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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문화재 고향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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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개성서 열려… “일본이 빼앗은 문화재 반환 계기로”

북관대첩비여!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 옛 고향집으로 편히 돌아가소서!”
3월 1일 개성 성균관에서 열린 북관대첩비 북한 인도인수식에서 한일불교복지협회장 초산 스님이 목놓아 열변을 토했다. 100년 만의 ‘굴욕적인 여행’을 마치고 원래 자리인 함북 김책시(옛이름 길주)로 돌아가는 북관대첩비에 대한 한 편의 환송시였다.

임진왜란 때 북평사 정문부 장군이 이끄는 의병들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1708년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1905년 러·일전쟁 도중 일본군 제2예비사단의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일본으로 ‘약탈’해갔다. 조상들의 패전기록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에서였다. 히로시마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나가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됐던 비는 1978년 최서면 당시 동경한국연구원장의 노력으로 존재를 확인했다. 30여 년의 노력 끝에 지난해 10월 100년 만에 우리 땅으로 넘어왔다.

북관대첩비는 남북 공동의 노력으로 이룬환수문화재 1호가 됐다. 앞으로 2호, 3호가 기대되고 있는 상황. 2호는 도쿄대 소장 ‘조선왕조실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46책을 환수하기 위해 월정사를 중심으로 불교계 인사들이 환수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환수위원회는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에 지지를 요청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아직도 3만여점이 일본서 ‘여행’

2004년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밝힌 자료에 의하면 해외 소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 우리 문화재 7만4177점 중 일본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재는 3만4152점으로 전체 해외 소재 문화재의 46%에 이른다. 초산 스님의 표현대로 옛 고향집으로 돌아가야 할 문화재 3만여 점이 ‘여행’을 마치지 못하고 일본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개성 성균관에서 열린 인도인수식에서는 환수문화재를 위한 남북의 공동 노력을 강조하는 연설이 계속 됐다. 북관대첩비되찾기대책위원회 김석환 위원장(북한 문화보존지도국장)은 “일제가 빼앗은 문화재를 다시 찾는 데 노력하자”고 말했다.
황금빛 한복을 입은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환수추진위 공동위원장)은 “북관대첩비의 환수가 문화재 반환의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한일협정 체결 때 과거 일제가 약탈했던 대부분의 문화재를 환수 대상으로 포함시키지 못했다”면서 “북일 수교 협상에서는 이를 반드시 포함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북측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유홍준 문화재청장 역시 ‘문화유적답사기’의 저자답게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난다”는 말로 압축해 표현했다. 유 청장은 북관대첩비의 ‘힘든 여정’을 이야기하면서 문화재 환수에 남북의 공동노력이 있어야 함을 덧붙였다. 그는 “문화재 관련 당국자의 대화를 정식으로 제의한다”고 말했다.

북한측은 당초 인도인수식 식순에도 없던 반일성명을 통해 문화재 환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북한 문화보존지도국 독고정철 처장은 4개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의 신사참배 중단, 과거사 사과와 보상, 부당한 독도영유권 주장 철회, 약탈 문화재 반환 등이다. 독고 처장은 문화재 약탈을 ‘악랄한 범죄’로 규정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기관지인 ‘조선신보’의 2004년 10월 보도에 의하면 북한에서 ‘일본 약탈 문화재 반환 토론회’가 열렸다. 독고 처장은 이 토론회에서 문화재 반환에 대한 의지를 강조했다고 당시 조선신보는 전했다.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장소는 약간의 논란 끝에 개성 성균관으로 정해졌다. 남측의 주장이 끝내 관철된 것. 북한은 협상과정에서 장소를 개성공단으로 하길 원했다. 개성 성균관에서 인수식을 열 경우 남한측 참가자들이 개성시내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 북측의 부담이 됐던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장소는 인수식을 며칠 앞두고 다시 개성 성균관으로 변경됐다. 북한측에서 북관대첩비 환수의 중요성을 감안, 개성시내 통과를 허락한 셈이다.

‘일본 정부가 인정한 환수 1호’ 의미

문화재 관계자, 북평사 정문부 장군의 후손인 해주 정씨 문중, 한일불교복지협회 관계자 등 150여 명은 북관대첩비를 실은 차량의 뒤를 따라 개성시내를 지나 성균관에서 인도인수식에 참가했다. 참가자 중에는 1978년 북관대첩비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한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당시 동경한국연구원장)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남북한 양측 관계자의 인도인수서명식과 차량 환송을 끝으로 인도인수식이 마무리됐다. 북관대첩비의 환수와 북한 반환을 보는 눈은 아직도 옛 고향집에 돌아가지 못한 일본의 한국 문화재를 향해 있다. 김원웅 의원은 “북관대첩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다”라는 말로 이번 반환의 의미를 되새겼다. 김 의원은 “1965년 한일협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허가로 처음 들어온 문화재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북관대첩비가 일본 정부가 사실상 인정한 환수 문화재 1호라는 것이다.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

“강제로 가져간 것은 반드시 반환돼야”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에서 북측 대표 김석환 위원장(왼쪽)과 남측대표 김원웅 의원이 인수증에 서명한 뒤 악수했다.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에서 북측 대표 김석환 위원장(왼쪽)과 남측대표 김원웅 의원이 인수증에 서명한 뒤 악수했다.

- 환수 문화재에 대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나.

“문화재가 약탈된 과정을 먼저 조사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도 약탈과정이 확인되고 있다. 그 과정에 상응한 요구를 일본측에 해야 한다. 3만8000점(임진왜란 당시 약탈 문화재 포함)을 모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약탈 문화재에 대해 한 건마다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일본이 강제적으로 가져간 문화재라는 것이 확인될 경우 반환돼야 한다. 특히 일본 관헌이 가져간 문화재는 반드시 반환돼야 한다. 일제가 침략에 기반한 강압통치로 가져간 것이다. 국가에서 재정 지원을 해서 문화재 약탈사를 조사하고 정리해야 한다. 전문 인력에게 연구를 하게 해 체계적인 반환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 문화재 환수와 관련된 법안은 그동안 없었나.

“지금까지 그런 법안 없었다. 국제적인 문제라 국내법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 우리 법안으로 어떻게 현실성이 있는지 아직 모른다. 할 수 있다면 약탈 문화재에 대한 자료연구를 뒷받침하는 법안 마련은 가능하다. 약탈문화재 자료 확인법, 문화재 반환에 대한 연구지원법 등을 만들 수 있다. 실무자에게 이미 지시했다. 전문가가 참여시켜 공청회를 거쳐 이번 정기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 조선왕조실록의 반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일협정에서는 일본 국가 소유는 되돌려주기로 했다. 도쿄대는 국립대학이다. 국립대학은 국가 소유이므로 도쿄대에 소장 중인 조선왕조실록은 당연히 반환돼야 한다. 당시 도쿄대 소유 유물에 대해 일본 정부도 밝히지 않았고 우리 정부도 몰랐다. 우리가 가장 많이 양보한 협정에서도 마땅히 반환돼야 했던 것인 만큼 우리가 돌려받아야 한다.”

- 남북 간 공동노력에 대해 선언적인 이야기가 오갔는데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고 있나.

“아직 구체적 이야기는 없다. 북한과 일본의 수교과정에서 북한에서는 약탈 문화재의 반환을 주장하지만 일본은 한일협정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국회에서 북일수교 과정에서 1965년 한일협정이라는 불평등조약이 북일수교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국회 결의안을 의결하도록 추진하겠다. 1970년 체결된 유네스코협약에 따라 점령으로 발생한 문화재 반출은 불법으로 간주되며 그것이 관철되도록 해야 한다.

<개성/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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