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한국 남성들의 인맥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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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년남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매우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그들만의 줄잇기 놀이입니다. 거의 모든 남성들이 처음 만나면 호구조사를 시작하더군요. 고향, 출신학교, 군대, 현재 사는 동네, 혹은 본관…. 이 가운데 하나라도 공통점이 있으면 DNA검사로 친족임이 밝혀진듯 금방 술잔을 권하고 호형호제합니다.

그래서 PK, TK 등 지역으로 가르고 이회창과 경기고 인맥, 문희상과 경복고 마피아, 이해찬의 용산고 뜬다, 노 대통령 부산상고 동창 포진 등의 기사가 언론을 장식합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친한 이들을 중용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우리는 정도가 좀 심각합니다. 그렇게 관계가 형성된 후에는 타인들에게 “그 사람과는 친형제 같은 사이”라거나 “내가 키워준 사람” 등으로 영향력을 과시하지요.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눈, 귀, 판단력이 흐려지면 훌륭한 사람, 진짜 실력 있는 사람, 그 자리에 맞는 사람보다는 ‘내 말을 잘 듣고 내게 잘해주는 사람’을 선택하더군요. 주변에서 “그 사람은 위험하다”고 진언해도 듣지 않습니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죠.

윤상림·김재록 사건은 한국 남성들의 인맥지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줍니다. 수첩에 수천 명의 주요인사 이름이 직업·직급별로 분류되어 있다는 윤상림, 공고 출신이면서도 금융전문가들보다 더 영향을 끼친 김재록씨는 특유의 친화력과 잘해주기 전략으로 검사부터 총리까지 휘두르고, 재정경제부 고위관리부터 은행·증권사 임원에 이르기까지 소위 한국 금융엘리트들을 좌지우지했던 거죠.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면 그렇게 견고하고 끈끈했던 관계가 갑자기 비에 젖은 거미줄처럼 휘청거리고 심지어 뚝 끊깁니다. 황우석 박사를 영웅처럼 떠받들며 친분을 과시하던 이해찬 전 총리,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 등이 최근에 황우석 박사를 만나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고 과학자다운 태도를 보이라”고 조언해주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습니다. 김재록의 남자들 역시 “안 친하다”를 강조합니다.

정말 선진국이 되려면 학연·지연에 연연해 줄잇기를 하거나, 무조건 잘해주면 흐물흐물해져서 사소한 부탁이건 국가중대사건 맡겨버리는 악습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과거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힘은 ‘인연이 아니라 실력’을 강조한 덕분이란 걸 배웠으면서도 왜 이 악습은 사라지지 않을까요. ‘싸나이 의리’도 없는 이들이 말입니다.

<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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