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안익태를 친일파로 몰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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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엔 눈엣가시였던 존재… 친일논란과 애국가 교체는 별개 문제로 다뤄야

최근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논란’ 을 놓고 애국가 교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논란’ 을 놓고 애국가 교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는 과연 친일음악가였을까. 최근 안익태가 친일을 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애국가를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논란의 시작은 독일 유학생 송병욱씨(훔볼트대 음악학과 석사과정)가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3월호에 기고한 논문이었다. 독일연방 문서보관서 산하 필름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필름을 살펴본 송씨는 논문에서 안익태가 1942년 베를린에서 만주국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만주국’을 작곡·지휘했는데, 이중 일부 선율이 ‘한국환상곡’의 선율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필름에서 안익태는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창설을 축하하는 곡을 작곡하고 대형 일장기가 걸려 있는 음악당에서 이를 직접 지휘했다.

송씨는 이어 객석 4월호에서 안익태가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주고받은 편지를 근거로 친일의혹을 제기했다.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는 1942년 3월과 1944년 2월 23일에 작성된 것으로, 주소지는 일본 외교관의 사저였다고 한다. 송씨는 이를 근거로 안익태가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항일’ 한국환상곡 세계 돌며 연주

국내에서는 애국가를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환상곡과 만주국의 일부 선율이 비슷하기 때문에 한국환상곡에 포함된 애국가를 바꾸어야 한다거나 안익태가 친일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가 만든 애국가 대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안익태기념재단측은 이렇게 반박한다. “한국환상곡과 만주국의 일부 선율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 작곡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9곡 중에서 비슷한 부분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십시오. 게다가 안익태 선생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유럽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일본영사관의 주소는 단지 주소지로 사용했을 뿐 거주지는 아니었을 겁니다.” 박정미 안익태기념재단 사무국장의 말이다.

필름이라는 ‘물리적인 증거’가 있는 1942년 만주국 작곡·지휘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박 사무국장은 “만주국을 연주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안 선생의 예술활동일뿐 정치활동은 아니다”라며 “안익태 선생이 반일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자료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안익태 연구가 전정임 충남대 교수(음악학과)도 비슷한 견해다. 그는 “이 사건 하나는 친일행위일 수도 있지만 사건 하나만으로 안 선생을 친일파로 몰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안 선생의 삶 전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1938년까지 안익태는 항일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인정된다. 문제는 이후 7년 가량인데, 이에 대해 박 사무국장은 안익태가 절대 친일파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던 사람이 어떻게 친일파가 되느냐는 것이다. 박 사무국장은 예를 들었다. 1942년쯤 안익태는 이탈리아에서 한국환상곡 공연을 준비하다가 일본의 항의로 쫓겨난 적이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환상곡이 항일의식을 고취시킬 뿐 아니라 지구상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일본화됐으니 괜히 남의 나라 내분을 조장하지 말라는 항의각서를 보냈다.

작곡가 안익태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 홀에서 지휘하고 있다. 이 동영상으로 안익태가 ‘만주국’ 을 작곡·지휘한 사실이 알려졌다.

작곡가 안익태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 홀에서 지휘하고 있다. 이 동영상으로 안익태가 ‘만주국’ 을 작곡·지휘한 사실이 알려졌다.

한국환상곡은 ‘Korea’라는 이름을 가는 곳마다 알리는 역할을 했다. 애국가 선율이 포함된 한국환상곡은 일본 입장에서 보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한국환상곡은 단군의 개국을 알리는 서정적인 선율로 시작, 외적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기도 하나 항쟁 끝에 광복을 맞이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후에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인 비극 부분이 포함됐다. 한국환상곡 후반부의 합창부분에는 애국가의 선율이 흐르고 있는데, 안익태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전정임 교수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안익태 선생의 1953년, 1954년판 한국환상곡 악보 첫 번째 장에는 안익태 선생의 애국애를 담은 시와 함께 한국환상곡을 연주한 장소가 적혀 있습니다. 참고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남긴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기에 적힌 내용은 사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메모에는 연도별로 적혀 있다. 1939년 이탈리아 로마와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소피아, 1940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1941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독일 베를린·하노버, 스위스 취리히, 194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1943년 독일 베를린·함부르크, 스페인 마드리드, 이탈리아 로마 등 전 유럽에 걸쳐 있다. 친일음악인으로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가는 곳마다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며 일본에 합병된 한국의 고난을 알리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아래에서 위로’ 채택된 애국가

안익태기념재단은 이와 같은 자료에 근거, 인간 안익태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계획이다.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안익태 선생이 친일행위를 했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이 사실을 알리면 된다는 것이다. 스페인에서 가족으로부터 유품을 받아와 정리작업을 하고 있는 안익태기념재단은 전 세계에 퍼진 자료를 모을 계획이다. 올해 말 열릴 안익태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에 주한 외국공관원을 대거 초청하는 것도 이들에게 안익태 선생을 알리고 이들 정부로부터 자료수집에 적극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친일 논란과는 별개로 정통성을 확보한 애국가를 교체하는 것은 민족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4월 7일 민간학술단체 국가상징연구회가 개최한 ‘애국가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관한 토론회’에서 김연갑 연구위원은 “친일파 최남선이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고 독립선언문을 없애야 하느냐”며 “만약 안익태 선생이 친일을 했다면 그렇다고 인정하면 될 뿐 그것이 애국가 교체로까지 번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애국가는 독립을 바라는 민중으로부터 선택돼 국가가 된 노래이기 때문에 역사성과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애국가는 1890년대 독립신문의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에서 시작돼 다양한 가사와 곡조로 불리다 1907년 윤치호가 작사한 가사로 통일되기 시작했고, 1935년 미국에서 안익태가 작곡한 곡조가 더해져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애국가는 1941년 임시정부 국가로 채택됐는데, 이는 아래로부터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69호에는 “북미대한인회 중앙위가 안익태 작곡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그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한다’고 돼 있다. 이후 임시정부는 1941년 광복군 성립식에서 애국가를 연주, 국가로 채택했다. ‘아래에서 위로’는 해방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8월 16일 시민들은 신문사와 학교 게시판에 게시된 가사를 보며 합창하는 등 애국가를 널리 이용하기 시작했고, 1948년 제헌국회는 애국가를 국가로 채택했다. 김 연구위원은 “프랑스 국가에 ‘적의 목을 따 그 피를 뿌려라’는 부분이 있지만 역사성 때문에 여전히 국가로 불리고 있다”며 “민족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애국가는 더 이상 안익태 선생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익태 선생의 친일논란과 애국가 교체는 따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재용 기자 jj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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