. 전화가 걸려오면 현장조사를 하고 대책을 수립하고 경우에 따라 싸움까지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길래씨 사건 등 많은 고발이 공민협의 공해전화를 통해 접수됐다. 주부 중심의 조직으로는 이런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 즉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인 셈이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이런 사건이 터지면 공청협과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난다는 것이었다. 당시 반공해운동의 바닥은 빤했다. 싸움은 청년들이 잘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같이 일할 기회가 많아지면 서로 도움을 주게 되고, 협력·연대의 효과를 절감하고, 그 과정에서 신뢰도 싹튼다. 이 점에서는 공민협뿐 아니라 공청협도 마찬가지였다. 안병옥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양쪽의 젊은 사람들끼리 가까워진 계기가 공문연이 중심이 돼 매년 여는 환경의 날 행사였다. 그때 노래극을 했다. 공청협·공민협 청년 활동가들이 출연했는데 공민협 쪽이 노래를 잘 하고 연극 연출 경험도 있었다. 같이 연습하면서 친해졌다. 공청협은 의식화된 청년조직이고 공민협은 교회 출신들이었는데 같이 부대끼면서 유대의식이 생겼다.”

두 단체의 청년 그룹은 통합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우선 1987년 대선 후 운동권이 지리멸렬한 데 대한 자괴감이 통합의 대의명분을 자극했다. 일의 효율성 등 실리적 요인도 작용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에 시달리는데 비슷한 활동을 하는 두 단체가 사무실을 따로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위기 맞은 농활대의 위장전술

최상층부에서 통합 작업을 벌였던 최열은 또 다른 논리로 접근했다. 공문연 시절과 같은 전도사적 운동에서 한 단계 끌어올려 대중운동을 벌일 때가 됐다는 판단이었다. 6월항쟁으로 성립된 체제 변화와 함께 운동의 패러다임도 바뀌고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공해운동도 이제는 대중운동으로 가야 한다고 양쪽을 설득했다. 대중성을 담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동력인데 공민협은 주부 중심 조직이라 움직이는 템포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년 조직과 합해야 한다고 했다. 그 다음은 조직의 규모였는데 나는 처음부터 키우자고 했고 여성 쪽은 차근차근 해나가는 게 좋다는 의견이었다.”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는 주부 조직의 강점도 있었다. 환경운동은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성적 시각과 방식으로 접근해야 광범위한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의식화된 청년 조직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부드러운 것은 강하게, 강한 것은 부드럽게 양쪽을 잘 조화시키는 구조가 필요했다.

영광 핵발전소 주민의 상경시위. 공추련의 운동의 중심 주제가 반핵이었다.

영광 핵발전소 주민의 상경시위. 공추련의 운동의 중심 주제가 반핵이었다.

공민협·공청협의 영광 반핵농활은 이런 논의들의 결실이었다. 통합의 공감대를 이룬 기념 MT의 성격이었다. 장소를 영광으로 택한 것은 MT의 취지도 살리면서 운동의 일환으로 반핵활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1988년 7월 27일 밤의 불암사 회합은 이 반핵농활에 대비한 사전 세미나 성격의 모임이었다.

농활을 하면서 사전에 따로 세미나를 한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핵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반핵활동이라면 관은 물론 마을 주민들로부터도 거부당할 게 뻔했다. 따라서 조직 자체를 위장해야 했다.

반핵농활 참가자는 ‘성분’이 다양했다. 농활 경험이 있는 운동권 출신부터 그런 개념 자체를 잘 모르는 주부도 있었다. 활동대장은 농활 경험이 많은 김근배가 맡았다. 주부 참가자 중에는 태어나서 처음 ‘외박’을 한다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철저하게 농사를 돕고 밤에 주민들을 대상으로 반핵 설득작업을 벌인다는 계획을 갖고 갔다. 이를 위해서는 대원들에게 생활수칙을 확실히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테면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밥은 직접 해먹고, 담배는 농촌 수준에 맞춰 청자(당시 최고급 담배는 솔이었다)를 피고….

조직 위장의 기본은 농활대원들을 모두 학생 신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학생회라고 하면 제일 좋겠지만 담배를 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는 탄로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가톨릭학생회였다.

거짓된 행위는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떤 돌발상황이 발생할지도 알 수 없다. 그럴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임기응변이다. 불암사에서 1박2일에 걸쳐 사전 준비를 한 뒤 농활에 임했을 때였다. 우려하던 돌발상황은 이덕희(현 영화과학 대표이사)가 나타났을 때 일어났다.

공청협 회장으로서 최연장자(77학번)인 그는 후배들만 농활을 보낸 것이 켕겨 회사에 휴가를 받아 뒤늦게 현장으로 날아왔다. 그동안 농활대의 위장전술은 몇 차례 위기를 맞았다. 경찰이 찾아와 꼬치꼬치 물을 때는 무조건 우겨서 간신히 돌려보내기도 했다. 가뜩이나 주민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차에 그가 나타나자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저 학생은 왜 저렇게 늙었는가?”

자칫 쫓겨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이었다. 그때 유수훈이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그 아주머니에게 속삭였다.
“쉿, 아주머니. 어릴 때 장티푸스를 앓아 저렇게 머리가 벗어졌거든요.”

영광 반핵농활 후일담 중에 단연 하이라이트로 회자되는 에피소드다. 농활대는 이렇게 살얼음판을 딛듯이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반핵활동을 벌였다. 이덕희의 최근 회고에 따르면….

“일을 많이 해줘야만 그 사람들과 대화가 된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 신뢰를 얻은 뒤 반핵 슬라이드를 틀었다. 그때 핵발전소 돔의 벽인지 다른 곳인지 아주 큰 벽에 환등기를 비춰 주민들에게 보여준 기억이 난다.”

공민협·공청협의 영광 반핵농활은 이렇게 무사히 마무리됐다. 가슴을 좼던 만큼 양쪽의 유대가 공고해졌으니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88년 9월 10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공해추방 반핵평화’의 깃발을 건 공추련의 출범과 함께 환경운동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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