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자궁이 바로 환경이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생활환경운동 싹 틔운 ‘공민협’ 여성활동가들… ‘가정주부’에서 ‘사회주부’로 대변신

1989년 공추련 여성위원회가 주축이 돼서 벌인 반핵평화여성대회.

1989년 공추련 여성위원회가 주축이 돼서 벌인 반핵평화여성대회.

“실례지만 어느 나라에서 왔습니까?”
“한국에서 왔는데요.”
“나는 인도네시아 사람입니다. 당신네 나라가 우리나라 나무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잘라가는 나라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글쎄, 저….”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은 갑자기 할말을 잊었다. 1988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지역환경회의 때의 일이다. 말을 더듬고 있는 그에게 인도네시아 대표는 젓가락 한 벌을 내밀었다.
“이걸 사십시오. 당신이 이 젓가락을 쓰는 만큼 우리 나무가 덜 베어집니다.”
“아, 예, 예….”

물건을 사면서 되레 미안한 마음을 가져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구나…. 그는 인도네시아 환경운동가의 고약하지만 기발한 상술에 혀를 찼다.

‘작은 실천’이 가져온 엄청난 변화

최열이 울며 겨자 먹기로 산 인도네시아산(産) 젓가락 한 벌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지나온 환경운동사가 잘 말해준다. 그는 그것을 늘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쓰는 식당의 주인과 종업원, 그와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회용품 안 쓰기, 장바구니 가지고 다니기, 인스턴트 식품 안 먹기 등과 같은 생활환경운동이 크게 확산된 것은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시절이다. 이를 주도한 세력이 공추련 여성위원회라는 게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공추련 창립이 1988년 9월이니까 공교롭게도 최열이 젓가락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2005년 최열은 쓰지 신이치 교수(메이지가쿠잉대)를 만났다. ‘슬로 라이프’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답게 그는 떡하니 목에 젓가락을 걸고 있었다. 이를 본 최열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10평 이상 식당에서 일회용 나무젓가락 사용을 규제한 1994년 이후 더 이상 가방에 젓가락을 갖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열은 17년 전 인도네시아 환경운동가한테 당한 일격을 쓰지 교수에게 점잖게 돌려주었다.

“일본은 운동을 통해 일회용 젓가락을 안 쓰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이 갖고 다니는 것입니다.”
생활환경운동은 ‘작은 실천’에서 비롯되지만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 제2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중국이 한 해 사용하는 나무젓가락은 450억 벌이다. 여기에 드는 나무가 2500만 그루이고, 이것이 중국의 사막화를 가속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인재의 산실 ‘주부환경배움마당’

환경운동사에서 생활환경운동은 주로 여성의 몫이었다. 생활환경운동이 중요한 만큼 여기에 기반한 여성환경운동이 환경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클 수밖에 없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 시절 최열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공단·대도시의 공해문제만이 아니라 합성세제, 잔류농약, 식품 첨가물 등 생활 주변이나 건강과 관련한 영역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공해 전사(戰士)’로서 이미지가 강한 최열의 이런 ‘여성적’ 면모는 뜻밖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식성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조미료나 가공식품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를 뺨치는 수준이다. 대학 졸업논문을 ‘식품 첨가물’에 대해서 쓰려고 했고, 운동 일선에서 물러나면 ‘환경운동연합 대간사(大幹事)’로서 생활·식품 분야를 담당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가 공들여 한 일 중에 하나가 주부를 대상으로 한 공해교육이었다. ‘주부환경배움마당’은 청년·학생·직장인을 위한 강좌와는 다른 측면에서 환경운동 전반에 큰 토대를 제공했다. 여성환경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많은 열성적 여성활동가를 배출하는 산실이 됐기 때문이다.

에코페미놀러지의 거목으로 불리는 문순홍 박사(2005년 작고, 전 대화문화아카데미 ‘바람과 물 연구소’ 소장)는 여성환경운동의 전개 과정을 세 시기로 나눈 바 있다. 전사기(1964~86년)와 등장·형성기(1986~95년), 확대재생산 및 질적 전환의 모색기(1995년 이후)이다(문순홍, 생태여성론으로 분석한 한국 여성환경운동, 2002년). 본격적인 여성환경운동의 시작을 1986년으로 잡은 것은 그해에 주부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조직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여성환경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이하 공민협)가 발족한 날은 1986년 9월 13일이다. 크리스챤아카데미(대화문화아카데미의 전신) 출신으로서 공문연 주부환경배움마당에 참여했던 서진옥(미국 거주)이 창립을 주도했다.

공추련 주부활동ㅇ가 신년인사. 앞에 앉은 이가 최열 공동의장, 뒤에 서 있는 이가 서진옥 공동의장이다.

공추련 주부활동ㅇ가 신년인사. 앞에 앉은 이가 최열 공동의장, 뒤에 서 있는 이가 서진옥 공동의장이다.

서진옥은 뒷날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공동의장을 맡았다가 1991년 목사인 남편을 따라 캐나다로 가는 바람에 국내 활동을 접게 된다. 캐나다에서는 그린피스 활동을 했고 2000년 미국으로 무대를 옮겨서는 국제결혼한 한국 여성의 쉼터인 ‘무지개의 집’ 사무총장·대표로 일했다. 지난해 국내에서 열린 세계국제결혼여성대회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공민협 탄생 뒤에는 최열이 숨어 있다. 그는 외부 강연을 자주 했다. 자연히 크리스챤아카데미 주부교육프로그램에도 출강, 생활환경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공문연 창립의 주역인 서진옥과 이상영(현 친환경상품진흥원 원장)이 그의 강의를 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이상영은 환경문제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화여대 79학번인 그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주부로서 크리스챤아카데미에 볼런티어(자원봉사자)를 하고 있었다. 그는 “노동운동이 중요한 시절이었고 공해 이야기를 하면 중산층 운동으로 치부했는데 최열 선생의 강의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최근 회고했다.

이상영이 사회의식 눈뜬 계기는 특이하다. 대전 교육자 집안 출신인 그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만나서 사귄 남편이 인생을 바꿔놓았다. 서울대 치대 4학년 자퇴 중이던 운동권 청년 백욱인(현 서울산업대 교수)이 추천한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생각을 달리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문사회계열로 입학할 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국문학과가 아니라 사회학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다고 그가 학내 운동권의 주류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이화여대는 뛰어나고 선택받은 여성들만의 공간이었다. 지방 출신으로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었다. 그러던 참에 1980년 5월 광주사태가 터졌다. 문화적 충격에다 역사적 충격까지 겹쳐 심리상태가 복잡해진 그는 1년 6개월의 장기휴학에 들어갔다. 다음은 그의 당시 상황 설명이다.
“재수한 것까지 합치면 또래들보다 2년 반 늦게 사회에 나온 셈이었다. 노동·농민운동은 꿈도 못 꾸고 교육운동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사회 선생 자리가 하나 났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결혼했다. 그러던 중에 서진옥 선생한테서 연락이 왔다. 둘 다 교육운동에 관심이 있어 교육운동단체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는데 최열 선생 때문에….”

크리스챤아카데미 강연에 영향을 받은 서진옥·이상영 등은 공해운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들이 공문연 주부환경배움마당에 참여한 것은 공해운동단체를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최열은 주부 환경운동단체 태동을 적극 지원했다.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그의 솜씨는 공민협 이사진 구성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이사장=임재경(경제평론가,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사=김경희(기장 여신도회 총무) 김상철(변호사) 박성자(잠실중앙교회 목사) 서진옥(공민협 회장) 서한태(목포 서방사선과 원장) 엄영애(수원 가톨릭여성연합회 총무) 오재길(정농회 회장) 원금순(원금순산부인과 원장) 이수인(영남대 교수) 리영희(한양대 교수) 이오덕(아동문학평론가) 이종헌(성장상담연구소장) 임진택(연출가) 최광(한국외대 교수) 최병모(변호사) 최열(공문연 연구실장) 최재현(서강대 교수)

공민협 탄생의 또 한 사람의 숨은 주역은 한명숙(현 국무총리)이다. 서진옥의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선배로서 공문협의 창립과 활동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뒷날 환경운동연합 출범 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고 참여정부 들어 환경부 장관에 오르는 등 환경과의 깊은 인연은 이때 맺어진 셈이다.

서진옥 회장 체제의 공민협은 3명의 상근자로 출발했다. 이상영이 교육부장으로서 주부교육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동시에 총무 역할을 하고, 윤지선(현 성남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이 홍보간사, 방선민(현 구몬학습지 교사)이 청년교육 프로그램 담당 간사로 일했다.

윤지선 역시 크리스챤아카데미를 통해 서진옥과 인연이 맺어져 환경운동을 시작한 경우다. 서울여대 영문학과 81학번인 그는 졸업 후 출판사에 근무했는데 사회적으로 격한 당시 운동의 흐름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실천적 과제를 모색하던 중에 ‘환경’을 알게 됐다. 공민협에서 그가 주로 한 일은 기관지 ‘생존과 평화’ 발간이었다.

방선민은 ‘숙명여대 환경인맥’이다. 77학번 최영남(현 기독교 전도활동)·황순원(현 캐나다 유학, 전 환경과 공해연구회 부회장), 81학번 이성실(현 자연그림책 작가)·이수경(현 환경과공해연구회 사무처장)에 이어 83학번 방선민·손미경(현 서울환경운동연합 여성위원)이 단짝친구로서 함께 환경운동에 투신한 것은 우연이다. 최영남·황순원은 공해연구회, 이성실·이수경은 반공해운동협의회(이하 반공협), 방선민·손미경은 공민협을 통해 각각 환경운동에 입문했는데, 친구를 따라간 쪽이 환경운동권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 또한 우연 치고는 희한한 공통점이다.

여성의 ‘자연·평화’ 이미지로 활동

공민협의 환경운동사적 의의는 무엇보다 여성환경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여성, 그중에서도 주부가 주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문명, 여성은 자연을 상징한다. 남성은 전쟁, 여성은 평화의 이미지와도 통한다. 특히 주부는 어머니이기도 하다. 뒷날 환경운동연합 여성위원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하라다 박사(전 구마토대 의학부 교수)가 “어머니의 자궁은 바로 환경이다”고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만큼 공민협의 운동 방식은 ‘남성적’ 환경운동과는 달라야 했다. 운동의 지향점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단체의 이름이다.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라는 긴 이름이 나온 데도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이상영에 따르면 작명 과정에서 적잖은 논란도 조직의 이름에 들어갈 만한 개념으로는 공해운동·시민운동·주민운동·여성운동 등이 있었다. 토론 끝에 사후 수습의 뜻이 담긴 ‘반공해’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공해를 반대한다는 예방적 의미의 ‘공해반대’를 채택했다. 또 여성·주민 등과 같은 제한적 용어보다 광범위한 참여를 지향하기 위해 ‘시민운동’을 표방하기로 했다. 이렇게 긴 이름을 쓰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이상영 기억을 더듬으면….

“교육생 모집을 전화로 주로 했다.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라고 하면 이름이 기니까 ‘뭐라고요?’ 하고 되묻고 다시 얘기하면 또 묻고… 그 당시에 주부 취미생활이 유행했는데 전화로 공해 어쩌구 저쩌구 하니까 어떤 주부가 ‘공예요? 나 그런 거 취미 없어요’라고 했다. 그렇다고 공민협이라고 하면 더 못 알아들으니까….”

공민협의 핵심사업 중의 하나가 주부 공해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여기 참여하는 주부들은 ‘가정주부’가 아니라 ‘사회주부’로 다시 태어났다. 집에서 내 아이만 키우던 주부에서 사회의 모든 아이를 키우는 주부가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내 아이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아이가 행복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그러자면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논리였다.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환경문제를 보면 접근 방식과 투쟁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어머니들 사이에는 공감대가 있다. ‘투쟁할 때 부드럽게 하자. 나쁜 것만 보여줘서도 안 된다. 빨간 띠를 매면 안 된다. 전투경찰이 있으면 우리가 앞장서자. 어머니의 마음으로 다가가면 전경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뒷날 영광핵발전소 지역의 무뇌아 출산, 골프장 캐디들의 기형아 출산, 낙동강 페놀오염 사고 후 임산부들의 낙태 시도 등이 보여주듯이 환경문제는 여성에게 더욱 치명적이기도 하다. 여성환경운동이 섬세한 면 못지않게 극렬한 모습을 띨 수 있는 소지도 다분하다는 얘기다. 공민협 주부교육생으로서 환경운동에 입문한 구희숙(현 서울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의 말을 들어보면….

공민협 출신 여성환경운동가들. 구희숙·문선경·문수정·손미경.

공민협 출신 여성환경운동가들. 구희숙·문선경·문수정·손미경.

“운동 속에 남아 있기 어려운 게 주부들이지만 남은 사람은 그야말로 헌신했다.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을 다 갖다 써가면서 활동하는 게 보통이었다. 돈, 시간, 그릇, 아이, 심지어 남편까지 갖고 왔다. ‘지구의 날’ 행사에서 빚지면 거기서 남은 오징어 다 들고 가서 팔고… 주부들이란 이런 것이다.”

독일 간호사 출신인 구희숙은 1984년 크리스챤 주부아카데미 교육을 받으면서 사회운동에 눈뜬 경우다. 공민협에는 신문을 보고 제발로 찾아갔다. 환경문제를 중요시하는 독일의 영향을 받은 그는 공추련 시절에는 초대 여성위원장을 맡아 장바구니 가지고 다니기, 합성세제 안 쓰기, 폐식용유로 비누 만들기 등 생활환경운동을 주도했다.

공민협 주부교육생 중에 맹렬한 활동을 펼친 이로는 문수정(현 서울환경운동연합 여성위원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공추련 시절인 1991년 ‘환경후보’로 지방선거에 출마·당선돼 7년 동안 서울 구로구의원을 지냈다. 구로지역은 공장공해가 극심한 곳으로서, 여성환경운동의 양축 가운데 하나인 ‘지역 여성환경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에 해당했다. 구의원 시절 그는 구로·광명 쓰레기소각장 유치 반대와 안양천 주변 자연학습장 설치 등에 앞장섰다.

문선경(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도 신문을 보고 자발적으로 공민협을 찾은 여성활동가다. 공추련 시절에는 여성위원으로서 핵발전소 연극 시나리오를 썼고, 환경운동연합 때는 상임집행위원으로서 ‘모피옷 안 입기 운동’을 주도했다.

공민협 청년교육생 출신 여성활동가로는 손미경과 남미경(현 성남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 등이 있다. 손미경은 방선민의 숙대 사학과 동기로서 ‘친구 따라’ 1기 청년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환경운동가가 된 케이스다. 공추련 시절에는 조직국 간사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환경운동연합 때는 구희숙·문수정 등과 여성위원회 재건에 앞장섰다. 남미경은 공민협과 같은 건물에 입주한 ‘여성의 전화’에서 일하다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상근 활동가로 합류한 케이스다.

통합이냐 독자생존이냐 기로에

공민협이 주부 중심이라는 말은 100%가 주부 또는 여성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색 회원으로서 공민협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청일점’ 같은 존재가 유수훈(현 노래나무 기획실장)이다. 연세대 신학과 83학번인 그는 서진옥의 남편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 나간 것이 인연이 되어 공민협의 남성 활동가가 됐다. 창립 당시에는 학교에 재학 중이라 자원봉사 형태로 나갔지만 상근자에 버금가는 일을 했다. 뒷날 결혼도 방선민과 하게 된다.

주부·청년교육 외에 공민협이 한 일로는 ‘공해신고전화’가 있다. 환경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상봉동 박길래씨 사건과 구로지역 반공해투쟁 등이 공민협을 통해 이슈화된 운동이다. 윤지선의 최근 회고에 따르면….

“두 가지 사건은 기억이 난다. 상봉동 주민의 전화를 받고 우리가 조사해서 박길래씨 사건이 알려지게 됐다. 구로동에 공해가 심하다는 신고는 구로동성당에서 했다. 두 가지 사건이 공민협이 운영한 공해전화에서 비롯됐다.”

큰 사건을 만나면 일이 많아지고 주부가 중심이 된 조직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국면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공민협은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다. 공해추방청년운동협의회(이하 공청협)과 통합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어렵게 싹튼 여성환경운동이 남성운동에 흡수될 것인지, 한 차원 더 발전하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秘錄환경운동25년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