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광주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유성문의로드포엠]오월 광주

무등을 오르며

내가 장불재를 넘지 못하는 것은
그 긴 능선 때문이 아니다
마음의 빚 때문이다
살아 왔으되, 살아 있지 못한 행자를 보고
산은 어둑사니 돌아눕는다
그래도 내가 무등을 등지지 못하는 것은
그 깊은 그늘 때문이 아니다
남은 세상의 슬픔 때문이다
빛이라곤 오로지 꽃빛뿐이고
가시에 채인 상처조차 그렇게
안으로만 고여드나니
-무등산 서석대

* 무등산을 오르면서 나는 자꾸만 누군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헐떡이는 숨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듯도 했다. 겨우 입석대 쯤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문득 한 아낙이 산을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대구에서 왔다고 했다. 산기슭을 거닐다가 산이 너무 좋아 아무 생각 없이 산정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했다. 불현듯 그 TK 여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끝내 속으로 삼키고야 말았다. 잠시 땀을 식힌 여인은 다시 산길을 오르고, 멀리 장불재의 등성이로 고단한 그림자 하나가 홀로 산을 넘고 있었다.

[유성문의로드포엠]오월 광주

사실 오월이면 어김없이 광주를 찾는 것처럼 몰염치한 짓은 없다. 그리고 세월은 이미 사반세기를 넘겨 그날의 기억조차 희미할 뿐이다. 그때 총상을 입은 어미의 뱃속에 있던 아이는 어느덧 예비역이 되었다. 삶과 죽음은 순환하는 것이고, 기억마저 껍데기만 남고 모두 사라지는 것이니 무등을 오르는 이의 마음은 그저 어둑할 따름이다.

산정에 서서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한 빛고을이다. 빛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따라 덧없이 떠돌아다니고, 그 빛마저 지고 나면 금남로로 충장로로 또 다른 빛이 흥성거리며 불야성을 이룰 터였다. 도시는 아직 납작하게 엎드려 숨죽여야 했으나, 어쩐 일인지 너무도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정말 그날은 끝이 난 것이고, 치욕조차 영광으로 바뀌어버린 것일까.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 낯선 건물들이 수상하게 들어섰고 /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 아직도 남아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 부끄럽지 않은가 / 부끄럽지 않은가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산을 내려서니 땅은 담양 땅인데, 이곳 역시 ‘지옥 속의 낙원’일 뿐이다. 노회한 송강의 마을에는 고래등 같은 한국가사문학관이 들어섰다. 이곳을 기점으로 소쇄원이니 식영정이니 명옥헌이니, 현실로부터 패퇴한 자들은 아직도 ‘사미인곡’에 ‘속미인곡’까지 불러대며 은둔 속에서 끊임없이 노출을 꿈꾼다. 하여 수북의 서늘한 대숲에 이르기도 전에, 힘을 잃은 나의 다리는 마침내 망월동으로 꺾이어든다.
거기 잊혀진 역사는 이제 신화로만 남아 있다. 번듯한 조형물들 덕에 뒤안의 구묘역은 더욱 어둑해 보인다. 눈물의 소녀들이 남기고 간 종이학은 바랠대로 바래고, 항쟁의 기록들은 비에 젖어 눅진하다. 아직 죽음은 끝나지 않았는가. 패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날은 어둡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On road

호남고속도로 서광주IC - 금남로/충장로 - 증심사 - 충장사 - 무등산|입석대·서석대 - 한국가사문학관 - 소쇄원 - 식영정 - 광주호 - 명옥헌 - 망월동|5·18국립묘지

유성문의로드포엠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