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일깨운 사람들

그들은 환경에 인생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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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공동운명체” 구호 아래 큰 물결 이룬 선각자들

우리의 몸인 지구가 위협받고 있다고 인식하게 된 데에는 맨 처음 환경운동가들의 노력이 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두 산업개발에만 몰두해 있을 때 그들은 선각자다운 통찰로 자연과 인간이 한 몸이라는 인식을 갖고 환경운동에 뛰어 들었다.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각 지역에서 동물을 사랑하고 나무를 심고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작은 불꽃이 나중에는 세계인의 공동운명체인 지구를 휘감고 도는 큰 물결이 됐다. 그들은 한 알의 씨앗에서 지구와 우주를 보았던 것이다.
우리에게 지구의 상처받은 맨살을 보여주고 지금도 지구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 세계의 대표적인 환경인물 7인의 삶을 재조명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동물행동학자 제인 구달

야생동물 보호 ‘씨앗’을 뿌리다

동물행동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

동물행동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

“그는 텁수룩한 흰 턱수염이 난 잘 생긴 침팬지 수컷이었다. 나는 그에게 데이빗 그레이비어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는 매우 침착하게 야자수에 올라 야자 열매를 따먹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위해 차려놓은 바나나를 먹었다.”
동물행동학자인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침팬지의 친구다. 첫 침팬지친구였던 데이빗은 제인 구달에게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를 유명한 학자로 만든 것도 침팬지 친구들이었다. 제인 구달은 ‘침팬지와 함께 한 나의 인생’이란 책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동물학자가 됐다.

193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제인 구달은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4살 때에는 닭이 어떻게 알을 낳는가를 보려고 닭장 속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일로 가족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할 뻔했다. 1939년 제2차대전으로 아버지가 참전하자, 그는 영국의 남부 해안 지역인 버치스에서 살게 됐고 그곳에서 자연을 접한다. 일곱 살 때 그는 동물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아프리카로 가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타이피스트로 취직했다. 1956년에야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다. 학창시절인 친구인 클로가 부모님이 케냐에 농장을 사게 돼 그를 아프리카로 초대했던 것이다. 23세의 영국인 처녀는 혼자 몸으로 아프리카 케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인류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루이스 리키 박사를 만났다. 루이스 박사는 그를 침팬지 연구로 이끌었다.

1960년 7월 16일 침팬지의 땅인 탄자니아의 곰비 지역에 터전을 잡은 이후 그는 40여 년간 침팬지를 연구했다. 이 곳에서 결혼도 하고 아들을 낳고 길렀다. 침팬지는 연구대상이었지만 그의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그는 침팬지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그는 동물행동학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친구인 침팬지에게 닥친 위기가 그를 환경운동가로 만들었다. 아프리카에서 침팬지는 점차 사라졌다. 침팬지의 서식지인 밀림이 벌목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 25개국에 분포하던 침팬지가 4개국에서는 이미 사라졌으며 5개국에서는 거의 멸종될 위기에 직면했다. 애완용·동물원·서커단·의학 연구용으로 침팬지들은 수난을 당했다.

그는 1977년 제인 구달 연구소(JGI)를 설립했다. 여기에서 아프리카 침팬지와 야생동물의 현장 연구 및 보호사업을 펼쳤다. 침팬지 등 포획된 동물의 보호에도 나섰다.

동물 학자인 그는 연구소 활동에서 더 나아가 세계적인 환경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루츠와 슈츠(Roots and Shoots)’라는 운동이 1991년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 시작됐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세계로 퍼뜨렸다.

“루츠와 슈츠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뿌리(루츠)는 땅 밑에서 조금씩 자라 단단한 토대를 만들고, 작은 가지(슈츠)는 비록 작고 연약하게 보이지만 빛을 받기 위해서 벽돌 담장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뿌리와 작은 가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친구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곳의 젊은이들이다. 수백 수천의 뿌리와 작은 가지들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세상을 변화시켜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침팬지와 함께 한 나의 인생’ 중에서)그는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환경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에도 1996년과 2003년·2004년 찾아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음식혁명’ 저자 존 로빈스

‘단백질 제국’ 허상 폭로한 ‘혁명가’

음식혁명의 저자 존 로빈스.

음식혁명의 저자 존 로빈스.

‘당신이 부자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부자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음식혁명’의 저자인 존 로빈스는 달랐다. 그의 아버지인 어브 로빈스와 삼촌인 버트 로빈스는 아이스크림 회사인 ‘배스킨라빈스 31’을 창립해 세계적 기업으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회사를 물려주길 원했지만 그는 2세 경영인의 길을 걷지 않았다. 1969년 아내와 함께 브리티시 컬럼비아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에 이주해 10년 동안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저서를 통해 세계에 ‘음식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아이스크림 재벌’이기를 포기한 자신의 ‘인생혁명’이 사회적인 ‘음식혁명’으로 변화된 것이다.

존 로빈스는 저서인 ‘음식혁명’에서 ‘나는 아이스크림 속에서 태어났다’라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세계에 ‘아이스크림 왕국’을 만들었다. 그의 가족은 아이스크림 맛을 따서 고양이 이름을 붙였고 종종 아침을 대신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당연하게도’ 그의 가족은 비만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의 삼촌은 50대 초반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삼촌이 먹은 아이스크림의 양이 치명적인 심장마비와 관련이 있는지 물었다. 음식과 건강과의 관계를 부정하던 그의 아버지도 결국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고생하게 되면서 식단을 바꾸었다.

섬에서 산 10년의 경험을 토대로 존 로빈스는 1987년에 ‘새로운 미국을 위한 식사’(한국 번역판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육류를 주로 섭취하는 미국식 표준 식단에 큰 충격을 주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에서 그는 육식이 건강을 망치고 환경을 파괴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미국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물 뒤에 ‘숨겨진 폭탄’의 진실을 그는 낱낱이 폭로했다. 육우업계에서 소를 나르는 트럭의 환경을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 몇 마리의 소가 죽어나간다. 더욱 심각한 것은 수많은 화학약품과 호르몬제, 항생제가 소에게 투여된다는 것. 이런 소고기를 위해 갖가지 영양수치가 ‘단백질’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된다. 그는 미국이라는 ‘단백질 제국’의 허상을 숫자로 까발렸다. 그에게 7만5000여 통의 편지가 왔으며, 책을 출간한 지 5년 만에 미국에서 소고기 소비가 20%나 감소했다. 수많은 독자가 그의 이야기에 감동받아 채식주의자가 됐다.

존 로빈스가 펴낸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와 ‘음식혁명’.

존 로빈스가 펴낸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와 ‘음식혁명’.

‘음식혁명’이란 책에서 존 로빈스는 (미국)전국목축업자의 주장과 환경단체인 월드워치연구소의 주장을 대비해 제시하며 ‘누구 말이 옳은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음식혁명’을 위해 던지는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육식은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한국에서 번역된 첫번째 책의 제목이다.

그는 1989년 ‘어스 세이브(Earth Save International)’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인간과 지구에 건강한 방법으로 식품을 선택하는 운동을 전개해왔다. ‘예스!’(YES!·Youth for Environmental Sanity)라는 ‘환경 건강을 위한 청년 모임’은 그의 아들 오션 로빈스가 설립해 청소년들에게 환경 의식을 심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존 로빈스는 ‘YES!’이사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재벌2세를 포기하며 꿈꾸던 세상을 말한다.

“내게는 내가 거절한 것보다 더 향기롭고 더 그윽한 ‘아메리카 드림’이 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기반으로 하기에 모든 생명체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승리에 대한 꿈이고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기에 양심에 따라 평화롭게 살아가는 그런 사회에 대한 꿈이다.”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탄압 이겨낸 ‘나무들의 어머니’

200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왕가리 마타이.

200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왕가리 마타이.

2004년 10월 세계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한 아프리카 여성의 삶에 주목했다. 왕가리 마타이, 케냐 출신인 그는 ‘나무들의 어머니’로 불렸다. 아프리카의 숲을 지키고 나무를 심는 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그의 그린벨트 운동(The Green Belt Movement)으로 아프리카 전역에 3000만 그루의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같은 해 그는 환경운동가에게 수여하는 페트라 켈리 상도 수상했다.

아프리카 케냐의 시골에서 태어난 착하고 얌전한 여자 아이가 환경에 눈을 뜬 것도, 정권에 맞선 환경운동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나무와 숲을 경외하는 키쿠유족의 딸이었다.

1940년 녜리 구역의 카누웅구에서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왕가리 마타이는 스무 살이던 1960년 미국 마운트세인트 스콜라스티카 대학을 졸업한 후 피츠버그대학에서 생물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독일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동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됐다. 그에게는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1977년에는 케냐 나이로비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동아프리카 첫 여성 교수라는 기록을 남겼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최초의 아프리카 여성이라는 영예도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아프리카 여성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길을 걸으면서 여성운동가로서, 환경운동가로서 ‘도전적 삶’을 살았다.

므왕기 마타이와 결혼하면서 그는 환경운동에 참여했다. 남편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던 1974년 인바이어러케어(Envirocare)라는 회사를 세워 실업자들을 채용, 거리의 쓰레기를 치우고 그 자리에 묘목을 심었다. 모든 경비가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이 사업은 끝내 실패했다. 1975년 그는 국제농업시장에서 인바이어러케어의 고객과 후원자를 찾았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왕가리 마타이의 삶을 그린 책 ‘나무들의 어머니, 왕가리 마타이’란 책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묘목들은 죽었다. 그러나 이념은 죽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1977년 아프리카 숲을 살리기 위한 그린벨트 운동이 첫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이혼과 교수직 사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그에게 닥쳤다. 케냐에서 숲은 사라져가고 황무지는 늘어갔다. 그는 국제단체에 아프리카의 환경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아프리카 문제가 곧 세계의 문제임을 각인시켜준 것이다. 그린벨트운동은 외국단체의 도움으로 근근이 이어나갔다.
2004년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왕가리 마타이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이유에 대해 “그녀는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한다”고 밝혔다.

1999년 4월 왕가리 마타이는 케냐 나이로비의 카루아 숲에서 개발에 맞서 그린벨트 운동을 벌였다.

1999년 4월 왕가리 마타이는 케냐 나이로비의 카루아 숲에서 개발에 맞서 그린벨트 운동을 벌였다.

세계의 환경을 살리는 그린벨트 운동은 케냐에서는 정권에 맞서는 반체제 투쟁이 됐다. 1989년 나이로비 시내의 녹지대인 우후루 공원에 케냐 타임스가 건설되는 것에 반대해 그는 법적인 투쟁을 벌였다. 이때부터 그는 모이 정권의 탄압과 구타의 대상이 됐다. 1992년에는 시위 도중 구타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우후루 공원의 ‘자유의 구석’을 찾은 그는 세계언론에 이름을 알렸다. 1999년 카루라 숲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현장에서 구타당한 왕가리 마타이는 다시 한번 국제 여론의 초점이 됐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묘목을 들고 숲을 향해 걸어가는 아프리카 여성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필요하다면 목숨도 내놓겠다. 그러나 카루라 숲에서 집을 짓는 일은 기필코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케냐에서 모이 정권이 물러나자 그는 새 정권에서 환경·천연자연부 차관을 맡았다. 200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그린벨트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케냐인들은 그를 ‘마마 미티(나무들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가 죽는다면 나무로 태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월드워치연구소 설립자 레스터 브라운

전세계에 외치는 경고의 목소리

월드워치를 설립한 환경학자 레스터 브라운.

월드워치를 설립한 환경학자 레스터 브라운.

‘환경’을 화두로 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월드워치(Worldwatch)연구소와 지구환경보고서(The State of the World)를 주목한다. 1974년 설립된 월드워치연구소는 세계의 환경 문제를 주도하는 싱크 탱크다. 이 곳에서 1984년부터 매년 발행되는 지구환경보고서는 세계의 환경 이슈를 집약해 놓음으로써 세계적인 권위지가 됐다.

월드워치 연구소와 지구환경보고서라는 명칭 뒤에는 레스터 브라운(Lester Brown)이라는 이름이 늘 따라다닌다. 그는 월드워치연구소를 만들고 발전시켰으며 지구환경보고서를 통해 국제 사회에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2001년 월드워치연구소를 떠난 그는 지구정책연구소(Earth Policy Institute)를 만들어 계속해서 세계에 환경 이슈를 던지고 있다. 소장은 그만뒀지만 월드워치연구소 이사장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4년 미국의 뉴저지에서 태어난 그는 1955년 럿거스 대에서 농업 과학을 전공했다. 1959년에는 메릴랜드대에서 농업경제학, 1962년 하버드대에서 공공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적인 환경학자지만 박사 학위가 없는 것이 특징. 그의 왕성한 연구활동이 오히려 박사 학위가 없은 이유를 역설한다. 월드워치 연구소에는 박사학위자들이 거의 없다.

세계를 꿰뚫어보는 레스터 브라운의 환경적 시각은 이미 1970년대에도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국경없는 세계’ ‘빵만으로’라는 저서에서 2000년대에 일어날 일을 또렷하게 예견하고 있다. 나라간의 양극화 심화, 지구 환경의 악화 등은 그가 세상에 던진 경고의 메시지였다.

1974년 월드워치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런 메시지들을 수치로 객관화해 세상에 내놓았다. ‘엄살’로 비칠 수 있는 그의 목소리는 늘 합리적이어서 사람들을 설득했다. 지구환경보고서는 그가 노력해 만들어 낸 산물이다. 지구환경보고서가 발간되는 새해가 되면 세계 언론의 눈은 워싱턴 시내 메사추세추가에 위치한 월드워치연구소로 향한다. 올해에는 어떤 환경 이슈가 제기될지 주목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된다. 한국에서도 이 책이 매년 번역돼 나온다.

그는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선정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에코 이코노미-지구를 살리는 새로운 경제학’은 그의 최근 생각을 집약해 놓은 책이다. 그는 에코 이코노미, 즉 ‘생태경제’를 내세웠다.

인간을 중심으로 한 경제의 패러다임을 생태경제로 바꾸자는 것이 그의 주장. 인간이 자연 자원을 무한정 쓸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생태계가 유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 경제적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인식은, 싼 값에 공급하고자 하는 경제적 관념이 지구 생태계에 죽음의 징후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계 개선, 일회용품 자제, 벌목 금지, 생태경제 시스템 전환 등이 그가 내세운 해결책이다.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환경 메시지는 계속되고 있다. 70년대 이후 30여 년 동안 계속되온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현실적인,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

정치에 앞서 환경운동에 열정

2000년 12월 14일 한 달이 넘도록 논란을 벌였던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패배 시인으로 막을 내렸다.
“나는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이를 수용할 것이며 미국인의 단합과 민주주의의 역량 강화를 위해 양보를 선언한다.”

그의 아름다운 퇴장을 지켜보며 아쉬움을 표한 사람이 많다. 환경운동가들도 그들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미국 최대의 환경운동 단체로 6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시에라클럽은 고어 후보를 지지했다.

그는 정치인이자 환경운동가였다. 1992년 ‘균형 속의 지구(Earth in the Balance, 한국 번역본 ‘위기의 지구)’라는 환경 관련 책을 펴낼 정도로 환경문제에 대해 소신을 갖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오존맨’이라 불렀다.

앨 고어는 ‘워싱턴 정치 엘리트’다. 하원 7선, 상원 3선을 지낸 유명 정치인을 아버지로 둔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상원 청문회장을 드나들었다. 1965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고 1969년에는 베트남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그는 1976년 하원의원을 시작해 4선을 기록한 후 상원의원이 됐다. 1992년부터 8년 동안 부통령직을 수행해 정치에 있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언론은 그를 ‘준비된 대통령’으로 평가했지만 그는 2000년 대선에서 분루를 삼켜야 했다.

엘 고어의 환경에 대한 인식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저 레벨 교수로부터 지구의 온난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강의를 들은 것이다. 12년 후 그는 하원의원으로서 레벨 교수를 지구온난화 현상에 관한 최초의 청문회에 첫 번째 증인으로 초빙했다. 베트남 종군기자 시절 경험했던 제초제의 폐해도 그에게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그는 하원의원 시절 지구온난화, 핵무기경쟁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의정활동에 반영했다. 1989년 4월 닥친 아들의 죽음 위기는 그의 정치 인생에 커다란 전환을 줬다.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환경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이 지구를 살리느냐, 죽이느냐’는 기로에서 환경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나섬으로써 그 자신의 표현대로 ‘정치적 모험’을 단행했다.

그는 책에서 말했다.
“문명과 지구 사이의 상실된 밸런스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인류의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우리의 미래를 믿고 그것을 달성하고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희망의 길과, 우리의 유산을 이어받을 자손은 안중에도 없이 계속 환경을 파괴하면서 내닫는 길이다. 선택은 우리의 손 안에 있다. 지구의 장래는 밸런스 안에 있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환경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계속됐다. 지난해 ‘서울디지털포럼’ 참석으로 한국을 방문한 고어는 한 행사에서 환경문제에 대해 따끔한 소리를 했다. 그는 한 노벨상 수상자의 말을 인용해 “앞으로 50년 간 인류에 필요한 기술들은 이미 개발됐다”면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지구보호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는 지구온난화 예방운동을 펼치는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이 출품됐다. 그는 같은 제목의 환경 관련 두 번째 저서를 곧 발표할 예정이다. 여기에서 그는 지구온난화 문제가 왜 자신에게 중요한 이슈가 됐는지 설명한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임진택 부회장

“새만금, 최고통치자가 결단해야”

환경문화운동을 펼친 임진택 민예총 부회장.

환경문화운동을 펼친 임진택 민예총 부회장.

‘마당극’하면 맨먼저 임진택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55)을 떠올리게 된다. 임 부회장은 1970년대부터 마당극 운동을 펼치며 민중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연극을 만들고 연출했다. ‘마당극의 1인자’로 알려졌지만 그가 1980년대부터 환경운동을 펼쳐온 환경운동가란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환경 관련 작품을 무대에 올린 제1세대 환경문화운동가이며 1986년부터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 지도위원, 1994년부터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으로 활동했고 현재 환경운동연합의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1979년 결혼했는데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 아내가 몸이 쇠약해 약을 먹고 있었다. 당시 식품·의약품이 갖는 문제가 민감하게 다가왔다. 8년 만인 1987년 딸을 낳았다. 아이에 대한 관심 자체가 공해 문제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당시 상황도 배경이 됐다. 온산공단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반민주독재개발의 종착역이 바로 공해와 쓰레기라고 느꼈다. 개발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것이 ‘민주화’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반공해’라는 인식을 하게 돼 환경문화운동을 펼쳤다.”

- 구체적인 작품활동으로는 어떻게 나타났나?

“1983년 민족극 운동 단체 진영에서 워크숍 형태로 2편의 마당극을 선보였다. 이중 이청 씨의 소설 ‘부러진 노를 저어저어’를 각색한 마당극의 지도를 맡았다. 이듬해 ‘공해풀이 마당극,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작품을 연출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에서 대한민국을 ‘공해민국’ ‘민주공해국’으로 풍자했다. 그당시 공해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 가사를 바꾸어서 ‘하늘에 배기가스 떠 있고, 강물엔 중금속이 흐르고’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작품을 통해 당시에 가장 반체제적인 운동이 반공해운동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 공연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연법 위반으로 이틀 만에 막을 내렸다. 공연윤리위원회에 낸 초고 대본과 실제 공연대본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연정지처분을 받았다. 초고 대본을 만든 후 2∼3개월의 공동창작 토론을 통해 대본을 많이 고쳤다. 공연윤리위원회에서 공연 내용을 보고 반체제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공연 못하게 할 만하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개발정권의 토대인 ‘자본’을 앞세우고 환경과 자연을 파괴하는 ‘광기의 통치’가 있던 시절이었다. 이틀 만에 일어난 일 때문에 엄청 떠들썩했다. 해당 극단인 연우무대는 6개월 공연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래서 다음에 공연될 예정이던 ‘한씨 연대기’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해프닝을 빚었다.”

- ‘밥’이라는 대표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1985년 무대에 올렸는데 마당극의 대표작이다. 생명사상을 담고 싶었던 작품이다. 환경운동을 포함한 생명운동을 펼친 것이다. 연극적 완성도보다 작품 주제의 시대성과 보편성에 더 가치를 주고 싶다. 후대도 공감할 작품이라 생각된다. 이 작품 이후 오랫동안 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 물 문제에 관심이 커서 ‘물’이란 작품을 꼭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3년 전 시도했다가 작품 완성도가 미흡해 실패했다.”

- 연극에서 환경이라는 주제를 이끌어 냄으로써 환경문화운동의 1세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당시 작품을 통해 ‘군사독재가 계속되면 어떻게 망하나’라는 답을 ‘공해’에서 찾았다. 총칼의 위협이 전혀 결과가 다른 환경문제를 야기한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채희완 부산대 교수와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 김지하 씨가 나와 함께 환경·생명 문제를 다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신념으로 같이 일했다. ‘개똥이’라는 환경 관련 작품을 만든 김민기 대표는 동심이나 동식물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다. 나는 주로 정치풍자로 공해 문제를 비판했다. 이후에 연극에서 환경문제를 다루는 작품이 많아졌다. 대표작들은 대부분 나의 손을 거쳤다.”

반공해 마당극 ‘나의 살던 고향은’ 의 한 장면.

반공해 마당극 ‘나의 살던 고향은’ 의 한 장면.

- 최근 영화 ‘왕의 남자’에서 정치 풍자극이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나는 나 자신을 ‘광대’라고 이야기한다. 공길이라는 광대는 내가 본받으려 한 인물이다. ‘광대의 길’을 가는데 영향을 받았던 소재였다. 그보다 더 오래된 광대는 원효대사다. 원효는 민중의 고달픔을 육화한 큰 광대였다. ‘아, 이 사람이 광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대란 허튼 수작, 쓸데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운세를 감지하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사람이다. 1980년대도 그랬다. 사람들은 당시 자본주의의 대항 개념으로 사회주의를 생각했지만 자본주의에 대항해 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패했다. 자본주의 문제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생명운동이란 사실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 공추련과 환경운동연합에서 어떤 활동을 펼쳤나?

“공해 문제에 대해 ‘이걸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추련에서 반핵위원장을 맡았다. 내가 사실 외교학과 출신으로 국제 관계에 관심이 많다. 농담으로 ‘내가 반핵위원장 맡을 때에는 핵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내가 그 자리에 물러나니까, 북핵 문제도 터지고 그랬다.”

- 최근의 가장 큰 환경 이슈인 새만금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새만금은 사실 나의 고향이다. 전북 김제 출신인데 큰아버지가 지금 새만금 갯벌이 있는 심포항에서 백합양식을 했다. 그래서 새만금 갯벌을 자주 갔다. 갯벌 한가운데에서 사방이 지평선이 되는 느낌을 가지기도 했는데 우주적 외경감을 줬다. 당시에는 폐수로 백합이 모두 죽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새만금이 나에게는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한 장소다. 4년 전 동강 문제가 끝난 후 환경운동연합의 감사였던 나는 단체의 집중 특별사업으로 새만금을 제안해 대의원 총회에서 이를 수용했다. 고향이 발전해야 하는 것에는 동의하나 그것이 개발과 공장 건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옛날에는 갯벌의 가치를 몰랐지만 지금은 오히려 갯벌이 경제성이 높다는 걸 발견하게 됐다. 청계천을 봐라. 덮을 때는 발전으로 알았지만 뜯어내니까 대통령 감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새만금을 막았다가 10년 후 또는 30년 후 이게 아닌데 하고 뜯어낼 가능성이 많다. 새만금 문제는 법원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최고통치자가 결단해야 할 사안이다.”

- 과천세계마당극 큰잔치, 남양주 세계야외공연축제, 전주세계소리축제, 가야세계문화축전 등 최근 각 지역축제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아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환경주제를 다루는가?

“남양주 세계야외공연축제를 북한강변에서 연다. 단순한 예술축제가 아니라 환경축제다. 그래서 남양주시와 많이 다퉜다. 시는 예산을 들이면 개발을 생각하지만 나는 생명과 환경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야세계문화축전은 주제를 ‘오래된 미래’로 잡았다. 가야는 생명과 환경의 세계관이 이미 실현돼 있었고 이를 ‘오래된 미래’로 표현한 것이다.

- 지금은 환경문화운동을 어떻게 펼쳐야 한다고 보나?

“핵발전소 이야기를 하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어쩌란 것이냐’ 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원래 에너지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여름에 전력이 부족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더위를 이기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한 상황을 바꾸는 것은 문화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가능하다. 문화운동과 환경운동은 상보적인 관계다. 환경과 생명의 가치를 사람들이 깨닫고 자신의 가치관으로 갖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는 많은 문화적 방식이 필요하다. 영화·연극·그림·음악 등을 통해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가를 보여줘야 한다.”



녹색당 출신 환경장관 요슈카 피셔

이상과 꿈을 현실로 만들다

‘지구상의 첫 녹색당 환경부 장관.’ 요슈카 피셔가 1985년 12월 12일 독일 헤센주의 환경부장관에 취임했을 때 세계의 각 언론들은 이렇게 썼다. 1980년 창당한 독일 녹색당이 3년 후 연방의회에 27명의 의원을 진출시켰을 때만 해도 녹색당은 ‘반정당 정당(Anti-party party)’이었다. 녹색당 창당을 주도했고, 당시 녹색당을 대표했던 ‘녹색 잔다르크’ 페트라 켈리를 비롯한 대다수 녹색당원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녹색당은 1985년 헤센주에서 독일사회민주당(사민당)과 소위 ‘적녹연정’으로 주행정에 참여하게 된다. 비판적 야당이 아닌 권력을 행사하며 책임을 지는 여당이 된 것이다. 이로써 녹색당은 비판세력으로 남아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과 집권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현실주의자’들의 기나긴 싸움이 촉발되었다. 녹색당내 현실주의자들의 선봉에 요슈카 피셔가 있었다. 피셔는 녹색당 내에서 가장 성공한 정치인이다. 그는 1998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승리 후 사민당과의 연립정부를 구성, 2005년 10월까지 부총리 겸 외무부장관으로 일했다.

현재 독일 녹색당은 요슈카 피셔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녹색당 내에서의 지위는 ‘평당원’에 불과하지만 모든 결정이 그의 생각과 어긋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독일 내에서의 평가다. 인터넷 오픈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ww.wikipedia.org)에 소개된 피셔의 개인 홈페이지(www.joschka.de)에 접속하면 바로 독일 녹색당 홈페이지(www.gruene.de)가 나온다. 이것이 현재의 녹색당과 피셔의 관계를 상징한다. 오늘의 독일 녹색당은 피셔 그 자체인 것이다.

그가 1981년 녹색당에 입당한 이유는 환경문제, 생태문제에 관심있어서가 아니라 ‘68혁명세대’의 꿈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키 위해서다.

피셔는 1965년 김나지움 졸업을 앞두고 자퇴했다. 이 후 독학과 대학 청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폭력 혁명주의자’가 되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는 폭력혁명을 통해 사회주의국가를 실현하고자 활동했다. 당시 그가 시위 과정에 진압경찰을 구타하는 사진이 외무부장관이 된후 공개되어 사퇴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녹색당에 들어간 피셔는 당내에서 끊임없이 현실 정치참여를 주장했다. 비판만 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양보와 타협을 통해 이상을 현실에서 적용하고자 했다. 그는 1986년 하노버에서 있었던 녹색당 전당 대회에서의 연설은 이런 그의 생각을 잘 나타낸다. “이 자리를 빌려 켈리에게 조언 한 마디 하자면 정책은 머리로 세우는 것이지 입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환경장관과 외무장관으로 일하며 녹색당의 환경이념을 정치적으로 실현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환경세 도입, 자동차 휘발유값 인상, 재생가능에너지법 통과, 원자력 발전소 완전 폐기의 단계적 추진의 공식화 등을 관철했다. 2005년 5월11일의 오브리히하임 핵발전소 완전폐쇄는 녹색당의 에너지정책과 환경정책의 성공 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재 녹색당은 초기에 보여준 환경단체의 정치세력화 같은 비판집단이 아니라 완전히 정책정당으로 변모하였다. 녹색당의 공식명칭은 ‘동맹90/녹색당(Buendnis 90/Die Gruene)’이다. 1993년 동독의 시민단체연합인 동맹90(Buendnis 90)과 통합하면서 정한 당명이다. 녹색당은 2002년 베를린 당대회에서 “미래는 녹색이다(Die Zukunft ist gruen)”를 당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환경정책의 핵심은 ‘지속가능한 개발’이다. 경제·사회정책 또한 ‘현 세대의 욕구 충족을 위해 미래 세대의 기회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요슈카 피셔는 ‘환경’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그가 녹색당 출신인데다 마라톤을 통해 유명해져 ‘깨끗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 10월 말 외무부장관으로서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가 남산에서 달리는 사진이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또한 그의 달리기 자서전 ‘나는 달린다’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국내 마라톤붐에 크게 기여하여 ‘환경 이미지’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는 ‘환경운동가’가 아니다. 독일에서는 그를 ‘출세를 위해 녹색당을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녹색당의 환경정책, 평화정책, 사회정책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만든 ‘환경 정치가’임에는 틀림없다. 부총리 겸 외무부장관으로 8년간 재임하면서 사민·녹색 연립정부의 장관직에 녹색당 출신을 여러 명 진출시켰다. 그에게서 ‘녹색’ 냄새가 나지 않아도 독일이 더 ‘녹색’으로 바뀌게 하는 데에는 많은 기여를 한 것이다.

그의 사적인 삶은 상당히 자유분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4번의 이혼 후에 2005년 20년 연하의 여성과 다섯번째 결혼을 하였다. 마라톤을 통해 1년 만에 37㎏의 체중을 감량하는 등의 개인사와 정곡을 찌르며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연설과 그의 자유분방함으로 인해 독일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다.

2005년 10월 총선 패배로 그는 외무부장관에서 물러났다. 그는 퇴임을 하며 “너무 지쳐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요슈카가 녹색당이고, 녹색당이 요슈카인 현실에서 과연 정치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선주성(‘나는 달린다’ 역자) runman@runnersclu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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